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종교문제 – 도교의 흥기
불교는 중국에서 처음에는 도교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중국에는 본래 종교가 없었고 신앙도 없었다. 하나라와 하나라 이전 시대에는 아마 샤머니즘만이 있었을 것이다. 상나라 시대에 상제가 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조상숭배였지 종교적 신앙은 아니었다. 상나라의 상제는 신도 조물주도 아니고 죽은 제왕이었다. 이에 대응하는 것은 ‘하제下帝’, 즉 현재의 상나라 왕이었다.
하제와 상제는 모두 인간이었다.
달리 말하면 하제는 인간, 상제는 귀신 또는 죽은 인간이었다.그 후에 주나라인은 조상을 숭배하는 한편, 천명을 믿었다. 하늘의 주요 역할은 천자에게 천하를 관리하는 권한을 주고 자격 미달의 통치자에게 혁명을 가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신이기도 하고 자연이기도 한 존재는 사실 인간이어서 그 후의 기나긴 세월 동안 구체적으로 하느님(老天爺)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것은 마찬가지로 종교도 신앙도 아니었다.
사실 중국에서는 자발적으로 종교가 생기는 것이 불가능했다(그 이유는 이중톈중국사 2권⋅국가, 이중톈중국사 3권⋅창시자, 이중톈중국사 9권⋅두 한나라와 두 로마를 참고). 우리에게 자발적으로 자본주의가 생기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처럼 말이다. 다시 말해 중국에서 종교는 외부에서 전래된 타 민족의 문화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처음 중국에 들어왔을 때 불교는 이미 중국에 존재하던 어떤 것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1
그러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넓은 의미의 원시 도교였다.
사실 문화가 본래 ‘문명을 통한 교화’라는 뜻인 것처럼 종교도 중국어에서는 “어떤 교화를 종봉宗奉, 즉 우러러 받든다”는 뜻이다. 그래서 무릇 “도로 교화하는” 이론과 실천은 모두 넓은 의미의 도교였다. 선진先秦 시대의 제자백가와 훗날의 불교와 도교는 모두 이렇게 이해되었다.2
그것은 당연히 엄격한 의미의 종교religion가 아니었다.
원시 도교도 종교가 아니었다. 그것은 절반은 사상, 즉 황로도黃老道였고 절반은 법술法術, 즉 방선도方仙道였다. 도교는 황로와 방선의 혼합이었다.
먼저 황로도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황로도는 황로지술黃老之術이라고도 불렸는데 간단히 말해 황제黃帝와 노자의 기치를 든 사상과 방법이었다. 황제와 노자를 연계시킨 때는 전국시대였고 그것이 크게 유행한 때는 양한 시대였다. 당시 황로도는 내용이 복잡하고 방대하여 대동大同의 사회사상과 무위이치無爲而治의 정치이념에 주역철학, 신선사상, 음양오행의 관념이 다 합쳐진 잡탕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사조였다.
사조로서 황로지술이 한나라 초에 숭상을 받은 것은 당시의 통치자들이 청정무위와 여민휴식與民休息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랬어도 그들의 황로에 대한 태도는 역시 신봉이었을 뿐, 신앙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 신봉조차 유가만 받들어지게 된 후로 점차 엷어졌다. 황로지술 속의 주역철학과 음양오행은 유가에 의해 흡수되어서 남은 것은 신선사상뿐이었다.
신선사상은 중국 고유의 것으로 다른 민족에는 신神만 있지 선仙은 없었다. 신과 선의 구별은, 신은 신이고 선은 인간이라는 데 있거나 신은 죽은 사람이고 선은 산 사람이라는 데 있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생전에 나라와 민족에 큰 공을 세우면 죽은 뒤에 로마의 카이사르처럼 신으로 봉해졌다. 그리고 수련이나 약 복용을 통해 불로장생의 육체를 얻어 비상하면 그 사람은 신선이었다. 당나라의 한상자韓湘子와 여동빈呂洞賓이 그랬다.확실히 신을 봉하는 것은 국가와 민족의 일이어서 개인은 신선이 될 수밖에 없었다.
신선이 되는 것은 도교의 핵심이었다.
