봄날의 노래 陽春曲/ 당唐 이백李白
芣苡生前徑 질경이는 앞 오솔길에 자라고
含桃落小園 앵도는 작은 정원에 떨어지네
春心自搖蕩 춘심이 절로 요동치고 있는데
百舌更多言 때까치까지 수다스레 지저귀네
이 시는 이백이 아닌 다른 작가나 무명씨로 되어 있는 판본이 많다. 심약이 지은 강남롱(江南弄)의 한 수라고도 한다. 삼민서국의 《이백시전집》에서도 이백시가 아니라고 고증해 놓고 있어 일단 무명씨로 알아 두는 것이 좋겠다. 다만 예전 책들에는 이백 시로 편집되어 있어 그 점 역시 알아야 한다.
이 시는 확실히 고대 민요의 전통을 잇고 있고 《시경》의 <국풍>과 그 정조가 매우 유사한 면이 있다. 2 구의 소원(小園)과 3 구의 자(自) 자가 상당히 정채가 있다. ‘작은 정원’은 이곳이 규중임을 드러내고 있고, ‘자(自)’는 제목의 양춘(陽春)과 잘 연결된다.
부이(芣苡)는 차전초(車前草)라고 하는 질경이를 말한다. 질경이는 말이나 소가 많이 다니는 길가에 잘 자라는데 그 씨를 난산(難産)을 치료하는 약재로 쓴다. 부이는 《시경》 <국풍>의 <주남(周南)> 편에 시의 제목으로도 나온다. 여인들이 질경이 나물을 뜯고 또 그 씨를 훑어 모으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내용인데, 세상이 화평하여 부인들이 자식을 두는 것을 즐거워하는 내용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함도(含桃)는 앵두를 말한다. 《설문해자》를 쓴 허신(許愼)은 ‘앵무새가 입에 물고 먹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으며, 이 때문에 앵도(鶯桃)라고 했다.’고도 한다. 앵두가 정원에 떨어지는 것은 무슨 말일까? 여자들의 혼인과 관계가 있다고 본다. 앵두는 꽃이 매화보다 늦게 피지만 매화보다 열매가 먼저 익는다. 아니 나무에 달리는 과일 중에서는 가장 먼저 익는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열매를 사당에 천신하기도 하고 관련 시나 글이 많이 전해 온다.
《시경》 <국풍>의 <소남(召南)> 편에 <표유매(摽有梅)>란 시가 실려 있다. 첫 시에서는 매실이 나무에 7개 달려 있다고 하고, 다음 시에서는 3개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며, 마지막 시에서는 매실을 이제 광주리에 모두 담는다는 노래하였는데, 각 시마다 후렴구처럼 총각들이 제 때에 자신에게 구혼해줄 것을 바라는 내용이 붙어 있다. 떨어진 매실이 많아지고 나무에 남은 매실이 적어진다는 것은 혼기가 자꾸 지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앵두가 작은 정원에 떨어진다는 이 시의 표현 역시 그러한 맥락으로 보인다.
백설(百舌)은 때까치를 말한다. 이 새는 매우 다양한 울음소리를 가지고 있어 이런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어릴 때 고향에서 본 때까치는 상당히 컸는데 인터넷에 검색을 해 보면 상당히 작은 새로 육식을 하는 새로 나온다.
이런 연유로 내가 이 시를 볼 때는, 질경이와 앵두는 처녀들의 혼사를 떠올리게 하는 사물이며 춘심은 그런 숨은 마음을 해방시켜 주는 폭로이고, 때까치의 울음소리는 더욱 그런 마음을 부채질하는 사물로 이해된다. 다만 마지막 구절이, 때까지에 대한 실제적인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감각적으로 와 닿지는 않는다. 잘 아는 분의 가르침을 기다린다.
이 시의 3연은 매우 노골적으로 되어 있어 역시 악부체 민요로 생각된다. 우리 대중가요에 <앵두나무 처녀>가 있는데 이 시와 내용면에서나 폭로적 해방감을 주는 면에서나 비교되는 면이 있다. 본래 공자 당시에도 서민들의 노래는 매우 노골적인 것이 많았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보다 아정한 작품을 고르고 또 작품을 손보아 실은 것이 지금의 《시경》 <국풍>의 시라 생각한다.
앞에서 주로 걸출한 문인들의 시를 통해 봄에 대한 시인의 섬세한 감각과 고도의 예술적 기교와 깊은 의미가 담긴 시를 주로 감상했다면, 이 시를 읽으면 봄에 대해 몸으로 반응하는 시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세상사가 별 것 없다는 세속적 삶을 확인하게 된다. 아울러 역설적으로 위대한 시인들의 시가 얼마나 각고의 노력 속에서 나와 우리의 정신과 정서를 풍부하게 해 주는지도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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