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정사당
수당에 대해 말하려면 먼저 한나라를 돌아봐야 한다.
한나라 중앙정부의 조직제도는 삼공구경三公九卿이었다.
삼공은 서한 때는 승상, 태위太尉, 어사대부御史大夫였고 동한 때는 태위, 사도司徒, 사공司空이었으며 그들은 모두 재상이었다. 구경은 9명 혹은 9명 이상의 부서 책임자로서 정부의 장관에 해당했다. 삼공에게는 부가 있었는데 공부公府는 삼성에 해당했고 구경에게는 사가 있었으니 경사卿寺는 육부에 해당했다. 수당의 정치 개혁은 삼성육부로 삼공구경을 대체하는 것이었다. 그날을 위해 위진남북조는 369년을 준비했다.
이제 4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첫째, 왜 개혁하려 했을까? 둘째, 어떤 점들을 개혁했을까? 셋째, 어떻게 개혁했을까? 넷째, 효과는 어땠을까?
먼저 육부와 구경을 살펴보자.
겉으로 보면 육부와 구경은 차이가 없다. 구경은 정부의 장관이었고 육부의 상서도 그랬다. 그러나 구경의 일은 정무와 사무가 나눠지지 않았다. 국가의 재정과 경제를 주관하는 대사농大司農은 정무직으로서 호부상서에 해당했지만 황제의 출행을 책임지는 태복太僕은 사무직으로서 황가의 사무를 담당했다.
이렇게 명확치 않은 부분은 당연히 개혁이 필요했다.
수당이 택한 방법은, 정무는 전부 육부에, 사무는 전부 사감寺監에 귀속시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태상사太常寺는 제사를, 광록사光祿寺는 연회를, 위위사衛尉寺는 기계를, 종정사宗正寺는 종실宗室을 관할했다. 황제의 식생활과 거주 문제는 전중성殿中省과 내시성內寺省으로 넘겼다. 사무와 정무의 분류, 황가와 국가의 분리로 상서성 밑의 육부는 순수한 국가 기관 겸 직능 부서로 변모해 개혁이 잘 완수되었다.
그 후로 육부제가 계속 이어진 것은 역시 여기에 원인이 있다.
그러면 삼공은 또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
권력이 너무 컸다.
한나라 초기의 제도에 따르면 제국의 행정, 군사, 감찰의 권한은 다 삼공의 수중에 있었다. 삼공은 각자 부를 갖고서 독립적으로 일을 보았다. 그리고 큰일이 생기면 삼공이 회의를 열고 방안을 마련해 황제에게 비준을 받았다. 황제는 5일에 한 번 조회를 열었지만 보고를 듣고서 가부만 표시하고 정책 결정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강성이었던 한 무제 같은 황제들은 당연히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내조와 외조가 생기고 상서사와 상서대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황제를 도와 재상권을 탈취해온 이들이 자기가 또 새로운 재상이 되는 바람에 황제는 부득이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해야 했다. 그 결과, 어떻게 됐을까? 상서 이후에는 중서가 있었고 중서 이후에는 문하가 있었다. 이렇게 끝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삼성 제도가 바로 그런 일괄적인 해결책이었다. 사실, 차례로 궁에서 밖으로 나간 성省들은 전부 정식으로 공부公府를 대신하는 재상 기구로 변하기는 했다. 하지만 삼성을 상부로 인정해주지 않았고, 삼성의 장관들을 확실한 재상으로 인정해주지도 않았다. 또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의 재상권을 분할하려고 했다.
여기에는 당연히 일정한 과정이 있었다. 수나라 때 상서성의 좌, 우복야는 모두 재상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당나라 상서성의 장관은 상서령이었다. 상서령은 당연히 재상이었지만 감히 맡으려는 사람이 없었다. 왜냐하면 즉위 전, 당 태종이 그 직책을 맡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서성에는 두 명의 차관인 좌, 우복야만 있었다. 그러면 좌, 우복야는 재상이었을까? 대답하기 곤란하다. 당시 상황을 봐야 한다.
무슨 상황을 봐야 한다는 것인가?
실제로 정사당政事堂 회의에 참가할 자격이 있었는지 봐야 한다.
정사당은 무엇일까? 중서와 문하, 두 성의 장관이 회의하던 장소이다. 두 성의 장관은 왜 회의를 했을까? 하는 일이 달랐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중서성의 임무는 법령의 기초였고 문하성의 임무는 심의였다. 그래서 중서와 문하, 두 기관은 만나야 했다.
실제로 법령의 기초는 중서성의 몫이었지만 공포를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문하성에 달려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중서성이 기초를 마치고 도장을 찍은 뒤, 황제에게 올려 서명을 받아서 조서를 꾸몄다. 하지만 다른 경우에는 문서를 만들어 먼저 문하성에 보냈고, 문하성의 장관인 시중侍中과 차관인 문하시랑門下侍郞 그리고 그 직속 관리들이 차례로 심의를 해서 문제가 없으면 비로소 황제가 승인해 상서성에 하달했다.
하지만 첫 번째 경우에도 역시 황제의 서명 후 문하성에 보내야 했다. 문하성의 추가 서명이 없으면 조서는 법률적 효력을 갖지 못했다. 중서성이 문하성에 보낸 문서는, 문하성에서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면 원본의 글자를 지우거나 고쳐 쓴 상태로 돌려보냈는데 그것을 ‘도귀塗歸’라고 했고 봉박封駁, 봉환封還, 박환駁還이라고도 했다.9
다시 말해 문하성이 동의하지 않으면 중서성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여기에는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뒤에서 상세히 논하기로 하자. 적어도 당나라인은 이미 정권을 잡든, 법을 만들든 반드시 절차를 지켜야 하지, 절대 성질대로 아무렇게나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효율을 높이기 위해, 그리고 말썽이 생길까 두려워 당나라의 재상들은 융통성 있는 방법을 택했다. 즉, 문서를 보내기 전에 먼저 회의를 가졌다. 두 성의 의견이 일치한 뒤, 문서를 보내면 ‘봉박’이 될 리가 없었다.