신선이 되는 꿈을 이루는 방식이 바로 방술이었고 방술을 아는 사람은 곧 방사方士였다. 방사는 전국시대 제나라와 연나라 일대의 연해 지역에서 발생했는데 그들은 일반인이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공통적인 특징이었다. 예를 들어 진시황 때의 서복徐福은 선약仙藥을 구할 수 있었고 한 무제 때의 난대欒大는 귀신과 통했으며 조조 때의 좌자左慈는 신출귀몰했다. 요컨대 그들은 기이한 비방이나 비술을 갖고 있어서 천하를 주유하며 군주나 제후와 사귈 수 있었다.
그들 중에 누가 사기꾼이고 누가 기인이었는지 말하기는 어렵지만, 방술이 단순하게 샤머니즘과 같지는 않다는 것은 긍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신의라 불린 화타華佗도 방사였다. 실제로 고대 중국에서 샤머니즘과 의술은 흔히 불가분의 관계였으며 이른바 방술은 신비화되고 샤머니즘화된 과학기술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방중술房中術을 예로 들어보겠다.
방중술은 사실 성과학이자 성 기술이었다. 도교에서는 성생활이 반드시 필요하고 그 방법을 중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섹스의 의의는 생육이나 쾌락이 아니라 양생養生에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섹스는 합기合氣, 즉 남자의 양기와 여자의 음기를 조화시켜 양기로 음기를 보완하고 음기로 양기를 보완하는 이중의 목적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살을 맞대고 체액을 교환하는 방식으로만 실현되므로 성생활은 필수불가결했다. 다만 시의에 안 맞거나 절제를 모르거나 요령이 없으면 정반대의 결과가 생길 수도 있었다. 그래서 금기가 있어야 하고 기술도 있어야 했다. 삽입의 깊이, 피스톤운동의 속도, 오르가즘의 시점 등이 다 고려 대상이 되었다. 결국 방중술을 잘 알면 수명을 연장하고 젊어져서 심지어 신선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방술은 아마 많은 사람들이 즐겨 실천했을 것이다. 비록 신선이 될 수 없어도 신선이 되고 싶고, 신선이 되려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면 안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신선이 되는 것과 방술의 관계는 대체로 이랬다.
이것이 바로 방선도였다.
방선도의 내용에는 당연히 방중술만 있지 않았다. 적어도 복식服食과 행기行氣가 더 있었다. 행기는 우선 한의학에서 창시한 일종의 호흡 방법으로 그 목적은 탁한 기를 뱉어내고 맑은 기를 들이마시는 것이었다. 즉, 오래된 것을 내보내고(吐)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納) 것이어서 간단히 토납吐納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토납을 할 때 곁들이는 체조는 도인導引이라 했으며 여기에 안마까지 곁들여서 통틀어 행기라고 불렀다.
복식도 복약服藥과 복단服丹, 두 가지를 포함했다. 약은 영지버섯 같은 초목이었고 단은 단사丹砂 위주의 광석이었다. 약은 몸을 튼튼하게 해주지만 단은 신선이 되게 해주므로 따로 선단仙丹이라 불렸다. 가장 좋은 금단은 먹은 뒤 사흘이면 신선이 됐는데 그 이름은 구전금단九轉金丹이었다.
‘구전’은 반복적으로 가열하고 정련하는 것을 뜻하며 단은 세발솥인 노정爐鼎에서 만들었다. 단사 등의 원료를 정련해 만든 것은 이름이 외단外丹으로, 주요 화학성분이 납과 수은이어서 복용하면 신선이 되기는커녕 중독이 되곤 했다. 그래서 도교에서는 또 인체를 노정으로 간주하고 자신의 정精, 기氣, 신神을 재료와 화롯불로 삼아 정련해낸 결과를 내단內丹이라고 했다. 훗날 남송 전진교全眞敎의 남북 두 종파가 모두 외단을 배척하고 내단을 주장했다.
복식, 행기, 방중술은 진한秦漢 시대 방술의 3대 추세였다. 그밖에도 방술은 천문(점성술 포함), 역술, 점복, 관상, 풍수, 연금술 등을 다 포괄했다. 도교는 그 잡동사니들을 죄다 받아들였고 적잖은 것들을 황제의 발명이나 노자, 장자의 주장으로 탈바꿈시켰다.
