泊船瓜州과주에 배를 대고/송宋 왕안석王安石
京口瓜洲一水間 경구는 과주와 강 하나를 건너 있고
鍾山只隔數重山 종산은 몇 개 산 저 너머에 있네
春風又綠江南岸 봄바람 또 강 남안을 푸르게 하는데
明月何时照我還 밝은 달 언제나 돌아오는 날 비출까
이 시는 왕안석(王安石,1021~1086)이 1068년 봄에 강녕부(江寧府)에서 한림학사 겸 시강(翰林學士兼侍講)으로 벼슬을 받고 다시 고향 강녕에서 개봉으로 갈 때 지은 시이다. 강녕은 지금의 남경에 해당하며 남경 동쪽에 있는 종산(鍾山)에는 왕안석의 부묘 묘가 있는 곳이다. 《왕안석문집》에 실린 이 시의 주석에 의하면 당시 왕안석은 개봉으로 갈 때 경구(京口)라는 장강 나루에서 시승 보각(寶覺)을 만나 강을 건너 맞은 편 과주(瓜洲)에 배를 대고 그에게 이별하면서 이 시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경구는 지금의 진강(鎭江)으로 남경에서 동쪽으로 가면 나오는데 당시 진강에서 배를 타고 과주로 건너가 여기서 개봉으로 난 운하를 이용해 상경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지금 과주는 유숙하기 위해 배를 정박한 장소이며 이 시에서 말한 것처럼 과주에서 보면 몇 개의 산 너머 저 멀리 선산이 있는 종산이 보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는 기본적으로는 고향을 떠나면서 언제 다시 돌아올까 하는 심정을 표출한 시로 이해된다. 다만 시를 쓴 시점과 자신도 모르게 시에 유로된 서정에서 여러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왕운오(王雲五)가 쓴 《왕안석시(王安石詩)》연보에 의하면 왕안석이 개봉에 들어간 것은 4월이니, 지금 장강의 남안을 초록으로 물들이는 봄바람은 일차적으로는 자연의 봄바람이지만 작년에 즉위한 신종(神宗)의 은혜와 관심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청나라 항주 사람 여악(厲鶚)이 지은 《송시기사(宋詩紀事)》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오중(吳中)의 한 선비 집에 이 때 지은 초고가 전해오는데 그 초고에 이렇게 되어 있다고 한다. 처음에 이 구절을 ‘春風又到江南岸’이라고 하였는데 ‘도(到)’ 자에 동그랗게 삭제 표시를 하고 주를 달아 ‘좋지 않다[不好]’라고 써 놓고 ‘과(過)’자로 고쳤다. 그런데 다시 그 ‘과’자도 다시 동그라미를 쳐서 삭제하고 입(入) 자로 고쳤다가 곧바로 ‘만(滿)’자로 고쳤다. 이러기를 10번 정도 한 뒤에 비로소 ‘록(綠)’자로 정했다고 한다. 이 내용은 본래 <<용재속필(容齋續筆)>>에 있던 것인데 이 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시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새로운 출발을 앞 둔 사람이 돌아올 때를 걱정한다는 점이다. 돌아오는 나를 달빛이 비출 날이 언제일까라고 한 것은 아마도 보각과 헤어지면서 이 시를 쓸 때의 상황이 달이 떠오를 무렵이라 이런 시상을 전개한 것이긴 하겠지만 어쩐지 시가 사람의 앞날을 예측해 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왕안석은 이 때 개봉에 가서 신종의 전폭적 지지로 대지주, 대상인으로부터 농민들을 보호하는 여러 정책을 폈는데 기존 세력의 반발로 왕안석은 다시 은퇴하는 1076년 무렵에는 자신의 정책이 모두 폐기되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 왕안석이 득의하였을 때 그 반대파인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은 낙양으로 가서 절치부심하며 독락원(獨樂園)을 짓고 《자치통감》을 저술한다. 필자가 <구영이 그린 독락원도 속의 누정들>(문헌과해석 73, 2015)에서 살펴 본 적이 있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이 만약 마음이 있다면 이 두 사람의 소원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심이 깊었을 것이다. 왕안석이 다시 귀향하던 날 달빛 아래 왕안석이 무슨 생각을 하였는지 남긴 글을 후일 한 번 찾아볼까 한다.
365일 한시 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