그 회의를 열던 곳의 이름이 ‘정사당’이었다.
정사당은 처음에는 문하성에 있다가 나중에 중서성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당 현종 개원 11년(723)에 아예 ‘중서문하’로 이름이 바뀌었다. 중서문하의 회의에는 두 성의 장관과 차관이 다 참석했고 상서성의 책임자는 참석할 때도, 참석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래서 당나라인이 생각하기에는 중서문하만이 진짜 재상이었다. 어떤 명령도 중서문하의 도장이 찍혀야만 합법성이 생겼다.
그렇다면 정사당이 바로 중앙정부였을까?
그렇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왜냐하면 정사당은 무슨 기관이 아니라, 국회의사당 같은 회의 장소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나중에 또 ‘정부政府’(정사당의 부라는 뜻)라 불리기도 했지만 그것은 개원 11년, 정사당을 위한 사무 기구가 설립된 후의 일이었다. 당 현종 이전에는 거기에서 온종일 근무하는 사람은 없었다.
정사당 회의 참석자의 숫자도 정해진 규칙이 없었다. 가장 많을 때는 열 몇 명, 가장 적을 때는 두세 명이었다. 가장 난처했던 이들은 상서성의 차관인 좌, 우복야였다. 그들의 직급은 중서문하의 장관들보다 높았지만(전자는 종이품, 후자는 정삼품이었고 후자는 대종代宗 때에 가서야 정이품으로 올라갔다), “중서문하와 함께 일을 상의할 만한”(同中書門下平章事) 직함을 못 받아 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없었고 역시 재상이 아니었다.
이와 반대로 직급이 상대적으로 낮은데도 어떤 관리는 “중서문하의 삼품과 같은”(同中書門下三品) 직함을 받으면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으니 역시 재상이었다. 양한兩漢은 재상이 삼공이었고 그들 중 승상은 두 명이 될 수 있어도 나머지는 다 한 명씩이었다. 당나라처럼 그렇게 여러 명이 재상이 되고 인원도 늘었다 줄었다 하지 않았다.
정사당, 이 ‘중앙정부’는 총리도 없었고 회의에서는 돌아가며 한 명씩 의장을 맡았다. 그 의장을 ‘집정사필執政事筆’ 혹은 ‘집필執筆’이라 불렀다. 집필은 회의 참석자들이 돌아가며 맡았는데 때로는 열흘을 맡기도 하고 때로는 하루를 맡기도 했다. 확실히 당나라 때는 ‘국무회의’와 ‘국무위원’만 있고 ‘국무총리’는 없었다. 당연히 ‘국무원’이나 ‘재상부’도 없었다.10
삼성육부는 삼공구경과는 크게 달랐다.
하지만 이 두 제도는 공통점도 있었다.
공통점은 재상권을 분할한 데 있었는데 단지 분할의 방법만 달랐다. 양한의 방법은 3권의 분할이었다. 승상은 행정을, 태위는 군사를, 어사대부는 감찰을 관할했다. 당나라의 방법은 상호 견제와 균형이었다. 중서성이 법령의 기초를, 문하성이 심의를, 상서성이 집행을 관할했다. 상서성은 행정권은 있되 정책 결정권은 없었고 중서성은 정책 결정권은 있되 심의권이 없었다. 그리고 문하성은 심의권은 있되 행정권은 없었으며 정책 결정권은 더더욱 없었다.
결과적으로 누구도 권력을 독점하지 못했다.
권력의 견제와 균형의 결과로 가장 손해가 컸던 곳은 상서성이었다. 특히나 당 현종 개원 연간 이후로 좌, 우복야가 더 이상 ““중서문하와 함께 일을 상의할 만한” 직함을 받지 못함으로써 완전히 재상의 반열에서 퇴출되었다. 이와 동시에 정사당의 문서 발송에 중서문하의 도장을 찍게 됨으로써 삼성 체제는 중서문하 체제로 바뀌었다.
이때가 돼서야 정사당은 비로소 국무위원들의 회의장에서 제국 정무의 운영센터로 변모해 어느 정도 ‘국무원’의 색깔을 띠었다. 하지만 당나라 시대에는 끝내 양한의 상국相國이나 대사마 같은 직책은 생기지 않았다. 권신으로 대권을 독점한 이임보李林甫와 양국충楊國忠은 특수한 예일 뿐, 제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정사당은 설사 중앙정부였다고 해도 정부만 있고 수뇌는 없었다.
이것은 훗날 정치체제 개혁을 위한 복선이 되었다. 송나라 때, 삼성이 합쳐진 정사당은 군사를 관할하는 추밀원樞密院, 재정을 관할하는 삼사三司와 나란히 이른바 ‘이부삼사二府三司’ 체제를 이뤘다. 원나라 때는 또 상서와 문하, 두 성을 폐지하고 중서성, 추밀원, 어사대御史臺를 3대 기구로 두었다. 마지막에는 중서성도 주원장에 의해 폐지되어 재상 제도와 함께 영원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수당 정치개혁의 의의는 절대로 경시되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