방선도와 황로도는 이렇게 하나로 합쳐졌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종교가 아니었다. 실제로 방선이든 황로든 가장 중시한 것은 신선이 되는 것과 양생이었다. 이 두 가지는 단지 개인과 관련이 있는데 종교는 사회에서 조직적 행위가 있다. 만약 황로도와 방선도가 사회 대중 및 국가 사무와 전혀 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면 영원히 방술에 머물렀을 것이다.
그래서 재초齋醮와 부록符籙이 발명되었다.
재초는 일종의 제사로서 제단을 차리고, 공양을 하고, 향을 사르고, 부적을 그리고, 주문을 외우는 등의 절차가 있었으며 목적은 복을 빌고 화를 없애는 것이었다. 이것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나라와 백성을 이롭게 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재초는 위로는 천자, 가운데는 각급 관원들, 아래로는 백성을 수혜자로 삼아 그들을 완전히 동등하게 대했기 때문이다.
대중적 토대를 가진 도교에서 재초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했다.부록은 붉은 먹으로 종이에 적은, 글자와 유사한 도형이었다. 불에 태우면 신과 통하고, 귀신을 쫓고, 비를 부르고,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믿어졌다. 이것은 신선이 되는 것보다 더 사회의 수요를 만족시켰다. 실제로 최초의 도교 조직이었던 천사도天師道와 태평도太平道(이중톈중국사 9권⋅두 한나라와 두 로마를 참고)는 이 부록의 신비한 작용에 힘입어 많은 신도를 끌어들여 크게 발전하였다.
더구나 부록은 훗날 일종의 제도가 되었다. 천사도는 규정하길, 어떤 사람이 일정한 의식에서 정식으로 부록을 받아 몸에 지니면 그 조직에 가입해 교단의 일원이 된 것을 뜻한다고 했다. 우리는 종교의 지표 중 하나가 교단 조직이며 역할 중 하나는 아이덴티티의 승인(이중톈중국사 2권⋅국가를 참고)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부록 제도를 가짐으로써 방선도는 종교와 겨우 한 발짝 거리로 가까워졌다.
하지만 그 한 발짝은 역시 어마어마하게 멀었을 것이다. 어쨌든 종교는 중국에서 자발적으로 생기는 것이 불가능했고 황로도와 방선도도 필연적으로 종교로 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외부 세력의 자극과 타자의 시범이 없었다면 천사도든 태평도든 생겨나기는 했어도 그저 샤머니즘에 의지해 유지되는 민간조직에 머물 수밖에 없었고 잘못했으면 사교邪敎가 되었을 것이다.다행히도, 불교가 전래되었다.
4-2 불교의 전래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구체적인 시기에 대해서는 역대로 다양한 견해가 있었다. 학계에서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서한 애제哀帝의 원수元壽 원년(BC 2년)이다. 그해에 어느 박사博士의 제자가 대월씨大月氏에서 온 사신이 부도경浮屠經을 구술하는 것을 들었다. 부도는 사실 붓다Buddha이며 대월씨의 사신이 구술한 것은 석가모니의 삶에 관한 이야기로서 훗날 알려진 전설과 차이가 없었다.3
이것이 비교적 믿을 만한 가장 이른 전래 시기이다.
그러면 가장 늦은 시기는 언제일까?
동한 명제明帝 시기이다. 명제가 불법을 구하러 인도에 사신을 파견했다는 것은 전설에 불과해도 그의 동생, 초왕楚王 유영劉英이 붓다를 숭상하고 왕궁에서 재계하며 예불을 올린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당시 불교의 영향력이 이미 작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도교 최초의 경전인 태평경太平經이 탄생한 것은 적어도 반세기 뒤였다.4
천사도와 태평도가 종교조직이 된 것은 더 나중이었다.
