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권력의 상호 제어
겉으로 보면 양한부터 명청에 이르기까지 황권정치와 관료정치는 줄곧 경쟁을 벌였고 재상권도 줄곧 제한되고 약화되었지만 사실 온전히 다 그렇지는 않았다. 진정으로 재상권이 제거된 것은 명청 시대였으며 그 결과가 명나라의 전제 정치와 청나라의 독재 정치였다. 양한과 송원은 더 많이 분업에 신경을 썼다. 한나라는 행정, 군사, 감찰을 나눴고 송나라는 행정, 군사, 재정을 나눴으며 원나라는 다시 되돌아가 행정, 군사, 감찰을 나눴다.
이런 방식은 “분업으로 분권을 실현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수당은 다소 특수했다.
수당이 더 중시한 것은 권력의 상호 제어였지 직무의 분업이 아니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당 태종이 대단히 명확하게 밝힌 바 있다. 그는 중서성이 기초한 법령을 문하성이 반드시 꼼꼼히 심의해야 하는 것은 누구도 절대적으로 정확하지는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만약 개인적인 은원과 체면 때문에 백성의 원한을 살 잘못된 정책결정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망국의 정치라고도 했다.11
그것은 확실히 명철한 인식이었다.
더 훌륭했던 것은 제도적 뒷받침이었다.
먼저 상서성의 정책결정권을 점차 없앴다. 상서성은 역사가 오래되어 인원이 많고 권력이 컸으며 집행 부서이기도 했다. 정책결정에 참여하면 확실히 상대적으로 발언권이 클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당시 육부의 각 수장인 상서들조차 중서성과 문하성의 장관과 직급이 같았으니(모두 정삼품이었다) 상서성의 장, 차관인 상서령과 복야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들이 정사당의 회의에 참석해서 자기 부서의 이익을 바탕으로 발언한다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길 게 뻔했다.
그들을 비켜 서 있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입법과 집법, 정책결정과 행정을 분리시켰다. 부서의 이익이 정책결정 차원에서 구현되지 못하게 중서문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그런데 집행부서의 참여 없이도 중서문하의 정책결정은 현실과 괴리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법령을 기초하는 권력은 중서성에 있었는데 그들이 잘못을 안 저지른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더 발전된 제도가 설계되었다.
새 제도의 뛰어난 점은 중서성과 문하성에 각각 대단히 중요한 중급 관리, 즉 중서사인中書舍人과 급사중給事中을 배치한 것이었다. 중서사인은 중서성에 속했고 정원은 6명이었다. 급사중은 문하성에 속했으며 정원은 4명이었다. 직급은 모두 정오품상이었지만 책임은 아주 막중했다.
중서사인은 왜 중요했을까? 바로 문서를 기초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 현종 개원 2년(714), 재상 요숭姚崇의 개혁 방안에 의하면, 나라에 큰일이 생겼을 때 중서사인은 모두 자유롭게 자신의 제안을 적고 거기에 다른 사람의 이름을 적어야 했다. 이를 가리켜 ‘오화판사五花判事’라고 했다.12
그것은 ‘익명제’였다. 중서사인이 그런 식으로 자기 의견을 밝히면 장관인 중서령과 차관인 중서시랑도 편견 없이 그것을 읽을 수 있었고 심지어 다양한 의견을 취합해 황제에게 보고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소란을 피우거나 직무를 남용하려는 것만 아니면 중서성에서 기초한 문서는 아주 얼토당토않은 경우는 없었다.
하물며 문하성의 검사까지 받아야 했다.
문하성의 검사자는 장관인 시중, 차관인 문하시랑 외에 급사중도 있었다. 급사중에게는 도개塗改와 비박批駁의 권한, 즉 검사한 문서의 글자를 지우거나 고친 뒤 돌려보낼 권한이 있었다. 황제의 칙령도 예외가 아니었다. 원화 연간에 급사중 이번李藩이 당 헌종憲宗의 칙서에 지적하는 말을 적은 적이 있었다. 당시 누가 그에게 말했다.
“자네 의견을 어떻게 성지聖旨에 적을 수 있는가?”13
하지만 이번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다른 종이에 적으면 비박이라 할 수 없지.”
급사중의 비중이 어땠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대담하게도 이번이 칙서에 쓱쓱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번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급사중이었기 때문이다. 급사중의 비중이 컸던 것은 또한 문하성에 심의권과 부서명권을 비롯한 권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심의권은 중서성에 대한 것이었지만 부서명권은 황제에 대한 것이었다. 문하성 관리의 부서명이 없으면 칙령은 법적 효력이 없었다. 그래서 부서명은 황권을 제한하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위징도 그 권한을 사용한 적이 있다.
무덕 9년(626) 12월, 당 태종은 봉덕이의 건의를 받아들여 18세 이하의 남자아이들을 군대에 징집하려 했다. 당시 그가 서명한 칙령이 문하성에 도달했는데 위징이 죽자사자 서명을 거부했다. 결국 당 태종은 어쩔 수 없이 위징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고 마침내 칙령을 거둬들여 오류를 면했다.14
당 태종이 제창한 새 정치는 사실 제도적 뒷받침이 있었다.
사실 급사중에게는 한 가지 신분이 더 주어졌는데 그것은 바로 언관言官 또는 간관諫官이었다. 언관 제도는 진한 때 생겼으며 가장 대표적인 언관은 급사중과 간의대부諫議大夫였고 둘을 합쳐 급간給諫이라 불렀다. 그 후로 당나라 때는 보궐補闕과 습유拾遺가, 송나라 때는 사간司諫과 사언司言이 있었다. 그들은 또 좌, 우로 나뉘었고 두 왕조에서 모두 좌는 문하성에, 우는 중서성에 있었다.
