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과 형주
무한을 소개하면서 형주에 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동일시하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형주는 고대의 구주(九州) 가운데 하나였으며, 한대 13개 주(州) 가운데 하나다. 그 크기는 한반도의 2배 이상이다. 동정호 위에 있는 호북성과 동정호 아래에 있는 호남성을 중심으로 하남, 귀주, 광서, 광동의 일부를 포함한다. 호북성과 호남성이 각각 남북한을 합친 한반도와 비슷한 크기이니, 행정구역으로서는 아주 넓은 셈이다.
동한 때 형주는 7개 군과 117개 현을 관할하였다. 7개 군은 남양군(南陽郡), 남군(南郡), 강하군(江夏郡), 영릉군(零陵郡), 계양군(桂陽郡), 무릉군(武陵郡), 장사군(長沙郡) 등이다. (동한 말기에는 남양군과 남군의 일부를 각각 쪼개어 양양군(襄陽郡)과 장릉군(章陵郡)을 만들어 ‘형양 9군’(荊襄九郡)이 되기도 했다.)
삼국지의 형주 쟁탈전 대목은 역사적 사실과 크게 차이가 난다. 소설에선 처음부터 제갈량이 계략으로 남군성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오면서, 일기주유(一氣周瑜)를 시행하지만, 역사적으로 유비가 남군을 차지하는 것은 2년 후인 210년이다.
209년 유비가 형주목(荊州牧)이 되어 유강구(油江口, 호북성 公安)에 진주하였지만 좁고 물산이 적어 발전하기 어렵기에 손권에게 형주를 빌려줄 것을 두 번이나 청했다. 그러나 손권은 주유의 건의에 따라 형주를 빌려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여동생을 유비와 결혼시켜 유비를 연금(軟禁)하였다.
209년 동오의 주유가 조인(曹仁)을 공격하여 남군을 빼앗고 남군태수가 되었다. 210년 주유가 병으로 죽자 노숙(魯肅)이 그 자리를 이었다. 노숙은 조조를 방어하는 연합의 뜻을 강조하여 손권을 설득하여 남군을 유비에게 빌려주었다. 유비는 공안(公安)에서 나와 강릉(江陵)을 치소로 삼고, 곧 남으로 4군을 복속하여 영역을 확장하였다.
요약하면, 형주는 적벽전 후 세 세력이 나누어 가지는데, 조조는 북쪽의 남양군을 차지했고, 유비는 남군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세력을 넓혀 장강 이남의 영릉, 계양, 무릉, 장사 등 4군을 점령하여 모두 5군을 차지했고, 손권은 강하군을 차지했다. 이후 유비는 형주를 기반으로 익주로 비상한다.
소설은 유비를 중심으로 쓰여졌기에, 적벽전 이후 형주란 유비가 통할하는 남군(南郡)의 강릉(江陵)을 가리킨다. 이곳은 양자강 가에 있거니와 익주로 통하는 관문이어서 아주 중요했다. 소설을 읽다보면 형주가 적벽전 전에는 주로 양양을 가리키고 적벽전 후에서는 강릉을 가리키는 걸 알 수 있다. 그 사실을 모르고 동일시하면 어리둥절하게 된다. 우리가 대전에서 “종로에 간다”고 하면 “서울에 간다”는 말과 같듯이. 이때는 형주가 남군이고, 남군이 곧 강릉이다. 이백이 노래한 “천 리 강릉을 하루만에 돌아가네”(千里江陵一日還)의 그 강릉이다. 이 강릉이 지금의 호북성 형주시이다.
유비가 211년 주력군을 이끌고 익주로 들어가면서 관우가 형주(남군+4군)를 지켰다. 유비가 익주를 점령하자 동오가 형주를 반환해달라고 해서, 유비가 직접 내려와(소설에서는 안 내려오고 관우 혼자 단도회에 참여) 담판하는 중 조조의 한중 침입에 동오와의 동맹이 필요하므로 215년 상수(湘水)를 경계로 오른쪽을 떼어준다. 219년 동오가 관우를 죽이면서 남군을 포함한 4군의 나머지도 모두 동오에 넘어간다. 결국 조조 세력이 점령한 남양군을 제외한 모든 형주 땅은 동오에 귀속된다. ‘형주 쟁탈전’은 십 년에 걸쳐 일어난 셈이다.
그러니까 형주는 원래 초광역 행정구역 이름이지만 때에 따라 여러 가지 지리 관념을 나타낸다. 1) 13주의 하나, 2) 양양, 3) 강릉, 4) 남군, 5) 형주 내 유비의 관할 지역, 6) 형주 내 조조의 관할 지역, 7) 형주 내 손권의 관할 지역 8) 기타 형주 내의 일정 지역 등이다. 이중에서도 관우의 이미지와 결합되어 남군이나 강릉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보면 강릉(지금의 형주시)과 무한은 모두 형주에 속하지만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