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의 인문학 35-변방의 혁명가 3 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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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의 혁명가 김산이 일제의 밀정으로 의심받아 총살당한 황토고원의 황량한 모습.

황토고원은 지표가 누렇거나 잿빛이다. 나무숲은 찾아보기 어렵고, 풀은 듬성듬성. 대지가 탈모에 걸리면 저럴까. 능선은 부드럽지만 중턱에서 계곡으로는 경사가 심하다. 계곡은 수직에 가깝게 내리 깎여 연한 속살이 따갑게 드러나 있다. 빗물이 수직으로 침식하여 파낸 틈은 촘촘하고 거칠다. 황토에 함유된 광물에 따라 흰색 연두 빨강 노랑 등의 색깔이 제각각 드러나거나 무지개처럼 한데 모인 곳도 종종 눈에 뜨인다. 광대한 지표에 붉은 기운이 배어나오고 절단면에서는 색색깔의 퇴적층들이 지질의 향연을 벌이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황량한 대지의 화려한 예술이 펼쳐진다. 화려하지만 오히려 비장감이 더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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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륙풍 소비에트 유적지

중국의 황토고원은 모래보다 가는 황토가 서북에서 날아와 고원지대에 쌓여서 생성된 것이다. 황하의 중류가 남에서 북으로, 동으로, 다시 남으로 흐르면서 크게 감싸며 도는 오르도스 지역이 그 중심이다. 동으로는 산시성 타이항산까지, 서로는 간쑤성의 하서주랑으로 진입하는 오초령까지, 북으로는 네이멍구자치구의 명나라 장성 지역까지, 남으로는 섬서성 진령까지 이른다.

황토고원은 장안(지금의 시안)과 낙양(뤄양)을 품은, 하나라에서 당나라까지 3천년 동안 중국 고대문명의 중심이었다. 20세기 동아시아 현대사에서도 결정적인 받침점이 되기도 했다. 1930년대 중반 이후 옌안은 곧 혁명과 동의어였다. 수많은 중국 혁명가와 청년들이 옌안으로 몰려들었다. 낯선 외국인들도 있었다. 김산과 같이 이념을 찾아온 변방의 혁명가도 있었고, 님 웨일즈와 같이 혁명가를 찾아온 이도 있었다. 이국땅에서 국적이 다른 두 외국인의 운명같은 만남(1937년)은 《아리랑》(원제 Song of Ariran, 김산 님웨일즈 공저)이란 명저를 낳았다. 《아리랑》은 1983년이 되어서야 그의 고향나라에 제대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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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의 김산

죽은 지 45년이나 된 김산은 기록 속에서 살아나와 치열한 역사의 시뻘건 장면들을 전해주었다. 1927년 12월 광저우기의에서 죽은 150여 명에 달하는 당시 조선의 최고 혁명가들, 해륙풍 소비에트와 해방구와 옌안이라는 낯선 단어들, 중국 땅에서 벌어졌던 국민당의 특무와 일제의 밀정, 잔인한 고문과 그보다 더 비참한 전향들. 《아리랑》을 처음 접한 한국의 학자들과 젊은이들은 당혹스러워 했다. 처음에는 그 내용이 사실인지도 쉽게 확신하지 못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금서라는 서슬 퍼런 딱지를 시대의 훈장으로 붙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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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과 《아리랑》을 함께 펴낸 님 웨일스

김산은 님 웨일즈와의 구술에서 사용한 가명이다. 본명은 장지락 또는 장지학. 1905년 평북 용천 출생이다. 중학생으로 3.1 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3일간 구류를 살았다. 처벌은 3일간 그를 눌렀으나, 나머지 그의 일생은 독립운동으로 강력하게 튀어 오르게 했다. 1920년 신흥무관학교를 최연소로 입교하고 수료했다.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독립신문에서 교정과 식자공을 했다. 1921~25년 베이징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이 시기에 외교론의 임시정부는 무기력에 빠졌고, 의열투쟁은 점차 개인희생을 기반으로 하는 의열투쟁이 한계에 다가가고 있었다. 대다수의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김산은 사회주의를 시대정신으로 받아들였다.

1924년 쑨원은 제1차 국공합작을 성사시켰고, 광저우는 중국혁명의 메카가 되었다. 많은 조선인들은 중국혁명과의 동맹을 조선독립의 첩경으로 인식하고 광저우로 몰려들었다. 쑨원의 중화민국은 조선인들에게 동맹의 문호를 개방했다.

