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삼이 한운암에서 전생의 사랑빚을 갚다 2
다음 날 동틀 무렵, 완삼은 친구들과 영복사로 놀러 갔다. 예불을 드리러 온 젊은 처자들을 보고서 그들의 마음은 싱숭생숭하였다. 저녁 무렵 다시 완삼의 집으로 몰려가 노래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러기를 며칠, 정월 스무날이 되었다. 이 날은 친구들이 다른 일이 생겨 완삼의 집에 놀러오지 않았다. 무료해진 완삼은 길가에 면한 행랑채에서 퉁소로 유행가 가락을 연주하기 시작하였다. 한참을 연주하고 있으려니 시녀 하나가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와 인사를 올린다.
“뉘 댁의 계집인고?”
“쇤네는 벽운이라 하옵고 앞집 진태상 댁의 외동딸 옥란 아씨의 몸종이옵니다. 아씨가 도련님을 흠모하와 도련님을 뵙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이렇게 저를 보내셨답니다.”
완삼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내로라하는 명문거족이니 감시하는 눈도 많을 것이고 간섭하는 입도 적지 않을 것이로다. 내가 직접 찾아뵙고 싶어도 그게 어찌 쉬운 일일까? 진태상 댁 사람들에게 발각이라도 된다면 뭐라고 발명한다? 이 역시 곤욕당하기 쉬운 일일진저.’
완삼은 마침내 입을 열어 벽운에게 일렀다.
“돌아가서 그대 아씨에게 이르시게. 지체 높은 귀댁에 출입하다가 괜히 문제가 생길까 걱정스럽다고.”
벽운이 돌아가 아씨에게 완삼의 말을 전하였다. 옥란의 귓속에는 완삼의 퉁소 소리가 맴돌고 있었다. 완삼을 향한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던 옥란은 손가락에 끼고 있던 금가락지 한 짝을 빼서 벽운에게 주었다.
“이 금가락지를 도련님에게 전해 주거라. 우리 집에 왔다가 혹 문제가 생기면 이 금가락지를 보여 주면 될 것이라고 일러라.”
벽운은 금가락지를 받아들고 마음이 다급해져 쏜살같이 달려갔다. 벽운에게서 금가락지를 받아든 완삼은 비로소 옥란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옥란 아씨의 금가락지가 내게 있고, 벽운이 나를 안내한다면 못 갈 것도 없지.”
완삼은 벽운을 따라 옥란을 만나러 갔다. 진태상 댁에 도착하여 중문 안으로 들어갔다. 옥란이 몸소 중문에까지 나와서 완삼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완삼을 보고는 눈이 그대로 멈췄다. 완삼 역시 옥란을 눈이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때 두 사람이 서로 입을 열려는 순간 문밖에서 하인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리께서 돌아오십니다!”
옥란은 황급히 자기 방으로 들어갔으며, 완삼은 잽싸게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이후로 완삼은 손에는 금가락지를, 가슴에는 옥란을 끼고 살았다. 옥란이 규중심처에 있어 소식을 전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집에 있거나 출타하거나 옥란이 준 금가락지만 보면 가슴이 미어졌다. 다시 만날 기약이 없으니 그리는 마음만 키워갈밖에. 완삼은 고관대작의 아들은 아니어도 돈푼깨나 있다는 장사치의 아들이다. 그럼에도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만 갔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였다. 옥란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너무도 깊었던 까닭이리라. 이렇게 두 달여가 지나자 완삼은 결국 몸져눕고 말았다. 아버지가 물어도 어머니가 물어도 완삼의 입은 열릴 줄을 몰랐다.
소태를 씹은 듯 찡그리며 닫은 입,
그 괴로움 본인이 아니면 누가 알리.
완삼의 친구 가운데 집안도 형편도 비슷한 장원張遠이라는 이가 있었다. 장원은 완삼이 몸져 누웠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이 되어 완삼의 집에 문병 왔다. 침상에 누워 있던 완삼은 장원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하인을 시켜 장원을 모셔오도록 하였다. 파리한 얼굴과 야윈 뺨, 입으로는 연신 가래를 뱉어내는 완삼을 보고 장원은 안타까운 마음에 혀를 찼다. 장원은 침상 옆으로 다가갔다.
“며칠 보이지 않는다 했더니 이렇게 병이 들었었구나. 자네 대체 무슨 병에 걸린 겐가?”
완삼은 그저 고개를 가로저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장원이 다시 말을 이었다.
“어디 손을 내밀어 봐. 맥이라도 한 번 짚어보세.”
완삼은 더 이상 가타부타하기 싫었던지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완삼이 내미는 손을 잡고 진맥하려던 장원의 눈에 금가락지 하나가 들어왔다.
‘어허, 환자가 금가락지를 다 끼고 있다니. 더구나 이 금가락지는 여자 건데. 아마도 완삼이 아픈 것이 다 이 금가락지하고 관련이 있으렷다.’
이런 생각이 미친 장원은 맥은 짚을 생각도 않고 바로 완삼에게 물었다.
“자네, 그 금가락지는 어디서 난 건가? 내 생각에는 자네의 병이 다 저 금가락지 때문인 것 같으이. 우리야말로 오래 사귀어온 친구가 아닌가? 날 속이려고 하지 말고 솔직히 말해 주게나.”
완삼은 장원이 이미 눈치 챘음을 알았다. 죽마고우에게 털어놓지 못할 일이 어디 있으랴! 완삼은 장원에게 자초지종을 소상히 이야기해 주었다.
