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당의 정국-수 양제 2

1-2 의혹의 피살사건

수 양제는 강도江都에서 살해당했다.

강도는 지금의 장쑤성江蘇省 양저우시揚州市로 장안에서 천 리 밖에 떨어져 있어 당연히 수나라의 수도는 아니었고 심지어 배도(陪都. 제2의 수도)에도 들지 못했다. 수나라의 배도는 사실 낙양이었다. 낙양과 강도는 다 수 양제가 가장 좋아하던 곳이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명을 내려 낙양을 건축하게 했고 운하가 개통된 뒤에 3번이나 강도에 내려갔으며 피살되기 전까지 1년 반 넘게 강도에서 머물렀다.13

하지만 양제가 강도를 좋아했다고 해서 효과군驍果軍까지 강도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효과군은 황제를 지키는 어림군御林軍으로서 최정예 부대였다. 장비가 훌륭해서 모두 투구를 쓰고 명마를 탔으며 개개인의 힘과 무공도 비범했다. 그런데 그들은 강도에 흥미가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 사나이들은 모두 관중(關中. 장안, 함양 등이 소재한 지금의 산시성陝西省 중부를 뜻함)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강도는 놀러오기나 좋을 뿐, 강도에서 늙어 죽을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 수 양제는 서북쪽으로 돌아갈 계획이 없었다.

돌아가지 않는 것은 꼭 강도를 좋아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은 돌아갈 수가 없었다. 대업大業 12년에 낙양을 떠나 강도에 갔을 때, 수 양제의 사업은 이미 정점에서 밑바닥으로 곤두박질한 상태였다. 고구려 원정 실패로 백성들의 원망이 비등하고 돌궐을 순시하다 하마터면 포로가 될 뻔했는데도 그는 뉘우치지 않고 자기 생각을 고집했다. 그 결과, 귀족부터 백성까지 모두 그를 원수처럼 여겨, 이 괴팍하고 독선적인 황제는 외톨이가 되고 말았다.

피살된 그해, 천하의 대세는 이미 수 양제에게 대단히 불리했다. 만리장성 안팎에서 연일 위기를 알리는 봉화가 치솟았으며 황하의 위아래에서 반란군이 들판을 뒤덮었다. 제국의 수도인 장안도 당공唐公 이연에게 점령당해 따로 황제가 옹립되어 의녕義寧으로 연호를 바꾼 상태였다. 그러니 이때 양제가 서북쪽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설마 사촌형 이연과 손자 양우楊侑를 찾아가 ‘태상황太上皇’ 노릇이라도 해야 했을까?

그는 어쩔 수 없이 강도에 눌러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효과군은 마음이 흔들렸다.

사실 향수병에 시달리던 효과군은 처음에는 모반할 마음까지는 없었다. 그들의 계획은 날짜를 정해 단체로 도주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수 양제는 평소에 그들을 박하게 대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심지어 신하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 부대가 강도에서 잘 지내도록 성 생활 문제까지 해결해주었다. 따라서 양제의 주변에서 은혜도 모르는 배신자만 나오지 않았다면 사태는 전혀 다르게 흘러갔을 것이다.14

그 배신자는 삼형제였다.

삼형제의 이름은 각기 화급化及, 지급智及, 사급士及이었으며 허국공 우문술宇文述의 귀한 자식들이었다. 우문술은 권문세가 출신의 선비족 귀족이자 개국공신으로서 제위 계승 과정에서 양광의 오른팔 역할을 하여 양제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다. 그래서 그 삼형제는 부친이 죽은 뒤에도 출세가도를 달렸다. 본래 온갖 패악을 저지르는 귀공자들이었고 그중 두 명은 살인죄까지 저질렀는데도 그랬다. 우문술이 죽기 전, 눈물을 머금고 애걸하는 바람에 수 양제의 마음이 약해진 탓이었다.15

그것이 집안에 호랑이를 키우는 꼴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 삼형제 중 누가 흉계를 꾸몄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어쨌든 효과군의 사령관 사마덕극司馬德極은 “도망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모반을 하는 것이 살 길입니다.”라는 조언을 들었다. 사실 우문술은 생전에 관중 사람의 이익을 가장 잘 대변하는 인물이라는 평판을 들었으며 사마덕극 등의 효과군 장령들은 본래 그의 부하였다. 그래서 우문 형제와 사마덕극은 바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다른 사람들도 속속 그들 편에 붙었다.16

쿠데타가 빠르게 준비되었다.

하룻밤 사이에 병력이 정비되었고 3월 11일 새벽, 수문장 배건통裴虔通의 호응 아래 사마덕극은 부대를 이끌고 먼 거리를 이동해 곧장 황궁으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교위校尉 영호행달令狐行達이 칼을 뽑아 들고 수 양제의 면전에 들이닥쳤다.
양제가 물었다.

“네가 나를 죽이려 하느냐?”
“신이 어찌 감히 그러겠습니까. 삼가 폐하를 모시고 관중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입니다.”

말을 마치고서 영호행달은 무기를 내려놓고 양제를 부축해 누각 아래로 내려갔다. 양제는 어지러운 중에도 지금 부대를 이끌고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이, 자기가 진왕晋王이었을 때 관저를 지켰던 옛 부하 배건통인 것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어떻게 너까지 모반을 한 게냐?”
“신이 어찌 감히 모반을 하겠습니까. 단지 장병들이 몹시 고향을 그리워해 이럴 따름입니다.”

수 양제는 말했다.

“사실 짐은 막 관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단지 군량을 실은 배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곧 떠날 것이다.”

배건통이 말했다.

“그것은 폐하께서 친히 모두에게 말씀해주셔야 할 듯합니다.”

