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 이름을 남긴 사람
당시의 유력자는 그렇게 도시에 살기 시작했다고 말했지만, 그 가운데는 여러 도시에 걸쳐 그 일족이 퍼져 있는 경우도 있었다. 졘캉부에서는 스치(侍其) 씨가 그 한 예이다.
스치(侍其) 씨는 중국에서는 희귀한 복성을 사용했던 일족으로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몇 사람의 간단한 전기가 남아 있을 뿐이다. 누군가 관료가 되었던 이가 있었지만, 고급관료라 할 수는 없었다. 군인도 나왔지만 군인이 별로 존경받지 못했던 송대에 그것은 특별히 이름을 남긴 일족이라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졘캉부에는 스치 씨가 살았던 골목이라는 의미로 스치샹(侍其巷) 이라는 이름의 길이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 이름이 쑤저우(蘇州)에도 있다는 것이다. 이 두 지명은 근대에까지도 남아 있다.
당시에 이미 도시에 정착해서 힘을 휘둘렀던 이가 있었다는 사실은 지명에 이름을 남긴 이가 있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여러 도시에 이름을 남길 만큼 세력이 컸던 이도 있었다고 한다면, 그 세력을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중세는 서민의 힘이 향상되어 그 커다란 영향 하에 놓여 있었다. 관료나 사대부는 그들 가운데 성공한 계층이었다. 다수가 지주나 상인 등 부유한 계급을 기반으로 고도의 지식을 갖추고 관료로서 군림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틀림없는 서민 출신이었다.
요시카와 고지로(吉川幸次郞)는 송대의 사대부는 서민 출신이라 고아(高雅)한 것을 동경했고, 당대의 귀족은 원래 고아한 출신이었기 때문에 속된 척했다고 논했는데, 탁견이라 하겠다.
사대부는 우월한 위치에 서 있었음에도, [그들의] 지위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않으면 안 됐다. 합격하더라도 출세할 수 없는 경우도 있고, 관직을 맡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대부라 할지라도, 또는 도시에 이름을 남긴 일족이라 해도 어느 정도 계층 간의 구분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서민들 사이에도 그런 구분이 있었다.
그런 일족이 도시에 이름을 남기고, 여기에 더해 그 이름이 여러 도시에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당시 도시의 실력자의 세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된다. 스치 씨는 당시 힘 있는 일족이 도시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를 아는 데 아주 좋은 사료를 남겼던 일족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루유같은 사람들의 왕래를 기다렸고, 교류를 즐겼던 것일까? 일기에 이름을 남겼던 사람들은 중세 도시에서 어떤 점묘를 만들어냈던 것일까? 새삼 많은 흥미가 솟구친다.
중세를 여행했던 루유의 일기는 이와 같이 귀중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일기만으로는 도시의 상세한 경관을 알 수 없다. 그들이 걸었던 도시는 어떤 풍경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도 여행에 나서기로 하자.
역사 속의 도시를 걷는 방법
사라져 버린 과거의 도시를 여행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우리는 H. G. 웰즈가 생각해냈던 것과 같은 타임머신을 갖고 있지 않다. 시간 여행이 되어버린 과거를 방랑하는 데에는 다른 방법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기에 여행을 시작하려는 즈음에 그 방법을 전수하도록 하겠다.
방법은 간단하다. 필요한 것은 시각표와 여행안내서, 그리고 왕성한 호기심이다. 사전에 많은 지식을 집어넣어 두는 것도 바람직하다. 관계있는 책과 사진에 눈길을 주는 것도 좋다. 당시의 물가를 조사해두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이것은 현대의 여행과 비슷한 점이 있다. 부담 없이 여러 가지 것을 충분히 가방에 채워두면 좋을 것이다. 다만 잊어서는 안 될 게 있다. 그것은 상상력이다. 꿈을 꾸고 상상의 날개를 펼칠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네버엔딩 스토리」의 소년과 같이 여행할 수 있는 것이다.
송대라 함은?
이제부터 찾아가는 곳은 중국의 중세인 송대이다. 960년에 세워져 1279년에 멸망한 왕조의 시대인 것이다.
송은 정강의 변(1126~1127년)에 의해 북송과 남송으로 나뉜다. 전자가 북송으로, 거의 중국 전역을 지배하였지만, 여진족의 금에 의해 멸망되었다. 최후의 황제인 휘종과 흠종 두 사람은 멀고 먼 우궈청(吳國城), 지금의 헤이룽쟝성(黑龍江省)으로 끌려가 자급자족하는 비참한 생활로 전락했다.
일족의 황자(皇子)가 남으로 도망쳐 세운 것이 남송이다. 화이수이(淮水)와 다싼관(大散關)을 연결한 라인의 남쪽을 지배했다. 풍요로운 생산력을 배경으로 미증유의 번영을 구가했지만, 그 말로 역시 비참했다. 마치 일본의 단노우라(壇ノ浦)에서의 헤이시(平氏)처럼 멸망했다. 쳐들어오는 몽골인들 앞에서 칠흑 같은 어둠에 잠긴 야산(厓山)으로 뛰어들었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바다에는 무려 10만 명의 사체가 떠올랐다고 한다.
일본사에서는 후지와라 씨(藤原氏)의 전성기로부터 헤이시(平氏)의 시대를 거쳐 가마쿠라바쿠후(鎌倉幕府) 중기 무렵까지이다. 이것이 송대이다.
