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들의 살림집에 눈길을 줄 때가 많다. 궁궐과 사찰 또는 귀족의 대저택에 비교하면 볼품은 없다. 그러나 거기에 살던 사람들이 차곡차곡 쌓아둔 소소한 일상이 읽혀지거나, 그 안에 담긴 거대한 역사의 작은 단면을 알아차리게 되면 볼품없는 외관과는 대조적인 또 하나의 우주가 보일 수도 있다.
상하이에는 내게 조촐한 살림집들이 있다. 하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다. 그 앞에 서는 순간 역사의 무게감이 압도해 온다. 실제로 그 집은 청사라고 할 정도는 아니고 상하이 서민들의 살림집이다.
상하이에는 거대한 역사의 소박하고도 아스라한 단면을 품고 있는 또 하나의 꼬질꼬질한 살림집 단지가 하나 있다. 20세기 전반의 주소로 말하면 프랑스 조계 포시가(프랑스 육군 원수의 이름에서 따온 지명) 아이런리(愛仁里) 42호다. 지금 주소로는 베이징서로(北京西路) 218농(弄) 4~11호다. 황허로(黃河路)와 베이징서로가 교차하는 사거리의 서북쪽 코너다. ‘농’은 골목이란 뜻으로 상하이 등지에서 가(街)나 로(路) 아래의 주소로 쓰이는 말이다. 아이런리는 마을이 아닌 작은 주택단지다. 임시정부 구지와는 달리 아무런 표지도 없다. 이곳을 찾았을 한국인은 아마 열 손가락도 채우지 못할 것이다.
이곳은 항일 독립군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인 김학철(본명 홍성걸)이 1935년 늦은 여름, 스무 살 나이에 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고 임시정부를 찾아와서는,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의열단의 후신)에 들어가 상하이 특구의 행동대와 선전대의 일원으로 암약하면서 2년 정도 머무른 곳이다. 이곳에는 그의 순진한 독립운동 투신 과정과 연상의 여인 송일엽과의 사랑과 이별이 전설처럼 새겨진 곳이다.
그의 스토리를 한 번 감상해보자. 가만히 음미해보면 당시 상하이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이 이어지는 것 같다.
김학철은 1916년 11월 4일 함경도 원산에서 출생했다. 중학교는 서울에서 유학했다. 보성고보에 재학하던 중 1935년 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고 학비를 훔쳐 교복 차림 그대로 상하이를 향해 서울을 떠났다. 세상 물정 모르는 햇병아리로 몇 가지 황당한 일들을 겪기는 했지만 압록강을 건너 선양과 친황다오, 산하이관을 거쳐 상하이 역에 도착했다. 중국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그는 인력거꾼이 데려다주는 동양관이란 일본 여관에 투숙했다. 하루 숙박비가 쌀 반 가마니나 되는 곳에서 하루를 자고는 다음날 부리나케 훙커우(虹口)의 싸구려 중국 여관으로 옮겼다.
중국 여관으로 숙소를 옮기고는 허기를 달래기 위해 식당을 찾아 나섰다. 운 좋게도 걸어서 10분 만에 ‘조선요리 경성(京城)식당’이란 간판을 발견했다. 실내는 서양식이었다. 그가 식사를 하고 있는데 치파오(旗袍) 위에 스프링 코트를 걸치고 핸드백을 들고 있는, 30대 후반의 세련된 중년 미인이 식당에 들어섰다. 영화의 한 장명이라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이 여인은 김혜숙이었다. 당시 서울로 돌아가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 투옥되어 있던 정태희의 부인이다. 김혜숙은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본부는 난징)이 상하이에 두고 있는 촉수의 한 사람이었다. 주인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김혜숙은 김학철의 테이블에 마주 앉아 말을 걸어왔다. 이 또한 영화 같지 아니한가. 어리숙한 김학철은 자기 집에 빈 방이 있다는 김혜숙의 말에 그날로 숙소를 옮겼다. 2층으로 된 집인데 그게 바로 아이런리 42호다. 60가구가 함께 사는 상하이식 연립주택이었다.
김학철은 김혜숙의 집 2층의 가운데 방을 쓰게 됐다. 한쪽으로는 김혜숙의 방이었고, 다른 한쪽은 김혜숙의 이종사촌 동생인 송일엽의 방이었다. 송일엽은 공공조계에 있는 ‘메트로폴리탄클럽’(大都會舞廳)의 택시 댄서(손님들의 사교춤의 파트너가 되어주는 직업 댄서)였다. 자정이 지나야 귀가하고 아침에도 열시는 넘어야 기동하는 터라 처음에는 자주 마주치지도 못했다. 아무튼 상하이에 도착한 지 하루 만에 독립운동 단체의 시야에 들었고 안전한 숙소까지 잡았으니 그에게는 행운이었던 것이다.
김혜숙의 집에 방을 얻어 산 지 며칠이 지나자 김혜숙은 김학철에게 시내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김학철은 훙커우(虹口) 공원이 어딘지를 물었다. 다음날 김학철은 자신이 임시정부를 찾아왔다는 것을 털어놨다. 김혜숙은 실망스런 답을 했다.
“그 하늘같이 바라고 온 임시정부가 지금 상하이엔 없다구요. 지난번 그 폭탄 사건으로 이 조계에서 배겨나질 못해 풍비박산했거든요. 기실 임시정부는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했었죠.”
