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소설古今小說-오보안이 가정을 희생하여 친구를 살려내다吳保安棄家贖友 3

한편, 오보안이 대동한 남만 사람은 오라를 뵙고서 오보안이 곽중상의 속전을 들고 찾아왔다는 말을 전하였다. 오라는 족히 천 필이나 되는 비단을 확인하고서 입이 쩍 벌어졌다. 오라는 즉시 사람을 보내어 속전을 주고 곽중상을 다시 사오게 하였다. 신정은 오라가 보낸 사람을 다시 보살만에게 보내어 속전을 건네주도록 하였다. 마침내 보살만을 찾아가 속전을 바쳤다. 보살만은 곽중상의 발에 채운 나무 차꼬에서 못을 빼내었다. 그 못과 살이 늘 맞닿아 있었던지라 마치 한 몸처럼 지내왔는데, 이제 못을 빼내니 그 고통은 처음 못을 박을 때보다 더 심하여 참을 수가 없었다. 피와 고름이 사방에 튀고 곽중상은 잠시 혼절하였다. 곽중상은 한참이 지나서 겨우 일어났지만 도저히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남만인 두 사람이 부대에다 곽중상을 담고 그걸 멜대에 꿰고 어깨에 메고서는 오

라 앞으로 찾아왔다. 오라는 이미 비단을 받아 챙겼는지라 곽중상은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곽중상을 남만인 안내원 겸 통역에게 건네주고 오보안에게 데리고 가라하였다. 오보안은 곽중상을 친형제를 만나듯이 그렇게 맞아들였다. 이 두 사람은 오늘에서야 비로소 직접 얼굴을 마주보게 된 것이다. 서로 말을 건넬 틈도 없이 서로의 얼굴을 보고 서로 껴안고 목을 놓아 울었다. 두 사람은 모두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하였다. 곽중상이 오보안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였음은 불문가지라. 오보안이 보기에 곽중상이 꼴이 말이 아니고 마치 짐승인지 사람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이며 두 다리로는 몸을 지탱하지도 못할 정도라, 일단 자신이 타던 말에 곽중상을 태우고 자신은 말고삐를 잡고 뒤를 따랐다. 마침내 요주에 도착하여 양안거를 만나 뵙고 보고를 올렸다.

원래 양안거는 재상 곽진의 문하에서 막료를 지낸 적이 있는지라 비록 곽중상을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곽중상을 마치 한 식구처럼 대접하였다. 전 상사가 살았든 죽었든 변함이 없는 양안거야말로 진정 군자로다. 양안거는 곽중상을 보더니 너무도 기뻐하였다. 우선 곽중상에게 목욕을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게 하였다. 아울러 부대 안의 전담 의원을 불러 곽중상의 상처를 치료하도록 일렀다. 잘 먹고 보양하니 한 달 정도 지나서 곽중상은 예전의 몸 상태로 회복되었다.

한편 오보안은 남만에서 곽중상을 데려오고 나서야 보빙 객사에 묵고 있는 아내와 아들을 찾아 만났다. 헤어질 때만 해도 포대기에 쌓여있던 아들이 이제 열한 살이라 세월이 이처럼 무상하게 흘렀으니 가슴에 어찌 회한이 없을 수 있겠는가? 양안거는 오보안의 의로움을 높이 사서 그를 존중하였을 뿐만 아니라 만나는 사람들에게 모두 오보안의 행동을 칭찬하고 장안의 요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오보안의 행적을 적어 보내어 널리 알렸다. 아울러 오보안에게 경비를 후히 마련해주어 장안에 가서 또 다른 자리를 알아보게 하였으니 요주의 다른 관속들도 도독이 이처럼 오보안을 챙기는 것을 보고선 자신들 역시 오보안에게 후하게 대접해주고 경비를 대었다.

