쑤저우의 보대교 蘇州寶帶橋

쑤저우의 보대교 蘇州寶帶橋 (《圖畫日報》 제7호)

장쑤(江蘇) 성 쑤저우(蘇州) 시에 있는 보대교(寶帶橋)는 장교(長橋)라고도 불립니다. 당나라 때 처음 지어진 이 돌다리는 너비 4미터 길이 316미터, 교각 사이 배가 드나들 수 있는 교공(橋孔)이 53개입니다. 중국의 옛 교량 가운데 가장 긴 다공석교(多孔石橋)라고 합니다. 오늘날 보는 것은 명나라 청나라 때에 걸쳐 수차례 고쳐 지은 것이고, 최근까지도 거듭 보수가 이루어졌습니다. 2001년에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고, 2014년에는 중국 대운하 중요유산 가운데 하나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바이두 백과 해당 항목 개요 참조.)

《圖畫日報》 제7호 1면, ‘大陸之景物’(7) ‘寶帶橋’ / 宣統1년 7월 7일 / 1909년 8월 22일

기사의 설명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리 축조 당시 쑤저우의 자사였던 왕중서(王仲舒)가 허리에 두르고 있던 보대(寶帶)를 풀어 건설자금에 보탰다고 해서 ‘보대교’라 불리게 되었다고 이름의 내력을 설명하고 있고, 교공의 숫자를 52개로 들고 있네요. 건륭제가 강남 순방 당시 이 다리에 제(題)한 시가 있다고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건륭제의 시를 찾아보니 여기에도 교공을 53개로 들고 있는데요, 『도화일보』가 들고 있는 숫자가 하나 적은 이유는 알길 없습니다. 실수이거나 당시에 다리 일부가 훼손되어 하나가 적어졌을 수도 있겠지요.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특별한 내력이 있는 경우가 아닌 한, 또는 달리 표현하면 대단한 문화적 상징적 가치가 있지 않는 한, 사람이 만든 건축물 자체가 ‘명승’이 되는 경우는 참 드물었습니다. 바로 떠오르는 것들로 난창(南昌)의 등왕각(滕王閣)이나 우창(武昌)의 황학루(黃鶴樓) 정도가 있네요. 게다가 이런 명소들도 정통 회화에서건 대중적 판화나 서책의 삽도에서건 그 자체로 그림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참 드물었습니다.

중국에서 근대적 화보(illustrated newspaper)를 선도한 『점석재화보』만 봐도 특정 장소나 건물 자체가 그림의 주인공인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20세기 초에 와서 『도화일보』에 특정 건물이 중심에 놓인 세계의 명소들을 소개하는 코너가 등장한 것은 중국에서 근대적 사유가 확산되면서 지리지식이 차지하게 된 특별한 지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중국의 명소들을 선정하는 기준이나 소개하는 방식은 서양의 명소들의 경우와는 조금 다른 것처럼 보입니다. 서양의 건축물을 소개할 때 무엇보다도 그것의 기능과 규모가 강조되고 있다면 중국의 명소에서 내력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물론 『도화일보』의 기사를 보면 중국의 건축물을 보여줄 때에도 그곳의 기능이나 관련 수치를 아울러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습니다. 보대교를 설명하면서도 그 내력과 함께 “길이는 천 이백 장이며 다리 아래로 뚫려 있어 배가 지날 수 있는 데가 쉰 두 군데고 그 중 세 군데가 비교적 높다랗다.(長一千二百丈. 橋下涵洞之可通舟楫者. 五十有二. 中有三者較高.)”고 제원을 밝힙니다. 언제 지어진 것이며, 언제 지어졌고 얼마만한 크기이고 몇 명의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는 등의 수치를 드는 것은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대단히 모던한 방식의 사례입니다.* 어찌 보면 그것이 『도화일보』와 같은 대단히 대중적인 미디어에도 깊숙이 침투해 있는 셈입니다.

* 이와 관련해서는 차태근의 논문 「수(數) : 제국(帝國)의 산술과 근대적 사유방법」(『중국현대문학』 제56호, 2011)을 읽어보세요.

민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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