김산도 광저우로 갔다. 중산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고 황포군관학교에서 강의를 했다. 김원봉 오성륜 김성숙 등과 함께 민족유일당 운동 등 조선독립을 위한 정치활동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1927년 장제스가 상하이에서 일으킨 4.12쿠데타로 국공합작은 참혹하게 깨졌다. 광저우의 조선인들의 열망도 벽에 부딪쳤다. 그해 12월 김산을 포함한 150여 명의 조선인 혁명가들은 장제스에 대항하여 일어난 광저우 기의에 기꺼이 참여했다. 안타깝게도 3일 천하로 끝났다.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머나먼 이역에서 피에 젖은 꽃잎처럼 땅바닥에 떨어지고 허공으로 날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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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은 목숨을 걸고 탈출했다. 홍콩을 거쳐 상하이로 돌아왔다. 심신을 회복하고는 베이징으로 갔다. 1930년부터 중국 공산당 베이징 시위원회 조직부장이란 중책을 맡아 베이징과 화북 그리고 만주까지 오가면서 활동했다. 그러나 어디든 배신자가 있는 법. 1930년 말 베이징에서 공산주의 활동 혐의로 중국경찰에 체포되었다. 조선인은 일본 국적이라는 치욕적인 이유로 일본 영사관에 넘겨졌고 신의주 경찰서로 이송됐다. 죽음의 고문을 당했다. 그는 견뎠다. 조직을 불지 않고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1933년 김산은 중국경찰에 다시 체포됐고 또 한번 신의주 경찰서로 압송됐다. 이번에도 고문이란 헬 게이트를 감내해야 했다. 겨우겨우 풀려났다. 심신을 추스른 다음에 다시 베이징으로 튀었다. 그러나 ‘일본경찰의 고문에 두 번이나 살아 돌아왔으니 분명히 전향한 밀정’이라는 의심을 털어내지 못했다. 김산은 심신 모두 깊은 상처를 받고 심하게 좌절했다. 좌절 속에 죽음의 문턱을 드나들던 그를, 천사 같은 여인네가 사랑으로 구해냈다.

살아난 김산은 조선인들의 연합에 의한 독립혁명을 모색했다. 1935년 김성숙 박건웅 등과 함께 상하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했다. 이 단체는 김원봉의 민족혁명당, 최창익의 청년전위동맹, 류자명의 아나키스트 그룹과 함께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를 창설한 주역의 하나. 김산은 조선인들의 독립운동 조직에 대해 중국 공산당의 비준을 받고, 두 번째 체포되면서 상실된 당적을 회복하기 위해 조선민족해방동맹 대표 자격으로 1936년 옌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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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혁명가들이 몰려든 옌안의 상징인 옌안보탑.

1937년 중국 공산당이 김산에게 옌안의 항일군정대학에서 강의를 하도록 했다. 이런 가운데 루쉰예술학원의 도서관을 통해 님 웨일즈와 운명적으로 조우했다. 님 웨일즈는 김산과 조선혁명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두 달간 22차례의 인터뷰를 통해 《아리랑》이란 명저를 남겼다. 김산은 운 좋게 님 웨일즈를 만나 그의 치열한 삶의 기록을 후세에 남겼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몹시 불행했다. 당적을 회복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일제의 밀정이며 트로츠키파에 참여했다는 누명으로 1938년 10월 19일 황토고원 어느 계곡에서 총살을 당했다. 비밀지령이었다.

《아리랑》은 1941년 미국에서 출판됐으나 히트작은 아니었다. 국내에서는 1946~48년 《신천지》란 잡지에 연재되었으나 끝까지 가지 못하고 중단됐다. 1950, 60년대 일본에서 번역서가 나왔다. 1977년 홍콩에서 중국어판이 출간됐고 김산의 아들 고영광(高永光)은 생부에 관한 생생한 기록을 접하게 됐다. 그는 생부의 처형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고 중국 공산당은 1983년 1월 김산의 복권을 결정했다.

“트로츠키파 참여와 일본특무 문제는 증거가 없으므로 마땅히 부정되어야 한다. 장명(김산의 당원명부상의 이름)의 피살은 특정한 역사조건에서 발생한 억울한 사건으로 마땅히 정정되어야 한다. 그가 장기간 받았던 억울한 누명을 마땅히 깨끗이 씻어주고 명예를 회복해주며 그의 당적을 회복시키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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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저우 기의 열사릉원 중조인민혈의정

변방의 혁명가 김산의 운명은, 광저우로 옌안으로 베이징과 바오딩으로 그를 찾아간 여행객을 참으로 막막한 심정에 빠지게 한다. 나라를 잃은 망국노였기 때문에 목숨 걸고 대항하던 일본의 경찰에 넘겨졌고, 일본경찰의 모진 고문을 견뎌 살아왔으나 오히려 의심을 받았다. 차라리 일본경찰의 고문에 죽기라도 했으면 죽음의 과정이라도 제대로 기록에 남았을 것을. 그가 중국인이었으면 1927년 광저우기의에 참여하고 해륙풍 소비에트에 참여했던 것만으로도 처형은커녕 살아서 출세의 길을 걸었을 것을.

그는 황토고원 어느 계곡에서 마지막으로 마른 숨을 들이마시면서 억울한 처형의 무자비한 총알을 고스란히 받았을 것이다. 황토의 너른 고원에서도 특히 붉은 기운이 도는 저 능선이 내 뇌리에 깊이 새겨지는 것은, 변방의 혁명가 김산의 처절한 아리랑이 핏빛으로 들렸기 때문일 것이다.

윤태옥(중국여행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