곽중상은 요주 도독 밑에서 판관의 직을 수행하기로 하였다. 오보안은 자신이 받은 것 가운데 반을 뚝 떼어 곽중상에게 주고 쓰라 하였다. 곽중상은 거듭 사양하며 받지 않으려 하였으나 오보안이 거듭거듭 받으라 하는지라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두었다. 오보안은 양안거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아내와 아들과 함께 장안으로 출발하였다. 곽중상은 요주가 끝나는 곳까지 오보안과 함께 길을 가며 오보안을 전송하여 주었다. 오보안은 아내와 아들과 함께 수주로 이동하여 그곳에 아내와 아들을 남겨두고 자신만 혼자 장안으로 갔다. 장안에서 오보안은 가주嘉州 팽산彭山현의 부현령 직을 임명받았다. 가주는 또한 서촉 지방에 자리 잡고 있어 수주에 있는 가솔을 데리고 가기에도 편하였다. 오보안은 기쁜 마음에 임지로 길을 떠났다.

곽중상은 오랜 남만 생활을 통하여 남만의 속사정을 익히 알게 되었다. 남만 여인은 미모가 빼어난데도 몸값은 남자의 반밖에 하지 않으니 곽중상은 임지에 있는 삼 년 동안 형편이 닿는대로 사람을 보내어 남만 여인을 사모아 마침내 열 명의 남만 여인을 사서는 자신이 직접 중원의 음악과 춤을 가르치고 좋은 옷으로 치장시켜 양안거에게 보내어 양안거를 모시도록 하였다.

곽중상은 양안거의 은혜를 이런 식으로라도 갚고 싶었던 것이다. 양안거는 여인을 받고서는 웃으면서 말하였다.

“나는 그저 그대의 높은 기개와 의리에 감동하여 그대를 돕고 싶었던 것인데 이렇게 여인을 보내어 나에게 은혜를 갚겠다고 하면 나를 그저 대가나 바라는 시정잡배처럼 대하겠다는 것이오?”

“나리의 은혜를 입어 제가 다시 세상에서 살 수 있게 되었나이다. 이 남만의 여인들이라도 바쳐서 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 것입니다. 만약 나리께서 이마저도 거절하신다면 저는 죽어도 눈을 감을 수가 없습니다.”

양안거는 곽중상의 진심을 알아보고서는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내가 끔찍하게 아끼는 어린 여식이 하나 있으니 그대가 주는 여인 하나를 받아 그 아이와 친구라도 되게 하겠소이다. 나머지 여인은 받을 수가 없소이다.”

곽중상은 나머지 아홉 남만 여인을 양안거의 심복 부하 장수 아홉 명에게 나눠주어 양안거의 덕이 널리 드러나도록 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바야흐로 대국공 곽진의 공적을 기리고 그의 자식이나 조카를 특별히 임용하고자 하였다. 양안거가 표장을 올려 이렇게 아뢰었다.

“이젠 고인이 된 재상 곽진의 조카 곽중상은 예전 남만의 전투에서 승패의 조짐을 알고서 이몽 장군에게 간언하였으며, 마침내 남만의 포로가 되어서도 굳은 절개를 지켰습니다. 이제 10년의 고생을 마치고 중원으로 돌아와 3년에 걸쳐 소신의 막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자는 선대의 공적으로도 가히 직위를 받을만하며 자신이 세운 공적으로도 보답을 받을만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곽중상은 울주녹사참군蔚州錄事參軍에 임명되었다. 곽중상이 아버지에 등 떠밀려 청운의 뜻을 품고 고향을 떠난 지 15년만의 일이었다. 원래 그의 아버지와 아내는 그가 남만에서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그 후로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가 없어서 그저 죽었나보다 생각하고 있었다. 한데 이제 이렇게 곽중상이 관직을 제수받아 울주로 가면서 식솔을 데려가겠다고 하는 전갈을 받으니 온 가족이 기쁘기가 한량없었다.

곽중상은 울주에서 2년간 복무하면서 널리 명성을 쌓았고 이어서 대주호조참군代州戶曹參軍으로 전근하였다. 그곳에서 삼 년 동안 복무할 즈음 부친이 세상을 떠서 곽중상은 아버님의 상례를 치르고자 고향인 하북으로 돌아왔다. 상례를 다 치르고 나서 곽중상은 홀연히 상념에 빠져들어 탄식하였다.