급사중의 직책은 황제의 언행과 조정의 법령에 대해 의견과 비판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곧 간언이었다. 정부와 관리를 감독하는 것은 감찰이라 불렀다. 감찰제도도 진한 때 생겼는데 진한부터 명청까지 중앙의 감찰관은 모두 어사라 불렸으며 감찰기관은 서한 때는 어사부御史府, 동한 이후에는 어사대御史臺, 명청 양대에는 도찰원都察院이라 불렸다. 그래서 감찰관은 대관臺官이라고도 했다.
대관과 간관을 합쳐 대간臺諫이라 불렀고, 또 대원臺垣이라 부르기도 했다. 감찰기관을 헌대憲臺, 간언기관을 간원諫垣이라 부르기도 했기 때문이다. 감찰관과 간언관은 간혹 손을 잡고 일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급사중은 시어사侍御史, 중서사인과 함께 합의법정을 꾸려 억울하거나 날조된 사건을 접수, 처리할 권한이 있었다. 이를 ‘삼사수사三司受事’ 또는 ‘삼사상결三司詳決’이라고 불렀다. 시어사는 어사대의 관리로서 종육품하에 불과해 직급은 더 낮았다. 그러나 재상을 비롯한 모두가 그의 감찰 대상이었다. 심지어 황제조차 비판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제도 설계의 포인트가 어디에 있었는지 쉽사리 알아낼 수 있다. 바로 권력의 상호 제어에 있었다. 이런 제도에서는 누구의 권력도 제한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서성에는 익명제가 있었고 문하성에는 봉박권이 있었고, 간언관에게는 비판권이 있었고, 감찰관에게는 감찰권이 있었다. 황제와 재상도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했다. 게다가 감독과 비판의 효과를 보장하기 위하여 말하는 자는 무죄이고 말하지 않는 자는 거꾸로 직무 태만이라고 규정하였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는 있었다.
문제는 명확했다. 부서들을 감독하는 권력이 그렇게 컸다면 통제 불가능한 세력으로 성장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았다. 왜냐하면 간관(간언)은 비판권만 있고 정책결정권이 없었으며 대관(감찰)도 탄핵권만 있고 처분권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형적인 군자여서 입만 놀리고 손은 쓰지 못했다. 더욱이 ‘대원’의 규모도 한계가 있었다. 어사대는 본래 상서대와 비교가 안 됐고 ‘간원’은 그럴듯한 근무 공간조차 없었다.
하지만 제도의 뛰어난 점도 여기에 있었다. 간언과 감찰의 작용은 저울추와 같았는데,. 저울대는 길어야 했고 저울추는 작아야 했다. 오직 그래야만 권력의 상호 제어가 가능했다.
이것을 가리켜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제어한다”(以小制大)고 한다.
삼성도 마찬가지였다. 삼성 중에서 오직 상서성만 도성都省이 있었다. 그것은 본부 겸 수뇌부였다. 그러나 중서성과 문하성은 도성이 없었으며 직급도 낮았다. 장, 차관이 육부의 상서 및 시랑과 동급이었다. 다시 말해 중서성과 문하성은 사실 부였고 상서성만 성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중서성과 문하성이 재상 기관이고 상서성은 집행 기관에 불과했으니 이것 역시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제어한” 셈이었다.15
하지만 이것은 가장 중요한 점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세 가지였다. 첫째, 삼성은 모두 궁정에서 조정으로 변하여 성이라고 불렸다. 삼성의 관리도 모두 황제의 비서 출신이었다. 상서는 정치 비서였고 중서는 기밀 비서였으며 문하는 생활 비서였다. 하지만 삼성은 궁정에서 독립해 나온 후로 진정한 정부 부서가 되었고 심지어 부분적으로는 황권을 제어하는 힘이 되었다. 이것은 대단한 발전이었다.
둘째, 한나라 시대의 삼공구경은 밑에 기구를 두기는 했지만(공부와 경사) 사람으로 인해 기구가 세워졌다. 즉, 먼저 재상이나 삼공이 있고 나중에 상부와 공부가 생겼다. 만약 재상이 부를 열 권한을 받지 못했으면 그에게는 부가 없었다. 태위라는 직책이 한 무제에 의해 사라진 이후, 태위부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나라의 제도는 삼공구경이라 부를 뿐, ‘삼부구사三府九寺’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수당은 먼저 삼성육부가 있은 뒤, 장관과 차관을 임명했다. 먼저 기구가 있고 나중에 수장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수당과 양한의 근본적인 차이였다. 삼공구경은 개인이었지만 삼성육부는 기구였고 한나라는 인치人治였지만 수당은 관치官治였다. 비록 관료정치는 송나라에 가서야 진정으로 성숙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셋째, 시작 단계로서 수당은 가능한 한 관료정치와 황권정치의 균형을 실현하였다. 한편으로는 재상권을 삼성에 분산하고 중서성과 문하성을 상호 견제하게 하여 황권이 강화되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재상이 개인에서 집단으로 변하여 오히려 더 강력히 황권을 제어하였다. 이 때문에 임금과 신하가 함께 다스리는 이상이 비로소 제기되고 실천될 수 있었으며 양송兩宋까지 이어졌다.
그것은 양한과 다르고 위진남북조와도 다른 새 정치였다. 새 정치는 당연히 새 관료를 필요로 했으므로 새 관리 선발제도도 탄생할 운명이었다.
우리는 그것이 과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