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說明 3
이 《부, 명예, 권력에 관한 단순한 사색》의 성격을 소책자로 정하고 스스로를 일반 상식의 층위에 한정시킨 채 나는 상식적인 자료로 작업하며 단순하면서도 그리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문제를 수시로 내 자신에게 물었다. 그런 글쓰기는 대단히 즐거웠다. 내가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조금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거기에는 확실히 수공예 장인이 느낄 법한 즐거움이 있었다. 마치 정확히 배를 몰아가서 정확히 고기를 낚아 올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일본의 한 도예 거장의 감상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는 말하길, “단지 예술 작품만 계속 생각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가끔씩 일상적인 물건들을 불에 태우면 그 작품이 자기도 모르게 심드렁해지는 일을 피할 수 있다.”라고 했다. 그해 내내, 내 머릿속에 꽂혀 있던 단어는 ‘조밀함’이었다. 그것은 이탈로 칼비노가 생각해놓고도 미처 얘기하지 못한 주제이기도 했다(그는 뭐라고 말할까?). 나는 내가 잘하는 방식으로 사방에 흩어진 그 상식들을 모으고, 연결하고, 뭔가를 찾아 그 사이의 공백을 메우고, 가능한 한 단단하게 다지고자 했다. 그리고 그것들이 각자 자신에게 알맞은 위치로 ‘돌아가기를’ 바랐다. 그 인식과 판단들, 그 하나하나의 권고와 명령들이 더 이상 흐리멍덩하게 확장되어 쓰이지 않고 그것들 본래의 크기로 축소되었을 때, 과연 천재 기사 우칭위안吳淸源이 말한 것처럼(“바둑돌이 정확한 위치에 놓이면 하나하나가 전부 반짝반짝 빛난다.”) 훨씬 명철해졌을 뿐만 아니라 온화하고 적확한 빛을 띠었다. 그래서 특정한 사람들 혹은 특정한 처지와 순간에 처한 사람들에게 들려줄 만하게 되었다.
다만 이 《부, 명예, 권력에 관한 단순한 사색》은 진정한 소책자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소책자는 기본적으로 논증적이고 설득적이며 뭔가를 바로잡고자 하는 확고한 의도를 갖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해낼 수 없다. 아주 일찍부터(논증은 진정으로 남을 설득하지 못한다고 한 에머슨의 말을 안 것보다 훨씬 일찍) 논증과 설득을 그리 안 믿었고 한참 뒤에야 겨우 ‘설명’ 정도나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명조차 어떤 조건이 전제돼야 한다. 사람들이 언어에 대해 최소한도의 신뢰와 선의를 갖고 있어야 하고, 또 그들이 어떤 전통적인 것들(보르헤스의 용어로), 다시 말해 인간의 사유와 담론이 기나긴 시간 속에서 응결된 ‘규범’(그 경로이기도 한)을 공통적으로 마음속에 새기고 있어야 계속 설명을 해나갈 수 있다. 내 관찰이 틀리지 않다면 그것은 우리가 지금 끊임없이 잃어버리고 있는 것으로서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옛날의 부족 시대로 회귀하고 있다. 우리처럼 부족주의(tribalism)를 가장 혐오하고 해소시키고자 하는 이들조차 불가피하게 한 부족, 폐쇄적이고 계속 축소되는 부족으로 몰아넣어지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토크빌이 오해하기 쉽지만 대단히 빼어난 발언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어떤 일이 진리라고 생각되면 그것을 논증의 위험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다. 그것이 등불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다 꺼질 것 같기 때문이다.”라고 말이다.
“모든 말은 일종의 공동의 경험을 필요로 한다.”라는 보르헤스의 말을, 나는 《셰익스피어의 기억》이라는 그의 기묘한 책에서 발견하고 주목했다. 간단하면서도 심오했다. 사람의 경험은 단지 실제로 겪은 일만을 가리키지는 않을 것이다. 경험의 획득과 소유는 일이 발생할 당시, 그 사람의 심리 상태, 의식 상태 그리고 얼마 후의 회상과 정리에 달려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사람이 계속 망각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당연히 유익한 일이기도 하다. 기억은 어느 정도 고의와 강요의 성격이 있고 자주 고통과 과부하의 느낌을 준다. 그래서 상식조차 공동의 경험, 공동의 기억이 잊힘에 따라 얻었다가 다시 잃어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상식은 늘기만 하고 줄지는 않고, 새로워지기만 하고 유실되지는 않는다는 우리의 낙관적 고정관념과는 정반대로 말이다.
그러면 왜 계속 글을 쓸까? 요즘 나는 인간의 글쓰기와 인간의 지적 성과를 작은 연못으로 상상한다(과거에는 다들 바다라고 말했지만 나는 적절히 연못으로 축소했다. 그래야 뭘 시도할 엄두가 날 것 같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 그리고 한 세대, 한 세대, 계속해서 자신들의 글쓰기의 결과를 그 안에 집어넣기만 했다. 일방적이었고 그 뒤에 어떻게 될지는 따지지 않았다. 그 효과는 우리 개개인과 개별 작품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더 크고 더 장기적인 순환 속에 속한다. 그런데 어쩌면 진실은 정반대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예외 없이 독자이고 우선은 독자였다. 우리는 모두 먼저 보상을 가져갔다. 마음대로 사용해도 되는 그 연못에서 자기가 필요한 것을 계속 가져갔고 그로부터 지금의 자신이 만들어졌다. 따라서 주는 것이 아니라 돌려줘야 하는 것이다.
일종의 의무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