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세 도시 기행- 또 하나의 수도 3

시후(西湖) 부근

시후는 항저우 사람들의 생계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생활공간이었다. 이 평온한 경관은 사람들을 온화하게 만들었다. 저 루유(陸游)도 항저우에 당도하면 곧 시후 부근으로 나갔다. 시후에는 보트 레이스 등과 같은 그때마다의 놀이도 있고, 계절마다의 놀이에 흥겨워했던 장소이기도 했다.

순희(淳熙) 6년(1179년) 3월말의 일이다. 당시 퇴위한 태상황이었던 남송의 초대 황제 고종이 시후(西湖)에 나가 방생회를 행했다. 상당히 성대했고, 이것을 열기 위해 시후의 물고기가 매점매석되었다고 한다. 이 때 특별히 소환된 이가 쑹우싸오(宋五嫂)였다. 배로 소환된 그는 묻는 말에 “원래 카이펑에서 태어났지만, 폐하를 모시고 이곳에 참례하게 된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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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쟝도浙江圖(《함순린안지》에 수록)

쑹우싸오는 송을 대표하는 유명한 요리사였다. 특히 어갱(魚羹)의 명수로 이름이 높았다. 이에 관해서는 위안즁(袁褧)의 《풍창소독(楓窓小牘)》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카이펑에 있을 때는 린안(臨安)이라면 대도회로 이승의 천국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와서 보면 크게 다르다. 뭐가 됐든 부자유스럽다. 요리도 대단할 게 없다. 카이펑 쪽이 훨씬 좋다. 유명한 점포 몇 개 역시 대단한 게 없는데, 쑹우싸오는 집안 하인의 형수라서 가끔 들르곤 했다. 그 뿐으로 예전에 친한 사이의 교분으로 왕래한 것일 뿐이다. 사실은 소원하다.”

남쪽으로 도망쳐 린안에 왔으면서도 다른 풍토에 익숙지 않아 카이펑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우둔함이 들리는 듯하다. 그만큼 북과 남의 풍경은 달랐다. 나 자신은 예전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여행을 할 때 신선하고 아름다운 강남의 풍경에 한숨을 내쉰 적이 있었다. 따라서 아무리 린안을 카이펑처럼 만들었다 해도 화북과 강남의 차이는 덮어버릴 수 없었다.

이 일화는 많은 사람들이 카이펑에서 옮겨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실제로 항저우에는 지금도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있다. 그 때의 화북에서 이주가 카이펑 부근의 말의 영향을 농후하게 남겼던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카이펑에서 남방 요리 간판을 내걸고 있는 점포가 항저우에 와서도 똑같은 간판을 내걸었다는 것이다. 《도성기승(都城記勝)》에서도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했다. 린안에는 카이펑에서 갖가지 사람들이 흘러 들러와 여기서 강남의 경제력을 배경에 둔 일대 번영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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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후도西湖圖(《함순린안지》에 수록</figcaption>

그리고 그런 항저우의 사람들의 즐거움, 슬픔을 지켜보았던 것이 시후였다. 사실 나는 시마네 현(島根縣) 마츠에(松江) 출신이다. 마츠에에는 서쪽에 신지 호(𡦿道湖), 동쪽에는 나카우미(中海)가 있다. 특히 신지 호는 시후와 비슷한 것으로 다케타 다이쥰(武田泰淳, 1912~1976 년)도 기록으로 남겼다. 그런 의미에서 처음으로 시후를 조망하고 배를 타고 시후에 갔을 때는 비할 바 없는 감동을 맛보았다. 느긋하게 낮게 연이어 있는 산과 결코 투명하지 않은 수면. 이것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확실히 신지 호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 있다.

항저우의 와자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연예장(演藝場)이다. 구란(勾欄)이라고 불리는 연예장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에 실린 노래 소리는 시후의 태평스러운 경치를 노래한 것에서 시작한 게 많았던 듯하다.

린안의 번영

린안의 번영은 하나의 기적이라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 번영은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제르네의 《중국의 일상생활》도 이 번영을 상세하게 서술했지만, 무엇보다도 남송 멸망 직후의 항저우를 여행했던 마르코 폴로에 의해 전하는 경관 쪽이 좀 더 익숙하다. 마르코는 번영의 절정에 있는 항저우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발전하는 항저우는 남송대에는 인구 150만을 넘었다. 부유한 강남에 푹 빠져 그 발전을 지탱하고 수생 도시의 꽃을 피웠던 것이다. 카이펑에서 싹을 틔우고 금의 침입에 의해 꺾였던 북송의 도시문화는 활짝 핀 큰 꽃송이와 비슷하다. 북송의 멸망에 의한 카이펑의 소멸은 농염한 색으로 활짝 꽃핀 큰 꽃송이가 갑자기 송두리째 뽑힌 것이나 다름없다.

남송의 재건에 의해 항저우의 문화가 꽃 피웠던 것은 그 도시 문화를 재현했다고 하는 게 걸맞는다. 그렇지 않다면 재현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다른 꽃이라고 부르는 게 낫다. 꽃이라면 수련(睡蓮), 그것도 진홍의 수련, 강하게 눈에 띄는 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고래로 강남의 문화는 강한 매력을 갖고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그 꽃의 독에 취했던 이는 많았다. 육조의 허약한 왕자들, 그리고 귀공자들과 수 양제도 그 한 사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강남의 문화는 뜨거운 날 꽃핀 진홍의 수련, 독살스러운 양귀비꽃과 비슷하다. 그렇지 않으면 성장한 여성이거나 색향이 농밀하게 감도는 중년의 여인이든가. 나는 강남의 문화를 보면, 언제나 보들레르의 시가 생각난다.

보들레르는 강한 화장과 개성으로 당시 살롱에서 군림했던 여성들을 “저주스러운 여인들”(가도카와서점(角川書店) 판)이라고 노래했다. 독살스러운 화장과 강한 방향을 발산하는 수생 도시는 다음과 같은 노래에 걸맞았다.

오, 처녀여, 악마여, 괴물이여, 순교의 여인들이여
현실을 얕잡아 보는 위대한 정신이여
무궁을 찾는 여인들이여, 광신의 무리여, 반수신(半獸神)이여,
때로 크게 외치고 때로 훌쩍대며 우는 그대여

북방 민족의 강한 압력 속에서 말뿐인 화북 회복을 읊어대는 황제와 관료들, 북송 말의 재상 쟈쓰다오(賈似道)에 이르러서는 몰려오는 몽골의 압력을 애써 감추고 유흥으로 밤을 지새웠다. 이종(理宗) 황제가 시후(西湖)가 밝은 것을 보고 “틀림없이 쟈쓰다오가 놀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음날 물어 보면 바로 그대로였다고 한다. 실제로 린안의 번영은 위험한 밸런스 위에 서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