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이롱주택 – 초라한 망명객도 품어준 국제도시의 골목길
외국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 뭔지 모를 애틋한 그리움에서부터 천근의 무게로 다가오는 역사와 조국이란 묵직한 느낌까지, 1년이면 6개월 정도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는 필자도 마찬가지다.
상하이에 가는 한국인들이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거의 본능적으로 찾아가는 곳이 있으니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다. 상하이 시내 신톈디新天地에서 멀지 않다. 주소로 말하자면 마당로馬當路 306농弄 4호. 마당로라는 대로에서 306농 골목으로 들어서는 입구 상단에는 푸칭리普慶里라는 골목 이름이 석판에 새겨져 있고, 골목으로 10여 m 들어서면 바로 그곳이다.
이곳은 1926년 7월부터 1932년 4월까지 임시정부 요인들이 기거하던 곳인데, 1993년에 1차 보수하고 2001년에 다시 전면보수를 했다. 김구 선생의 단아하고도 견고한 미소나 윤봉길 의사의 굳게 다문 입술을 보노라면 필설로는 형용할 수 없는 어떤 기운이 가슴으로 스며들게 된다.
국권을 탈취당한 나라의 임시정부란 나라를 되찾겠다는 결의는 하늘을 찌르고 땅을 가를 듯하지만, 겉으로는 초라한 망명객이고 속으로는 의지할 곳 하나 없는 간난고초의 행로일 뿐이었다. 임시정부라고 하지만 상하이 백성들의 작은 집 두어 칸이 전부다.
마침 이 전시관에서는 임시정부 근거지로 활용되던 당시의 주택 내부를 모형으로 만들어 보여주고 있다. 좁은 골목길을 들어서면 똑같이 생긴 문이 늘어서 있는데, 문 하나가 곧 집 한 채다. 문을 들어서면 좁은 마당이 하나 있고, 현관으로 들어서면 가파른 계단 앞뒤로 3층, 2층 구조가 연결되어 있다.
집 구조 자체는 상당히 폐쇄적이고 담장은 벽돌로 쌓은 탓에 망명정부 근거지로서는 단단해 보이지만, 이 집은 그저 상하이의 보통 사람이 사는 평범한 주택이다.
골목 역시 허름하다. 306농 또는 보경리라고 하는 골목 입구 쪽에 들어서면 그나마 간단한 안내시설이 놓여 있어 임시정부 건물 입구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하지만 골목 안쪽에서 내다보면 과연 저곳에 한 나라의 정부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상하이의 평범한 백성들이 셔츠 바람으로 길가에 앉아 한가한 담소를 주고받고, 창밖으로는 소박한 빨래들이 널려있는 골목이다.
이렇게 허름하고 좁은 곳에서 뜻을 모아 항일투쟁을 조직하고, 목숨을 초개같이 던져 싸웠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나라가 국권이 있는 당당한 나라로서 한국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국제사회에서 대접받는 사람으로 여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이 두 발로 직립보행할 수 있게 한 가열찬 동력의 한 줄기가 이렇게 좁은 골목의 누추한 집으로 이어져 왔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집은 작고 골목은 허름해도 결코 가벼이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그런데 임시정부 전시관을 다 보고 나오면서 골목과 집이 독특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골목은 곧고 집들을 옆으로 이어 지은 연립주택과 비슷하다. 상하이에서는 이런 골목을 농弄 또는 이롱里弄이라 하고, 골목 안으로 가지런히 늘어선 집들을 이롱주택, 농당弄堂 또는 석고문石庫門 주택이라고 한다. 중국의 민가에서 상하이를 대표하는 살림집으로 19세기 후반부터 지어졌는데, 일본의 마찌야町屋와도 유사하다.
이롱주택은 전통적인 강남의 삼합원 또는 사합원이 이 지역의 사정에 맞게 변형된 것이다. 애당초 강남의 합원은 베이징과는 달리 단층이 아닌 복층이 대부분이었다. 인구는 많고 택지가 부족한 데다 농업이 주업이라 농지를 조금이라도 아껴야 하는 형편이었기에 일찌감치 2층의 합원으로 발전된 것이다.
1843년 상하이가 외국에 개방되면서 일본과 서구의 제국주의가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상하이는 ‘폭발’이라는 말 그대로 성장과 변신으로 질주해왔다. 1865년 개항 20년 만에 대외 무역액에서 광저우를 제치고 전국 1위로 올라섰고, 20세기로 넘어서면서는 대상하이大上海라는 말이 회자되었다. 이렇게 요동치는 상하이로 중국 전역에서 사람이 몰려들었다. 18세기 40년대 초에 20만이었던 인구가 19세기 말에는 50만, 1920년대 말에는 300만 명을 넘어섰다.
