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의 멋진 말 9
유비의 멋진 말 아홉 번째는 감정의 질서에 대한 것이다. 감정의 질서가 있는 사람은 일에도 질서가 있어 무조건 시류에 따르거나 일방적인 구호에 매몰되지 않는다. 정치가라면 대세에 따르면서도 반드시 감정의 질서를 가져야 할 것이다.
“짐이 황권을 저버린 것이지, 황권이 짐을 저버린 것이 아니거늘, 어찌 그 가솔들에게 죄를 묻겠소?” (제85회)
황권은 원래 익주목 유장의 주부(主簿, 비서)로 대표적인 반유비파였다. 유장이 유비와의 연합을 모색할 때 황권은 왕루 등과 함께 극구 반대하였다. 유비가 성도를 점령하자 다른 관리들은 어쩔 수 없다며 달라진 세상에 따랐지만 황권은 유파와 함께 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유비의 수하들이 이들을 죽이려 하자 유비가 말리고 직접 집을 찾아가 함께 일해줄 것을 청하였다. 황권은 그때에야 나왔다.
황권은 상당히 뛰어난 인물이었던 듯하다. 유비가 221년 이릉전을 일으켰을 때 그를 우장군에 임명하였고, 유비가 222년 삼협을 나와 효정에서 싸울 때는 그를 진북장군으로 임명하여 조조의 협공을 염려하여 좀 북쪽에 있는 요로를 막게 하였다. 그런데 유비의 75만 병사가 동오의 젊은 장수 육손에게 처참하게 깨지면서, 유비는 급히 후퇴하였고, 황권이 철수하기 전에 이미 양자강은 동오 병사들에게 장악되었다. 돌아가자니 돌아갈 수 없고, 항복하자니 적에 항복할 수 없고, 황권은 어쩔 수 없이 위나라에 항복하였다.
유비는 양자강 삼협의 서쪽 끝에 있는 구당협의 백제성(영안궁)에 있었는데, 패배의 보고가 속속 들어왔다.
유비가 탄식하며 말했다. “짐이 일찌감치 승상(제갈량)의 말을 들었더라면 오늘 패배까지 이르지 않았을 것을! 이제 무슨 면목으로 다시 성도로 돌아가 신하들을 본단 말인가!” 그리하여 명령을 내려 백제성에 주둔하게 하고, 역을 영안궁이라 개명하였다. 전령이 풍습, 장남, 부동, 정기, 사마가 등이 모두 왕을 따라 나선 전쟁에서 죽었다고 보고하자 유비는 지극히 슬퍼하였다. 또 근신이 상주하기를 “황권이 강북의 병사를 이끌고 위나라에 투항했습니다. 폐하께서 그 가솔들을 유관 기관에 넘겨 죄를 물으셔야 합니다.” 유비가 말했다. “황권이 강북에 있으면서 동오의 병사들에 고립되어 돌아올래야 길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위나라에 항복했소. 짐이 황권을 저버린 것이지, 황권이 짐을 저버린 것이 아니거늘, 어찌 그 가솔들에게 죄를 묻겠소?” 황권의 가솔들에게 여전히 녹미를 지급하여 보살피도록 했다. (先主歎曰: “朕早聽丞相之言, 不致今日之敗! 今有何面目復回成都見群臣乎!” 遂傳旨就白帝城住紮, 將館驛改爲永安宮. 人報馮習、張南、傅彤、程畿、沙摩柯皆歿於王事, 先主傷感不已. 又近臣奏稱: “黃權引江北之兵, 降魏去了. 陛下可將彼家屬送有司問罪.” 先主曰: “黃權被吳兵隔斷在江北岸, 欲歸無路, 不得己降魏: 是朕負權, 非權負朕也. 何必罪其家屬?” 仍給祿米以養之.)
전쟁 중이라 미비한 일이 많고, 감정대로 처리하기도 쉽건만, 유비는 그러하지 않았다. 비록 황권이 항복했다고 해도 사안을 따져 그가 어쩔 수 없음을 알아 벌하지 않고, 그 가솔들에게 녹미를 지급하게 하였다.
“짐이 황권을 저버린 것이지, 황권이 짐을 저버린 것이 아니거늘, 어찌 그 가솔들에게 죄를 묻겠소?” (是朕負權, 非權負朕也. 何必罪其家屬?)
이런 사람이라면 모시고 일할 만하지 않겠는가? 과연 황권이 항복하여 조비 앞에 나아가자 조비가 물었다. “그대가 지금 짐에게 항복했으니 진평과 한신을 따르려는 것이오?”(卿今降朕, 欲追慕於陳、韓耶?) 진평과 한신이 항우에게 있다가 유방에게 투항한 일을 가지고 마음을 떠보는 것이다. 이에 황권이 대답했다. “소신이 촉나라 황제의 은혜를 각별히 입어, 소신이 강북에서 군사를 지휘하였으나 육손에게 차단되었습니다. 소신이 촉으로 갈 길이 없는 상황에서 오나라에 항복할 수 없어 폐하께 항복하였습니다. 패장으로서 죽음을 면하면 다행인데 어찌 감히 고인을 추모하겠습니까?”(臣受蜀帝之恩殊遇甚厚, 令臣督諸軍於江北, 被陸遜絶斷. 臣歸蜀無路, 降吳不可, 故來投陛下. 敗軍之將, 免死爲幸, 安敢追慕於古人耶?)
또 촉에서 온 세작이 황권의 가솔들이 모두 유비에게 주륙을 당했다는 말이 떠돌았다. 그러나 황권은 “소신과 유비는 성심으로 서로를 믿사옵니다. 촉나라 황제가 소신의 본심을 알기에 분명 소신의 집안 사람들을 죽이지 않을 것입니다.”(臣與蜀主, 推誠相信, 知臣本心, 必不肯殺臣之家小也.)
그러니까 유비는 비록 황권이 항복했지만 그를 믿었고, 황권 역시 유비를 믿었던 것이다. 이는 손권이 촉에 사신으로 가는 제갈근을 보내면서 그를 믿고, 조조가 번성 전투에 방덕을 보내면서 그를 믿는 것과 같다. 누가 삼국지를 배신과 모략의 책이라 하는가. 난세라 하지만 마음은 마음을 비추고, 믿음과 충성은 별처럼 빛났다. 감정의 질서가 있는 자라면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알았다. 유비 또한 그런 사람이었다.
(이릉전 때 전황을 그린 삼협의 지도를 보면,
오른쪽 상단에 있는 마안산 북쪽에서
황권의 군대가 고립되어 있슴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