“오보안이 나를 위해 속전을 치러주어 내가 이렇게 살아 돌아와 제2의 인생을 살게 되었는데 부모를 봉양한다는 핑계로 오보안에게 은혜를 갚는 일을 등한히 하였구나. 이제 부친도 돌아가시고 상례로 다 마무리하였으니 더 이상 은인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곽중상은 오보안이 임지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직접 가주 팽산현으로 그를 찾아가보기로 하였다. 오보안은 팽산현의 부현령 임기를 다 마치고 나서 형편이 어려워 다시 장안으로 가서 새로운 자리를 물색할 처지가 못 되었다. 오보안은 그냥 팽산현에 눌러 살고 있었다. 그러다 6년 전에 역병이 돌았을 때 그만 오보안 부부도 역병을 피하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오보안의 아들 오천우吳天祐는 부모를 황룡사 뒤편 공터에 장사지냈다. 오천우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글자를 깨친 덕에 팽산현에서 훈장노릇을 하며 밥을 벌어먹고 있었다. 곽중상은 이 소식을 듣고서 속이 너무 아팠다. 이에 곽중상은 직접 상복을 차려입고 허리에는 삼베 허리띠를 하고 지팡이를 짚고서 황룡사를 찾아가 오보안의 무덤 앞에서 울음 울고 더불어 제사를 올렸다. 제사를 마치고 나서 오천우를 찾아가 자신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주고는 오천우를 동생이라 부르고 오보안의 유골을 고향으로 모시는 일을 상의하였다.

먼저 오보안의 혼령에게 올리는 글을 지어 바치고 난 다음 무덤을 열어보니 유골 두 구만이 남았구나. 곽중상은 슬퍼서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지켜보던 자들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들이 없었다. 곽중상은 비단 주머니 두 개를 마련하여 오보안 부부의 유골을 각각 나눠 담는데 혹시 순서가 잘못되고 이장할 때 잘못 알아보는 일이 있을까봐 일일이 붓에 먹물을 묻혀 표시하면서 담았으며 그 비단 주머니 두 개를 또 대나무 상자 하나에 담아 자기가 직접 지고서 길을 출발하였다. 오천우는 자신의 부모 유골이니 이치상 응당 자기가 지고 가야할 것이라고 하였으나 곽중상이 전혀 들은 척도 하지 아니하였다.

“자네의 아버지는 나를 위하여 십년 세월을 희생하였는데 내가 이렇게 잠시 지고 간다고 뭐가 힘들겠는가. 그저 이렇게라도 내 마음을 다하고 싶을 뿐이라네.”

곽중상은 울면서 그 먼 길을 갔고, 길을 가다가 저녁에 주막에 들러 쉬게 되면 반드시 대나무 유골 상자를 상좌에 놓고 술과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낸 다음에야 오천우와 더불어 식사를 하였다. 밤에는 다시 한 번 대나무 유골 상자가 제대로 있는지 확인하고 난 다음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가주嘉州에서부터 위군魏郡까지 수천 리 길을 이렇게 걸어서 갔다. 그 두 사람의 발바닥에는 못이 박히고 잠시 나았는가 하면 다시 핏줄이 터지곤 하였다. 이렇게 계속 며칠을 가니 발바닥이 온통 퍼렇게 멍이 들고 안에서부터 아려왔다. 도저히 걸을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유골 상자를 내어주는 법이 없었다.

은혜를 갚는 길은 장사를 치르는 것뿐,
유골을 매고 떠나는 길 밤낮없이 걷고 또 걷는다.
바라보니 양평까지 가는 길은 수천 리,
언제나 고향 땅에 닿으려나.

갈 길은 먼데 어쩌면 좋을 것인가. 곽중상은 걱정이 앞섰다. 날이 저물어 주막에 자리를 잡고서 유골 상자 앞에다 술과 음식을 차려놓고서 눈물을 흘리며 재배하고 애절하게 간구하였다.