“권문세가의 여식이 이런 금가락지를 자네에게 준 걸 보면 자네를 생각하는 마음이 보통이 아님은 분명하네. 어서 기운을 차리시게. 다 나에게 생각이 있으니 내 필히 자네와 옥란이 만날 수 있게 해 주겠네.”
“내 병이야 옥란을 그리워하여서 생긴 것이니 옥란을 만나기만 하면 바로 나을 걸세. 자네는 어서 내가 옥란을 만날 수 있게 도와나 주게.”
완삼은 머리맡에 감추어 둔 은자를 장원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내 성의니 거절하지 말고 받아 주게.”
장원은 그 돈을 받았다.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자네와 옥란이 만날 수 있도록 해 주겠네. 몸조리나 잘 하시게.”
장원은 완삼의 집에서 나와 옥란의 집으로 걸어갔다. 옥란의 집 대문 앞에서 한참이나 서서 출입하는 사람들을 살펴보았으나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장원은 고민하며 돌아섰다.
다음 날도 장원은 옥란의 집을 찾았으나 역시 기회를 얻지 못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우선 옥란의 몸종이라는 벽운을 만나 보아야겠다.”
저녁 무렵, 누군가 자기 항아리 두 개를 들고 옥란의 집에서 나오더니 소리를 내질렀다.
“이놈의 마당쇠는 어디를 간 거야? 마님이 한운암閑雲庵의 주지 스님에게 음식을 갖다 주라 분부하셨거늘.”
이 말을 들은 장원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운암의 주지라면 내가 잘 아는 스님이잖아. 옥란 어머님이 한운암 주지에게 음식을 보낼 정도라면 옥란 어머니와 한운암 주지는 평소 왕래가 있는 사이렷다. 그렇다면 한운암 주지가 옥란의 집안 사정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니 한운암 주지를 먼저 만나야겠군.’
하루가 지난 다음 날 아침, 장원은 은자 두 덩이를 들고 한운암을 찾아갔다. 한운암은 작고 고즈넉한 암자였다.
야트막한 담, 작은 암자.
처마에 달린 풍경은 바람에 땡땡.
외진 곳의 암자엔 인적 드물고,
공양 짓는 연기와 독경 소리뿐.
한운암의 주지 왕수장王守長은 본디 기녀였다가 불문에 귀의한 자였다. 모시던 스님이 입적한 지 얼마 되지 않는지라 밥 짓고 청소해 주는 보살 둘만을 데리고 암자를 돌보고 있었다. 권문세가의 시주를 받아 대웅전 뒤에다 관음․문수․보현 보살상을 세우는 중인데, 가운데 세운 관음상은 진태상 댁의 시주를 받아 금도장을 하였으나 나머지 두 불상은 아직 시주를 받지 못하였다. 이날 왕 주지는 막 암자를 나서려다가 장원의 방문을 받았다.
“장원 나리, 어인 일로 오셨나이까?”
“그야 스님을 뵈러 일부러 왔지요.”
왕 주지와 장원은 같이 암자 안으로 들어갔다. 차를 마시고 나서 장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참, 스님은 어디를 가시려던 참이셨소?”
“진태상 댁의 시주를 받아 관음상 조성 불사를 마쳤는데도 그간 바쁘다는 핑계로 인사도 못 드렸었지요. 어제 진태상 댁에서 음식을 만들어 보내 주셨기에 소승이 답례 차 찾아뵈려던 참이었소. 나머지 두 불상도 진태상 댁의 시주를 받아야 할 형편이니 작은 선물이라도 하나 사서 제가 직접 찾아뵈려고 합니다.”
장원은 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님, 저에게 둘도 없이 절친한 친구가 하나 있는데 재산이 엄청납니다. 불상 조성 정도야 그 친구한테 부탁하면 문제없을 것이니 아마 진태상 댁에까지 찾아갈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다만 그전에 스님께서 도와주셔야 할 일이 있소이다.”
장원은 소매에서 은자 두 덩이를 꺼내어 탁자 위에다 올려놓았다.
“이 돈이야 그저 착수금조로 드리는 거고, 일만 잘된다면 불상 조성이야 순풍에 돛단 격으로 금방 해결될것입니다.”
본디 재물을 탐하는 성격이었던 왕 주지는 탁자 위의 질 좋은 은자를 보더니 금세 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나리 친구분이 뉘신지요? 소승이 할 일이란 게 대체 뭐지요?”
“이 일은 비밀에 부쳐져야 하니 스님이 직접 해 주셔야 합니다. 이왕 말하는 김에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게 밀실로 가서 말씀드리리다.”
말을 마친 장원이 은자 두 덩이를 왕 주지 소맷자락에 넣어 주니 왕 주지가 못 이기는 체하며 받았다. 두 사람은 암자의 작은 별채로 들어가 대나무 의자에 앉았다. 장원이 말문을 열었다.
“내 친구 완삼이란 녀석이 올해 정월에 진태상 댁의 옥란 아씨를 한 번 보았다는군요. 옥란 아씨 역시 완삼을 사모하게 되어 징표를 하녀 편에 보냈다는데 그 후로 두 사람이 만날 길이 없어 애만 태우고 있다오.
내일 스님께서 진태상 댁에 가시면 기회를 봐서 옥란 아씨 방으로 찾아가서 완삼이 암자에서 아씨를 만나고자 한다는 말을 전해 주시오.”
왕 주지는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 일은 소승이 나서기에 만만치 않소이다. 소승이 옥란 아씨를 보게 되면 이런저런 눈치를 살피고 나서은근슬쩍 말을 붙여야 하는데, 나리가 말씀하신 징표란 무엇입니까?”
“금가락지 한 짝입니다.”
“그럼, 그 금가락지를 잠시 소승에게 맡기시오. 제게 생각이 있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