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게송 菩提偈/당唐 혜능慧能
菩提本無樹 보리수란 본래 없고 것이고
明鏡亦非臺 명경대도 존재하지 않는 법
本來無一物 본래 일정한 사물이 없는데
何處染塵埃 무엇이 먼지에 묻는단 말가
이 시는 선종의 6조 혜능(慧能 : 638~713)이 지은 시이다. 혜능은 나무꾼의 신분으로 불가에 귀의한 지 채 10달 만에 행자의 신분에서 일약 선종의 의발을 전수받는다. 본래 이름이 혜능(惠能)인데 스승이 지혜로울 혜자로 바꾸어 혜능(慧能)이 법명이 된 것이다.
혜능의 속성은 노씨(盧氏)로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집이 가난해 조금 자라자 땔나무를 해다 팔아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24세에 금강경을 듣고 문득 느끼는 바가 있어 기주(蘄州)의 황매현(黃梅縣) 동선사(東禪寺)로 가서 5조 홍인(弘忍 : 601~674)을 만나 방앗간에서 나락을 찧는 행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어느 날 홍인이 제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게송을 지어 오라고 하였다. 그 게송이 마음에 들면 의발을 전수한다고도 했다. 그런데 당시 신수(神秀 : 606~706)는 상좌(上佐)로 교수사(敎授師)의 직책을 맡아 다른 승려들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다른 승려들이 게송을 지을 생각을 하지 않고 신수에게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수는 스스로 공부가 부족함을 알고 있었기에 직접 게송을 지어 바치지 못하고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결국 밤에 오조가 거처하는 회랑 벽에 시를 썼는데 이랬다.
身是菩提樹 나의 몸은 보리수이고
心如明鏡臺 나의 마음은 명경대라
時時勤拂拭 수시로 열심히 닦아서
勿使惹塵埃 먼지 일어나지 않기를
이 시를 본 오조는 ‘문밖에 왔을 뿐 문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하였다.[只到門外, 未入門內]라고 평했다. 그리고는 2달 기한을 주고 다시 써오라 했다. 불법을 잘 모르는 사람이 이 시를 봐도 이 시는 불법을 한창 수행하는 사람의 시이지 깨달은 사람 시 같지는 않아 보인다.
지금 혜능이 쓴 시는 이 시를 전제로 하고 있는 시이니 일종의 화답시 성격이 있다. 혜능은 당시 글을 몰라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대신 쓰게 하여 저런 시를 지은 것이다. 이런 내용은 모두 육조 혜능의 이야기를 수록한 《육조단경(六祖壇經)》에 나오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벌써 연산군 때 인수대비의 명으로 목활자로 간행이 된 책이다.
그런데 이 시의 앞 2구는 대구를 이루고 있고 제2구에 운자를 놓아야 한다. 당시 게송은 한시처럼 짓지만 평측은 그다지 따지지 않아 이 시는 평측과는 관련이 적고 다만 운자를 맞추어야 하기 때문에 대(臺)자가 뒤로 간 것이다. 그런데 이를 흔히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명경도 역시 대가 아니네.’라는 식으로 번역을 한다. 그러면서 무슨 오묘한 뜻이 있는 것처럼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는 불법 이전에 시법을 모르는 것이다.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글자 순서에도 맞을 것 같은데 왜 아니라고 하는가? 여기서 보리, 명경을 뒤의 나무, 대와 분리해 놓아도 보리수와 명경대로 붙여 읽는 것은 신수의 시에 이미 보리수와 명경대를 하나의 어휘로 썼기 때문이다. 만약 이를 분리해서 보면 나무의 본체는 보리가 되고 대의 실체도 명경이 되어 이미 2가지 사물이 될 뿐만 아니라 그 본체인 보리와 명경은 허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온다. 이런 생각이 과연 혜능의 본뜻이겠는가?
이 말은 몸이 보리수이고 마음이 명경대라는 집착의 공간을 초월하는 공 사상을 담고 있다. 수행의 목표로 삼은 보리수와 명경대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집착도 끝내 놓아버려야 한다고 혜능은 말한 것이다. 《금강경(金剛經)》에 모든 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니, 모든 상이 있는 것이 상이 아닌 것을 알면 여래를 볼 것이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고 한 말을 비추어 보면 자연 알게 된다. 여래를 본다는 것은 부처가 깨달은 것을 나도 깨닫는다는 말이다. 바로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즉 만법이 공(空)인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일물(一物)이라 한 것은 어떤 고정된 특정한 물건이라는 의미이다. 이미 보리수나 명경대마저도 허상임을 알아 분별심이 없는 상태인데 어떻게 세속의 먼지가 더럽히고 말고 할 것이 있느냐고 혜능은 말한 것이다. 이 시는 물론 신수의 시도 본래 제목이 없는 것이다. 현재의 제목은 홍인이 게송을 지어 오라는 말에 근거하여 편의상 붙인 것이다.
이 시를 본 승려들이 모두 크게 놀랐지만 홍인은 혜능의 안위가 걱정되어 그 시를 신발로 지우고 혜능이 일하는 방앗간으로 가서 선문답을 한 뒤에 주장자로 방아를 3번 친다. 혜능이 즉시 알아듣고 삼경에 홍인에게 가서 《금강경》을 배우고 바로 깨달아 의발을 전수받고 그날 밤으로 홍인의 도움으로 강을 건너 남쪽으로 간다.
남쪽으로 가서도 늘 쫓기는 신세가 되어 사냥꾼들 무리 속에서 15년을 숨어 지내다 드디어 광주(廣州) 법성사로 가서 인종 법사(印宗法師)을 설법을 듣는다. 그때 마침 바람이 불어 절의 깃발이 나부끼게 되는데 어떤 중은 깃발이 움직인다 하고 어떤 중은 바람이 움직인다 하였다. 이때 혜능이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인종이 상석으로 이끌어 교리 문답을 하고는 제자의 예를 취하였다. 여기선 시를 논하는 자리라 이쯤에서 그친다. 자세한 내용은 앞에서 소개한 《육조단경》을 참조하면 된다. 언해본을 번역한 책이 13년 전에 나와 있다.
365일 한시 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