“아, 오보안 부부의 영령이시여, 나의 발바닥을 치유하여 주셔서 저로 하여금 무양武陽까지 가서 장례를 마칠 수 있게 하여주십시오.”

오천우 역시 곽중상 옆에서 간구하고 또 간구하였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 보니 곽중상의 두 발은 씻은 듯이 나았고 무양현에 갈 때까지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오보안의 영령이 그들을 보호한 것뿐만 아니라 하늘마저도 그들의 갸륵한 마음을 보살핀 것이리라. 곽중상은 자신의 집에 도착하여 오천우를 자신의 집에 머물도록 하였다. 곽중상은 일단 중당을 청소하게 한 다음 오보안 부부의 신위를 모시게 해 놓고 수의와 관을 새로 마련하여 새롭게 염하고 관에 안치하였다. 곽중상은 자신이 직접 상복을 입고 오천우와 더불어 조문객을 받아들이고 산일 하는 사람들을 고용하여 봉분을 만들었다. 모든 장례 용품과 절차는 자신의 친아버지를 장사지내는 것과 똑같이 하였다. 아울러 무덤 앞에 석비를 세워 오보안이 가정을 포기하고 친구를 구해낸 전말을 자세히 적어 무덤에 참배하러 오는 자들이 그 전후 사정을 소상히 알 수 있게 하였다. 아울러 곽중상은 오천우와 함께 오보안의 무덤가에 초막을 짓고 3년 치상을 하였다. 그 3년 치상을 하는 동안 오천우에게 경서를 가르쳐 오천우의 학문이 더욱 깊어지고 넓어지게 하였다.

3년 상을 마친 후에 다시 장안으로 가서 복직하려고 하였더니 오천우가 아직 장가를 들지 않았는지라 집안 처녀 가운데 덕이 있고 현숙한 아가씨를 골라 자신이 직접 결혼 예물을 마련하여 보내주었다. 더불어 동편의 가옥과 마당을 오천우에게 떼어주고 결혼하고서 예서 살라 이르고 자신의 재산 가운데 반을 딱 갈라서 오천우에게 주어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였다.

그 옛날 친구를 위해 처자식을 포기하였더니,
이제 그 아들이 친구에게 보살핌을 받네.
오이를 선물로 주었더니 보배를 답례로 받는 격,
선인은 선인의 마음을 저버리지 않는다네.

곽중상은 3년 상을 마치고 장안으로 돌아가서 남주장사嵐州長史로 보임되었고 더불어 조산대부朝散大夫라는 명예직도 얻었다. 곽중상은 오보안을 생각하는 마음이 가슴에서 사라지지 않아 이에 상소를 올렸다.

착한 일을 실천하라고 권하는 것은 국가의 법도요, 은혜를 입었으면 꼭 갚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고 배웠습니다. 신은 일전에 요주 도독 이몽 장군을 따라 남만과 싸울 때 우리 군사가 대승을 거두고 그 기세를 따라 남만으로 짓쳐 들어가자 남만 땅에 깊이 들어가는 것은 위험하니 신중하고 조심하여야 한다고 간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몽 장군은 저의 간언을 듣지 않으셨고 우리 군사는 전패하고 말았습니다. 신은 재상의 집안으로서 이역만리 남만땅에서 온갖 고초를 겪었습니다. 남만의 추장은 재물을 탐하여 제가 재상의 조카임을 알고서 비단 천 필을 속전으로 요구하였습니다. 하나 신의 집안은 천 리나 떨어져 있었으니 이 소식을 전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남만에 억류되어 지내던 10년은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피부가 다 짓이겨 달아나고 살이 패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때가 없었습니다. 신은 이역만리에서 양을 키우며 기다렸던 소무蘇武처럼 기꺼이 기다릴 각오는 있었으나 천자께서 편지 전하는 기러기를 쏘아 맞출 일이 생길 기약은 없었습니다.11) 이 때 수주 방의위 오보안이 마침 요주에 들렀다가 비록 신과는 비록 동향출신이라고 하여도 일면식도 없었지만 저와 의기가 투합함을 알고서 마침내 저를 위하여 속전을 마련하여 주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오보안은 갖은 노력을 다하여 수년 동안 가정을 돌보지 아니하고 돈을 모았고, 갖은 고초가 꼴이 말이 아니게 되고 처자가 주리고 추위에 떨 지경에 이를 때까지 노력하여 속전을 마련하여 마침내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던 신을 구해주어 신이 다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오보안에게 제대로 은혜를 갚기도 전에 오보안 저세상으로 떠나가 버렸습니다. 신은 지금조정에서 직책을 받고 녹을 먹고 있으나 오보안의 아들 오천우는 여전히 가난 속에 허덕이고 있으니 신은 그것을 차마 그냥 두고 볼 수가 없나이다. 게다가 오천우는 젊고 학문도 깊어 관직에 나가기에 모자람이 전혀 없으니 신은 신의 자리를 오천우에게 양보하기를 바라나이다. 그러하면 조정에서 선을 권면하는 본보기가 될 수도 있고 신은 오보안에게서 입은 은혜를 갚을 수가 있으니 일거양득이 될 것입니다. 저는 관직에서 지금 당장 물러난다고 하더라도 조금도 여한이 없나이다. 함부로 글월을 올린 죄 죽어 마땅하나이다.

