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제2제국
그 전의 혼란했던 4백 년과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문명을 창조한 수당도 일련의 음모와 살육으로 시작되었다. 수 문제 양견楊堅은 북주의 황제와 황족을 죽였고 수 양제 양광楊廣과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자신들의 형을 죽였다(당 태종은 동생까지 죽였다). 이밖에 양 문제 양견이 수 문제 양광에게 죽음을 당했는지는 아직까지 논란이 있지만 양광이 측근과 근위병에게 살해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른바 역사라는 것은 온통 피로 얼룩져 있다.
그런데 그 피에 물든 대지에서 찬란하기 그지없는 문명의 꽃이 피었다. 당나라가 중국의 전성기를 대표하며, 그래서 중국 민족을 상징하는 기호이자 대명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예를 들어 해외 화교의 거주지는 ‘당인가唐人街’라고 불리곤 한다. 중국적인 특색의 패션도 흔히 ‘당장唐裝’이라 불리곤 한다. 그 디자인이 당나라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수나라는 잊히는 경우가 많다.
잊히지 않더라도 그것은 오직 수 양제 양광의 ‘혼폭昏暴’뿐이다.
‘혼폭’은 양광이 죽은 뒤 당나라인이 내린 평가이다. 그 전에 양광은 사실 명황제明皇帝라는 시호도 있었고 수 세조世祖라는 묘호도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두 가지 그럴듯한 칭호는, 대신이 관리하던 수나라 낙양의 정권에서 지어준 것이어서 새로 세워진 당나라에 의해 금세 취소되었고 시호가 ‘양煬’으로 바뀌었다.
그때부터 그는 수 양제라고 불렸다.1
그것은 더 이상 나쁠 수 없는 악평이었다. 시법諡法에 따르면 ‘양’에는 3가지 의미가 있다. 여색을 탐하고 예법을 따르지 않는 것과 예제禮制를 깨뜨리고 백성을 배신하는 것 그리고 천명을 거스르고 백성을 학대하는 것이다. 앞의 두 가지가 바로 ‘혼昏’이고 뒤의 한 가지는 ‘폭暴’이다. 후대의 서술과 설명, 보편적인 관점에 따르면 양광은 아마도 그것들에 다 해당되어 ‘혼폭’이라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2
당 고조 이연李淵 등은 왜 그렇게 양광을 평가했을까? 왕조 교체의 합리성을 증명하기 위해 새 왕조가 전 왕조나 그 말기를 혹평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것은 단명한 왕조나 망국의 군주가 피하기 어려운 숙명이었다. 하지만 다른 말기의 군주들은 그래도 시호만은 대충 봐줄 만한 것을 얻었다. 양광만큼 나쁜 평가를 받은 군주는 하나라의 걸왕이나 상나라의 주왕뿐이었다. 그리고 학살을 일삼은 걸왕과 의를 손상시킨 주왕은 그야말로 용서받기 힘든 거악을 저지른 이들이었다.3
양광에게 더 억울했던 것은 ‘양’이 본래는 그가 진陳나라의 마지막 군주 진숙보陳叔寶에게 내린 시호였다는 사실이다. 그 시호는 그런 음탕하고 부패한 군주에게나 어울렸다. 진숙보는 재위 내내 흐리멍덩하게 세월을 흘려보냈을 뿐만 아니라 포로가 될 때도 미녀 두 명을 품에 안고 있었다.
그 시호를 진숙보에게 내린 양광은 그런 역사적 평가를 할 만한 자격이 있었다. 그는 수나라의 두 번째 황제였을 뿐만 아니라, 과거에 진나라 군대를 격파한 대원수로서 진숙보의 음탕함과 무능함을 직접 목도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자신의 말로가 더 비참할 줄은, 그리고 진숙보에게 내린 시호가 자기에게도 부여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당나라인들은 심지어 그 두 황제가 저승에서 만나 부적절하게도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 진숙보가 재위 당시 궁중 생활의 화려함을 소재로 쓴 시. 후대에 망국을 상징하는 시로 낙인찍혔다.)을 다시 논할지도 모른다고까지 말했다.4
이것은 실로 엄청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안타깝게도 역사는 언제나 승자에 의해 써지므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양광을 수 양제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정말로 그렇게 나쁜 군주였을까?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다. 이에 대해 어느 사학자가 적절히 지적한 말이 있다. 그는, “진시황이 한 일을 수 양제도 대부분 했지만 분서갱유는 하지 않았다. 또 수 양제가 한 일을 당 태종도 대부분 했지만 운하를 건설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왜 진시황과 당 태종은 천고의 황제로 추앙받는 반면, 수 양제는 후대에 악명이 자자한 것일까?”라고 물었다.5
이것은 매우 불공평하다.
수나라의 의의까지 이에 연루되어 과소평가된다면 더 불공평하다.