민간주택 수요는 급증했고, 1860∼70년대부터 서구 사업가들이 주택에 대량생산 방식을 이식시켰다. 택지를 사들여 강남의 2층 합원을 규격화해서 대량으로 지은 주택이 바로 이롱주택이었다. 중국의 전통적인 요소와 서구적인 요소가 결합한 것을 중국말로는 중서합벽中西合壁이라고 하는데, 주택에서의 중서합벽이 바로 이롱주택인 것이다.
20세기 전반 일제 강점기의 서울에서는 전통적인 반가 한옥이 집장사들의 을 거쳐 도시형 한옥으로 변형되어 간 것처럼 상하이에서는 이롱주택으로 변형된 것이다. 환경적으로 새로운 요소가 발생하면 당장은 일상생활이 바뀌지만, 그것은 곧 살림집이란 공간에 차곡차곡 쌓여 집 자체가 변형되는 것이다.
당시의 이롱주택 평면도를 보면 어떤 구조의 어떤 집이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는 장방형이고, 중축선을 중심으로 좌우가 대칭이라는 면에서 전통적인 사합원과 비슷하다.
그러나 베이징 사합원이 단층이었던 것에 반해 대부분 2∼3층이다. 1층에는 중축선을 따라 대문, 천정天井, 객당客堂, 계단실, 후천정後天井이 차례로 배치되고, 중축선의 좌우에는 전·중·후로 상방廂房들이 배치되어 있다. 2층에는 좌우로 방들이, 가운데는 창고가 배치되곤 한다.
대문이 특히 베이징의 사합원과는 다르다(위 사진). 이롱주택의 문은 독립적인 문루門樓가 문도를 품고 있는 입체적 구조가 아니라 두 짝의 여닫이만 있는 평면 구조다. 이 문은 문틀을 석재로 만들고, 문짝은 두꺼운 목판을 사용해 튼튼하다. 19세기 중엽 태평천국의 난이 중국을 휩쓸었을 때 상인, 지주, 부농과 관리들은 대문을 튼튼하게 해야 했다. 이런 경향이 상하이 이롱주택에서는 좀 더 변화된 형태로 나타났는데, 이를 석고문石庫門이라고 한다.
이롱주택은 좁은 골목에 연립으로 지은 탓에 문루를 세워 기와를 얹어 멋을 내거나 문 앞에 문둔門墩을 세워 신분을 과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문틀에 여러 가지 서구적 문양을 사용했는데, 중국의 전통주택과는 판이하다. 석고문이 이롱주택의 얼굴이라 석고문 주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석고문은 살림집을 넘어 상하이 전체의 서구적 냄새를 더욱 짙게 풍겨주면서 상하이 상징물의 하나가 되었다.
대문이 중축선상에 설치되어 천정과 바로 이어진 것도 택지가 협소한 탓이고, 베이징 사합원과도 다른 특징이다. 대문 안쪽에 하늘로 열린 공간을 천정天井이라고 하는데, 전후가 짧다. 객당 뒤에 또 하나의 천정이 있다. 천정은 베이징 사합원의 마당과 유사하지만 2층 구조에서 오는 채광과 통풍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두 개로 나눠 설치한 것이다. 상하이는 온도와 습도가 높아 채광과 통풍 기능을 높이기 위해 하나의 마당 대신 두 개의 천정을 채택한 것이다.
중앙의 객당은 조상의 위패를 모시면서 손님을 맞이하거나 제사와 혼례, 가족모임 등 중요한 의례를 치르는 공간이다. 베이징 사합원의 정당과 같다.
이와 같이 공간배치가 압축된 단진單進이 되면서 전통적인 사합원의 이진이나 삼진은 거의 없다. 전통적인 삼합원, 사합원이 강남의 사정에 맞게 변형되었다가 다시 상하이라는 역사 속에서 도시형 주택으로 변한 것이다. 이롱주택을 대량으로 건설하면 곧게 뻗은 좁은 골목을 중심으로 좌우에 빼곡하게 집들이 들어서게 된다. 이런 골목이 바로 전형적인 상하이의 골목농弄이다.
라오상하이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는 이롱주택과 농의 흔적은 지금도 상하이의 신톈디新天地 등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신톈디는 중국에서는 도심 재개발의 성공 사례로 꼽혀 톈진, 우한, 난징 등지에 아류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집은 그냥 집일 뿐이다. 그 안에 무엇이 담기는지는 건축과는 다소 무관한 스토리다. 누군가는 일상의 행복이 쌓여 풍선이 둥실대고, 누군가는 뜻밖의 불행에 치여 음울한 기운에 휘둘리기도 한다. 누군가는 그 집을 지어 돈을 벌었고, 누군가는 그곳에서 탈취당한 국권을 되찾기 위해 사제폭탄에 자기 목숨을 얹어 터트릴 거사를 모의하기도 했다. 이롱주택은 상하이 사람들의 집이지만, 그 속에 우리의 뜨거운 역사도 담겨 있다는 것을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 역사의 이롱주택일 수도 있다. 문화와 역사란 그렇게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