도시의 지도
그런 시대의 도시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 지도이다. 지도라는 것은 사라져 버린 도시의 형태를 리얼하게 탐구하는 중요한 실마리이다.
송대에는 특히 우수한 지도가 얼마든지 있었다. 종류도 다양했다. 중앙집권제와 관료제가 발달한 송대에는 행정상의 필요에 의해 많은 지도가 편찬되었다. 지방의 지도와 전국의 지도가 다수 편찬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도시의 지도 역시 마찬가지다.
현존하는 송대의 도시 지도 가운데 그럭저럭 사용할 만한 것으로는 대체로 강남의 주성(州城)과 현성(縣城)의 지도가 많다. 그것은 그 지방의 사료가 많이 남아 있다고 하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이것들은 남아 있는 형식이나 표기방법이 여러 가지인데, 정밀도가 높은 것도 있는 반면 낮은 것도 있다. 또 일종의 이념에 기초해 묘사함으로써 현실의 모습과 괴리가 있는 것도 있다. 중국인 역시 다른 민족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 이상으로 도시에 대해 어떤 종(種)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지도를 해독할 때는 그 점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당시에도] 지도 작성방법이 발달해 상당히 정밀도가 높은 것이 만들어졌다. 서양 기술을 도입한 근대의 지도에도 손색이 없는 것도 있어, 송대 사람들의 지적 수준이 높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화약과 나침반, 인쇄술이라는 근대 문화 형성에 불가결한 기술에 하나의 기준을 보여주는 그 시대에 걸맞은 성과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여전히 방형(方形)으로 변형해 묘사한 종래의 것도 많은 점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금 전의 송대 졘캉부의 복원 상상도와 비교해주었으면 한다. 송대의 지도는 가로가 긴데(橫長) 실제로는 세로가 긴(縱長) 것이다. 그것은 책에 싣기 쉽다는 이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방형을 편애하는 중국인들의 심성이 작용한 것이라 생각해야 한다. 예부터 중국인들이 믿어왔던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났다(天圓地方)”고 하는 사상이 크게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더욱 주의해야 하는 것은 세로로 긴 것을 가로로 긴 것에 표현한 것도 있다는 점이다. 나카노 미요코(中野美代子, 1933~ )는 흥미로운 ‘방형론’을 전개하여 중국인이 방형을 편애하는 심리를 설명하면서, 그 마음이 정방형으로 기울었다고 논했다.
사실 《주례》에서 제시한 이상적인 플랜은 방형의 도성을 말한다. 하지만 중국인의 도시 플랜에서는 세로 또는 가로의 구형(矩形)이 많다. 세로가 긴 졘캉부가 가로가 긴 도형으로 표현된 것이나 계란형의 닝보(寧波)가 마찬가지로 가로가 긴 것으로 표현되었던 점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또 다른 검토가 필요한 것이지만, 단순한 방형 편애론이나 좌우 양면으로 된 책에 싣기 편하다는 이유 때문만으로 생각하는 것은 섣부른 것일 수도 있다. 형태를 바꾸면 지도의 역할이 손상되기 때문이다. 물론 변형된 지도 역시 그런대로 도움이 되기는 한다. 현대에 사는 우리가 현저하게 변형된 관광안내도나 교통안내도를 잘 쓰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지도만으로는 낯선 도시를 여행하기가 어렵다.
지도의 잔존 형태도 여러 가지다. 석판이나 암벽에 새겨진 것이 있는가 하면, 지방지에 첨부된 것도 있다. 지방지라는 것은 중앙집권제가 발달하는 가운데 통치의 자료로서 편찬한 일정한 지방에 관한 자료집이다. 거기에는 많은 지도가 있지만 그 가운데 상당수가 관념적인 지도다. 그밖에 일종의 백과사전에 수록된 것이 있다. 《사림광기(事林廣記)》의 카이펑(開封) 지도가 유명하지만, 명의 영명한 군주인 영락제(永樂帝)가 편찬찬 《영락대전(永樂大典)》에 수록된 것도 잘 알려져 있다. 그렇게 다양한 지도 가운데 백미가 쑤저우의 지도인 《송평강도(宋平江圖)》이다.
《송평강도》는 사람의 키를 훨씬 넘을 정도로 거대하다. 높이가 2.02미터이고, 폭은 1.36미터로, 거대한 석판에 새겨져 있다. 스케일은 3,000분의 1로 추정된다. 지금은 쑤저우의 옛 문묘(文廟)인 현재의 비림(碑林)에 있다. 정치(精緻)함으로 보나 아름다움으로 보나, 다른 도시 지도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 아름다움은 많은 사람들이 찬탄하고 있으며, 연구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와 같은 종류의 것으로는 관광지로 유명한 구이린(桂林)의 암벽에 새겨진 《구이저우성도(桂州城圖)》가 현존해 있지만, 다른 곳에도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졘캉부의 것을 기록한 송대의 지방지 《경정건강지(景定建康志)》라는 책의 목록에 그런 류의 지도가 실려 있지만, 아쉽게도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첨언해 두자면, 당시에는 일종의 도시 회도가 있었던 듯하다. 졘캉부의 반산(半山)에 퇴거해 있던 왕안스(王安石)가 예전의 임지였던 닝보(寧波)의 회도를 보고 그리워하는 시를 지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