수나라의 역사는 매우 짧기는 했다. 겨우 38년간 유지되었으니 중국 문명사 3700년과 중국 제국사 2100여 년과 비교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단명한 왕조가 완수한 일의 규모는 다른 왕조의 몇 배에 상당하고 그들이 남긴 물질적, 문화적, 정치적 유산, 예를 들어 운하, 과거제, 삼성육부제三省六部制 같은 것은 명나라와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계속 수용되었다. 이런 왕조를 어떻게 과소평가할 수 있겠는가?6
더욱이 한나라가 진秦나라 정치의 계승자에 불과했던 것처럼 수나라도 당나라 문명의 역사적 창건자였다. 앞에 진나라가 없었다면 뒤에 한나라도 없었고 역시 앞에 수나라가 없었다면 뒤에 당나라도 없었다. 사실상 당 태종은 수 양제의 뒤를 쫓아갔을 뿐이다. 그는 수나라를 참고했을 뿐만 아니라 스승으로 삼았고 더구나 그것은 단지 반면교사의 차원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7
수나라는 시간적으로는 짧았지만 내용은 풍부했다. 수나라는 단명했지만 불후의 업적을 남겼다. 서진이야말로 잠깐 나타났다가 덧없이 사라진 왕조이다. 진정으로 의미 있는 왕조는 동진이었다. 단지 천하의 절반을 차지하는 데 그치고 통일을 못 이룬 것이 아쉬울 뿐이다.8
수나라와 비교될 만한 왕조는 진나라다.
수나라와 진나라는 난형난제이다. 둘 다 통일을 이루었고 또 2대 황제에서 망했으며 앞에는 기나긴 분열과 전란의 시대(5백 년의 춘추전국시대와 4백 년의 한나라 말기 및 위진남북조 시대)가, 뒤에는 강성한 대제국(4백여 년의 한나라와 3백 년에 가까운 당나라)이 있었다. 그리고 뒤의 두 통일 왕조는 모두 중간에 단절을 겪었다. 한나라 때는 왕망의 신新나라가 있었고 당나라 때는 측천무후의 주周나라가 있었다. 실로 놀랄 만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아마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당연히 우연이 아니었다. 사실 수당과 진한이 서로 그런 것처럼 명 청과 송원도 대단히 흡사하다. 모두 앞은 한족 왕조이고 뒤는 이민족 정권이며 지속된 기간도 비슷한 점이 있다. 물론 송나라는 3백 년이 조금 넘고 원나라는 백 년 전후이지만 명나라는 276년, 청나라는 267년이다. 명나라와 청나라의 기간은 거의 같으며 둘 다 당나라보다 조금 짧다.9
하지만 진·한·수·당과 송·원·명·청, 이 양자는 차이가 확실하다.
그래서 주전충朱全忠이 당나라를 멸한 시점을 경계로 하여 중국 제국의 역사를 상하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위 단계는 1128년이고 아래 단계는 1004년인데 두 단계의 기간은 서로 비슷하며 상하 2천 년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2천 년은 두 가지 추세로 표현된다. 대체적으로 위 단계에서는 먼저 제도의 창립이 진행된 뒤(진과 수) 세계제국으로 변모했으며(한과 당), 아래 단계에서는 제도의 개혁이 진행된 뒤(송과 명) 부패가 있고 나서 이민족 정권(원과 청)의 수혈과 대체가 이어졌다. 다시 말해 위 단계는 오르막길이었고 아래 단계는 내리막길이었으며 전성기는 당송이었다.
당송은 정상인 동시에 분수령이었다.
더 살펴보면 앞은 개방적이고 뒤는 보수적이었으며 또 앞은 상승하고 뒤는 하강했다. 동시에 앞은 혼란하고 뒤는 안정적이어서 원나라와 명나라는 심지어 중간에 아무 공백 없이 이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송원과 명청은 차이가 매우 확실했다. 송원은 진한 이후의 재상제도와 당송 이후의 분권제도를 계승했지만 명청은 “정부만 있고 재상은 없이” 모든 권력을 황제에게 집중시켰다. 황제가 헤게모니를 독점하고 독단적으로 정책을 결정함으로써 국가의 원수와 정부의 수뇌를 겸하였다. 그 결과, 명나라는 전제정치, 청나라는 독재정치가 되어 끝내 붕괴로 치달았다.
따라서 신해혁명도 우연이 아니었다.
확실히 송원과 명청은 같이 취급할 수 없다. 진한과 수당은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상하 2천 년은 또 4부분으로 나뉜다. 제1제국인 진한은 441년이고 제2제국인 수당은 326년이며 제3제국인 송원은 416년, 제4제국인 명청은 543년이다. 그밖의 369년은 분류가 불가능해 별도로 취급할 수밖에 없다.10
그 369년은 바로 위진남북조다.
위진남북조는 대단히 특수한 역사 시기로서 한나라를 제외한 어떤 왕조보다 오래 지속되었고 통일된 시간은 진나라보다 짧았으며 정치제도와 문화적 성격은 진한과도 수당과도 달랐다. 그리고 사회형태와 역사의식은 춘추전국과 가까웠다. 다시 말해 위진남북조는 춘추전국처럼 새로운 제도와 새로운 시대를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11
수나라는 진나라처럼 단명할 만했다. 왜냐하면 두 나라는 다 일종의 탐색자이자 첨병이었기 때문이다. 맨 앞의 파도는 모래사장 위에서 사멸할 수밖에 없다. 수 양제는 제단 위에 바쳐진 희생물에 불과했다. 그가 진나라 이세 황제나 진숙보보다는 훨씬 나은 인물이었을지라도 말이다.
실제로 수나라는 남북조의 종결자이면서 당나라 문명의 선구자로서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사명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모순과 분열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문제와 양제는 전혀 다른 황제 같고 양제의 전기와 후기도 전혀 딴 사람 같다. 이 때문에 사학자와 대중도 후기만 살핀 사람은 양제를 혹독히 비판하고, 전기만 살핀 사람은 양제의 명예회복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양광이 양황제로 불려야 하는지, 명황제로 불려야 하는지는 사실 우리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 중요한 것은 제2제국에 대한 그의 성찰을 통해 더 명확하게 우리의 운명과 선택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양제의 죽음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