때는 바야흐로 천보天寶 12(753)년 황제는 상주문을 받아 예부에 보내어 토론하게 하였다. 이 일은 모든 문무백관에게 알려졌다. 비록 오보안의 은혜가 앞에 있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관직을 던지는 곽중상의 의기 또한 세상에 드문 일이니 이 둘은 정말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진정한 친구라고 서로들 칭송하였다. 예부에서는 이 일을 여러 각도로 토론한 다음 보고서를 작성하기를 곽중상의 행동은 귀감이 되기에 족하니 비록 파격적이라고 하더라도 이 일을 기리어 만고에 드러나게 하여야한다고 하였다. 하여, 오천우를 남곡현위嵐谷縣尉로 임명하였으며 곽중상은 남주장사 직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하였다. 이 남곡현과 남주는 매우 가까우니 그들 두 사람이 조석으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 역시 예부에서 특별히 배려한 것이라.

곽중상은 오천우의 임명장을 품에 안고 은혜에 감사하며 장안에서 빠져나왔다. 무양현에 이르러 임명장을 오천우에게 전달하였다. 아울러 제사 음식을 마련하게 하여 양쪽 집안의 선영에 제사를 올렸다. 길일을 택하여 양쪽 집안이 같이 발정하여 서경을 바라고 임지로 출발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오보안과 곽중상의 우정을 기리었으며 관중과 포숙, 양각애와 좌백도의 우정도 이들 두 사람에는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다고들 하였다.

나중에 곽중상은 남주에서, 오천우는 남곡현에서 정사를 빼어나게 펴내매 모두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였다. 남주 사람들은 이 일을 기리고자 쌍의사雙義祠를 짓고 오보안과 곽중상의 제사를 모셨다. 마을 사람들은 소원하는 바가 있으면 꼭 이 쌍의사에 찾아와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쌍의사의 향불은 한 번도 꺼진 적이 없었다고 한다.

좋을 때 손 내밀어 악수하는 것이 뭐가 어려우리,
어려운 일 같이 겪어봐야 진정한 친구를 아는 법이지.
오보안과 곽중상의 진정한 사귐을 보았는가,
그들의 사귐은 범상한 자들의 그것과 비할 바가 아니라네.

11) 흉노에게 억류된 소무蘇武는 바이칼 호 근처에서 양을 키우는 노역을 하면서 각고의 세월을 보낸다. 흉노족은 소무에게 숫양이 새끼를 낳으면 한나라에 돌아가게 해주겠노라고 놀린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 한나라가 소무의 귀환을 요청하자 흉노의 임금은 소무가 이미 죽었노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제昭帝가 사냥터에서 사냥을 하다가 기러기를 쏴 맞추니 그 기러기 다리에 소무 일행의 소식이 적힌 편지가 묶여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