김학철은 대실망의 구렁텅이에 빠졌다. 그러나 상하이에서 활동하려면 중국어와 영어를 먼저 공부하라는 김혜숙의 충고에 곧 중국어와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중국어 교사는 김혜숙이 소개한 심성운(본명 심상휘)이란 조선인이었다. 김학철이 당시에는 몰랐지만 심성운은 조선민족혁명당 상하이 특구 선전부장이었다. 김학철에 관한 김혜숙의 보고를 듣고 김학철을 포섭하기 위한 1단계 조치였던 셈이다. 영어는 김혜숙과 송일엽으로부터 배웠다. 장면 장면이 전부 영화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상하이에 온 지 두어 달이 되자 순진한 김학철은 생각지도 못한 남녀상열지사가 벌어졌다.
“어느 날 밤 곤히 자다가 어쩐지 가슴이 답답한 느낌이 있어서 돌아누우려 했더니 침대가 유별나게 비좁은 것 같았다. 영문을 몰라서 잠이 가득 실린 눈을 떠보니, 아~ 이게 웬일이냐! 술내 분내 향수 내 따위를 뒤섞어 풍기는 여자 하나가 내 싱글 베드의 거의 절반을 딱 차지하고 있잖은가. 내가 깜짝 놀라 일어나려 하니까 그 여자는 한 번 킥 웃고는 ‘푸울(바보)!’하고 내 목에다 팔을 감는 것이었다. 메트로폴리스에서 자정이 퍽 지나서야 돌아온 송일엽이었다”
김학철은 자서전에서 당시의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긴장과 불안 속에 살아야 하는 망국노 남녀가 가까이 지내면서 자연스런 사랑이 싹튼 것이다. 통속적인 듯도 하지만 음미하면 할수록 외국의 어느 골목에서 만난 두 남녀의 애틋한 사랑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무정부주의자 이하유가 김학철을 찾아오기도 했었으나, 이런 곡절을 거쳐 김학철의 진심을 확인한 조선민족혁명당은 그를 1936년 난징으로 데려가 입당시켰다. 입당한 김학철은 상하이 특구의 행동대에 배치되어 돌아왔다. 행동대는 조선인 일본인 등을 대상으로 목표인물을 처단하거나 금품을 강탈하여 활동자금을 조달하는 등 여러 비밀작전을 펼쳤다. 행동대장은 노철룡(일명 최성장,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 정예 방호산부대의 참모장, 전후 군사정변 획책 혐의로 총살됨)이었다.
이때 송일엽은 연인이자 동지였다. 그녀는 댄스 클럽에서 일본 상인을 많이 상대하면서 얻는 유용한 정보는 민족혁명당 상하이 특구 조직 책임자에게 알려주곤 했었다. 송일엽의 오빠는, 영국 상하이 해관에서 마약 거래를 봐주면 돈을 많이 모은 조선인의 돈을 강탈하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다른 사건에서 일본 경찰과의 총격전을 끝에 희생됐다.
1937년 노구교 사건을 빌미 삼아 일본은 중일전쟁을 터뜨렸다. 전쟁이 터지자 김학철은 상하이 행동대에서 선전대로 전보되었다. 중국의 라디오 방송이 매일 밤 10분씩을 조선민족혁명당에게 할애했고, 김학철이 출연하여 ‘동포들에게 고함’이란 프로그램을 매일 방송했다. 방송에는 송일엽도 몇 차례 함께 했다. 그러는 와중에 1937년 8월 13일 난징의 본부에서 소집령이 떨어졌고, 그는 상하이를 떠났다.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은 의열 투쟁이 아닌 정식 군대를 갖춰 항일 전쟁을 벌이기 위해 김학철을 포함한 젊은 대원들을 난징으로 소집했던 것이다. 조선민족혁명당은 국민당 정부의 협조를 받아 황푸군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시켜 정식 군대를 창설한다는 것이었다. 김학철은 항푸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38년 10월 10일 우한에서 조선의용대 창설 멤버로 참가했다.
이런 김학철이 애송이 시절에 조선의 독립과 혁명에 몸을 던지면서 한편으로는 달콤한 사랑을 맛보며 머물렀던 곳이 바로 아이런리 42호다. 1937년 8월 민족혁명당의 소집령을 받고 상하이를 떠나던 날, 세 살 연상인 연인 송일엽은 “못 가요, 못 가요. 못 간다니까!”면서 소매를 붙잡고 눈물을 뿌리며 몸부림치던 곳이기도 하다. 훗날 김학철은 자서전에서 회상하기를 “상하이를 떠나면서 미쳐날 지경으로 격동해 헝가리의 시인 페데피의 시 ‘사랑이여’를 읊조리고 읊조리고 또 읊조렸다”고 말했다.
사랑이여 (페데피)
그대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마저 바치리.
하지만 사랑이여,
자유를 위해서라면, 내 그대마처 바치리
상하이에 가거든 아이런리 42호를 찾아보시라. 지금도 이이런리라는 작은 표지가 벽면에 남아 있다. 그 안쪽으로 들어가 보시라. 어느 집이 42호인지는 지금 확인할 길은 없으나 분명히 어느 기구한 독립투사의 혁명과 애틋한 사랑이 그곳에 깃들어 있을 터이니 …….
사족 : 이 참에 <최후의 본대장 김학철 자서전>을 한번 읽어보자. 현재는 절판되었으니 도서관이나 중고서점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게 아쉽다. 김학철 평전은 따로 있으나 아스라한 기억을 읽는 것과는 다른 맛이다.
by 왕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