그래서 배건통은 말 한 필을 끌고 와 수 양제를 군신들 앞에 데려가려 했다. 하지만 양제는 안장이 누추해 체면이 상하는 것이 싫어 극구 말에 오르지 않았다. 배건통이 할 수 없이 안장을 바꿔주고 나서야 그는 허세를 버리고 말에 올라 말고삐를 맡겼다.
그런데 반란군의 수령, 우문화급은 수 양제를 만날 마음이 없었다. 그자는 본래 두 동생과 사마덕극의 성화에 억지로 수령 역할을 맡은 차였다. 쿠데타 과정에서 내내 불안에 떨고 있던 그는 이때 막 꿈에서 깬 듯 명령을 내렸다.

“뭐하려고 그자를 데려온다는 거냐? 어서 처단해라!”

결국 수 양제는 다시 내전으로 돌아갔다.

적을 대하듯 칼을 들고 둘러싼 사마덕극 등에게 몇 마디를 묻고, 또 열두 살 된 사랑하는 아들이 배건통에게 살해되는 것을 빤히 보고 나서 수 양제는 태연하게 말했다.

“천자는 알아서 죽는 방법이 있다. 독주를 가져와라.”

양제는 오래전에 독주를 준비해 자신의 아름다운 여인들에게 맡겨놓았다. 그는 당시 그녀들에게 말했다.

“장래에 혹시 재난이 닥치면 너희가 먼저 마시고 짐이 따라 마시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그 여인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사마덕극 등이 더 시간을 끌기를 거부하여 양제는 부득이하게 영호행달을 시켜 자신을 목 졸라 죽이게 했다.

수나라도 동시에 멸망을 고했다.

망국은 아주 의외의 일은 아니었다. 양제도 아마 자신의 죽음이 수나라의 멸망을 위한 수속 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일찍이 그 날이 올 것을 예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자기 목을 만지며 소蕭 황후에게 “이렇게 좋은 목을 누가 벨까?”라고 묻기까지 했다.17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사건에 의혹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사마건덕 등이 반란을 모의하고 있을 때 정보가 새나갔고 한 궁녀가 그것을 소 황후에게 알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소 황후는 그녀에게 “네가 황상에게 아뢰고 싶으면 아뢰어도 좋다.”라고만 말했다. 그 결과, 양제는 그 궁녀를 죽였다. 나라의 큰일을 한낱 시녀가 참견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래서 나중에 또 누가 위험을 알려왔을 때 소 황후는 이렇게 말했다.

“천하의 일이 벌써 수습할 수 없게 됐는데 구태여 황상에게 고민을 더 보태드릴 필요가 있겠느냐?”

그때부터 양제의 주변에는 기밀을 고하러 오는 사람이 사라졌다.18

소 황후가 왜 그런 태도를 취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단지 수 양제가 강도에서 조정 일을 게을리하고 방탕하게 지낼 때 그 황후가 타이르기는커녕 함께 모든 술자리와 파티에 참석했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또 어떤 불만을 갖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자료도 없다. 바꿔 말해 그녀는 남편이 파멸을 자초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알고 보면 이른바 현모양처는 다 이런 식이다.

양제가 피살될 때도 그녀는 당연히 수수방관했으며 남편을 따라 죽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궁녀들과 함께 침대의 나무로 관을 만들어 함께 35년을 산 남편을 위해 뒷일을 처리했다. 아마도 그녀가 보기에는 그것만이 그녀가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19

교양 있고 예절에 밝은 부인으로서 그녀가 그런 것은 결코 이상하지 않다. 이상한 것은 반란군이 그녀를 털끝도 건드리지 않은 것이다. 보통 황제가 피살되면 황후도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과거에 남조 유소劉邵의 은殷 황후가 자신이 왜 화에 연루되어 무고하게 죽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집행관은 “황후이셨던 것이 죄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러면 소 황후는 어째서 무죄였던 걸까?

소 황후는 본래 무죄일 수 없었다. 그녀는 남방 사람인데다 남량南梁 황실의 후예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고조부인 양 무제 소연蕭衍, 증조부인 소명태자 소통蕭統, 조부인 소찰蕭詧과 부친인 소규蕭巋는 모두 남량의 황제였다. 수 양제가 그토록 강남을 좋아한 것은 이 소 황후와 관계가 있었다.

더욱이 소 황후는 수 양제에게 장식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그가 진왕이었을 때 시집을 와서 평생을 그림자처럼 쫓아다녔고 영향력도 모두가 알 정도로 컸다. 그러므로 수 양제가 강도에 눌러앉는 바람에 효과군의 반란을 촉발시켰다고 한다면 당연히 소 황후에게도 연대 책임이 있었다. 아울러 수 양제가 여색을 즐겨 조정 일을 등한시했다고 해도 그녀는 황궁의 안주인으로서 책임을 져야 했다.

소 황후가 어떻게 무죄일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군주를 시해한 효과군도, 농민 봉기를 일으킨 두건덕竇建德도, 기회를 엿보던 돌궐인과 수나라를 거울로 삼은 당 태종도 모두 소 황후를 예의바르게 대했다. 의심의 여지없이 소 황후는 지혜롭고, 유순하고, 대국을 살피고, 남의 뜻을 잘 살펴서 덕 있는 여성으로 존경을 받을 만했다. 하지만 수 양제 피살 전에 그녀가 위험을 알고도 알리지 않은 것이나 남편의 죽음을 모른 체한 것은 역시 사람들의 의혹을 살 만하다.20

이 미심쩍은 사건은 아마도 영원히 의혹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수 양제 자신은 더더욱 이해가 안 갈 것이다.

隋煬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