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물은 민남閩南 지역에서 출토되었는데, 출토 당시 호의 주둥이와 뚜껑의 가장자리가 모두 손상되었다. 마을사람들이 무지하여 이를 그라인더로 갈았는데, 매우 안타깝다. 차호의 태토는 견고하고 치밀한데, 오색사니五色砂泥를 섞어 만든 것으로, 빛깔이 다채롭다. 호의 바닥은 평평한데 가권족假圈足[1]가운데 네 개의 안문犴門[2]을 남겨 빈 공간을 두어 답답한 느낌을 없애고 겸허한 분위를 자아낸다. 차호의 꼭지는 다리 모양으로, 꼭지 위쪽에 긴 직사각형 구멍이 뚫려 있어 차호의 바닥과 멀리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기물의 형태는 묵직하고 중후하며, 가운데 허리띠를 묶은 문양이 있다. 차호의 꼭지와 다리 쪽에도 네모난 선으로 두른 장식이 있다. 차호의 바닥에는 다음과 같은 명문이 새겨져 있다:
차호 가득 맑은 차, 만 권의 장서, 밝은 창과 정갈한 서안書案, 그 즐거움 가득하네.一壺淸茗,萬卷藏書,明窗淨几,其樂蘧蘧
여기에는 염재廉齋라는 서명이 함께 쓰여져 있는데 필치는 우아하고 골격과 필획이 고르게 갖춰져 서권기가 넘쳐 흐른다. 《양선사호도고陽羨砂壺圖攷》에는 풍우루風雨樓가 소장한 “조렴양 속대명원방호曹廉讓束腰鳴遠方壺”의 탁본이 실려 있는데, 이 책의 저자 장홍張虹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등추매가 진명원의 방호 탁본을 보내주면서 말하였다. 이 차호에 새겨진 글은 조렴양의 필체입니다. 일찌기 진명원이 해녕에 머물 때 조렴양의 집에서 묵은 듯합니다. 鄧秋枚以鳴遠方壺拓本寄贈, 並云此壺題識乃曹廉讓手筆, 蓋鳴遠客海寧時, 嘗館於廉讓.。
조렴양은 별호가 염재이며, 해녕 사람이다. 이 차호의 형태와 명문의 서법은 빈홍의 탁본과 매우 유사하다.
[1] 권족圈足은 둥근 굽다리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가권족은 둥근 굽다리처럼 보이나 권족이 기물의 바닥이 오목하게 들어갔지만, 가권족은 바닥이 들어가지 않고 평평하다.
[2] 안문은 서차경徐次京 능화용수호菱花龍首壺를 참조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