따라서 도교의 창시자가 불교에서 힌트와 영감을 얻고 심지어 그것을 본받는 것은 전적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현존하는 자료를 보면 도교의 창립이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반대로 불교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는 증거가 있을까? 미안하지만 역시 없다.5
사실 불교의 영향을 빼놓고는 천사도와 태평도가 어떻게 약속이나 한 듯 뜬금없이 생겨났는지 설명할 길이 없다. 아마도 그들은 종교가 무엇인지 몰랐을 것이며 자신들이 종교를 만들고 있는지도 의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남이 어떤 것을 갖고 있으므로 우리도 가져야 하고,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그래서 도교는 발전 과정에서 계속 불교를 본받았다. 불교에 사원이 있어 도교에 도관道觀이 생겼고 불교에 승려가 있어 도교에 도사가 생겼으며 불교에 가사가 있어 도교에 도포가 생겼다. 그리고 불교에 석가모니가 있어 도교는 부득이 노자를 떠받들었다. 사실 노자는 과연 그런 사람이 존재했느냐는 것조차 확실치 않으며 종교와는 더더욱 무관했다. 하지만 그래야만 도교는 더 그럴듯해 보일 수 있었다.6
의심의 여지없이 그것은 그닥 이상한 일이 아니었고 창피한 일도 아니었다. 문화는 본래 학습할 필요가 있고 심지어 베끼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상한 일은 도교가 불교를 그대로 따라했는데도 불구하고 동한 시대에는 후자가 전자와 유사한 것으로 간주된 것이었다. 물론 처음 시작된 도교, 즉 도교 전의 도교인 원시 도교로 간주되었다.
그런 불교는 부도도浮屠道라 불렸다.
부도도는 바로 외국의 황로도였으며 그것은 동한 시대 상류사회의 보편적인 견해였다. 그래서 초왕 유영과 훗날의 한 환제桓帝는 다 황로와 부도를 함께 떠받들었다. 그들의 궁 안에는 황로의 사당과 부도의 사당이 다 있었다.7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아직 종교를 접한 적이 없는 중국인은 기존의 지식에 따라 그 수입품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승려를 도인道人(도교의 성직자는 도사로 불렸음) 등으로 불렀다. 더구나 불교가 주장하는 사대개공四大皆空(세상의 모든 현상이 공허하다는 뜻)과 상락아정常樂我淨, 청정무위와 매우 흡사했다.8
하지만 차이도 매우 컸다.
도교의 목적은 신선이 되는 것이었는데 불교의 목적은 부처가 되는 것이었다. 신선과 부처는 다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그래서 이 둘을 뜻하는 한자(仙, 佛)는 다 사람 인(人) 변을 갖고 있다. 이것은 도교와 불교의 공통점이면서 그것들이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핵심이다. 다시 말해 불교와 도교는 다 인본주의적이며 이것은 중국문명의 정신에 부합하였다(이중톈중국사 3권⋅창시자를 참고).
그러나 신선과 부처는 크게 다르기도 하다.
신선의 특징은 죽지 않는 것이며 부처의 특징은 깨달음이다. 어떤 사람이 최고의 지혜를 깨닫기만 하면 바로 부처가 될 수 있다. 물론 엄격히 말하면 자각(자신의 깨달음), 각타覺他(타인을 깨닫게 하는 것), 각행覺行(깨달음의 과정과 행위가 원만한 것)을 다 이뤄야 부처이다. 자각과 각타만 이뤘으면 보살(Bodhisattva)이고 오직 자신만 깨달았으면 나한羅漢(Arhat)이다.
나한, 보살, 부처는 다 죽는 존재이다. 석가모니는 80세에 죽었다. 하지만 그는 생전에 부처가 되었다. 그의 죽음은 열반(nirvāna) 또는 원적圓寂(Parinirvāna)이라 불렸다.
이것은 일종의 완곡어법이다.
사실 죽음은 죽음이고, 원적은 원적이고, 열반은 열반이다. 원적의 본래 뜻은 ‘원만한 적멸寂滅’이다. 열반은 불교 수행의 최고 경지로서 산스크리트어에서의 본래 뜻은 바람에 흩어지고 불이 꺼지는 것이어서 결코 죽음이 아니다. 정반대로 생사, 시공, 희로애락과 일체의 경험을 초월한 상태이다. 이런 상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어 부득이 열반이라고 부른다.
열반에는 4가지 덕성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상락아정이다. 간단히 말하면 죽지도 살지도 않는 것이 상常이고, 영원히 고통이 없는 것이 락樂이고, 본성이 변치 않는 것이 아我이고, 한 점 티끌에도 물들지 않는 것이 정淨이다. 확실히 불교의 목적은 사람을 신선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정신상태를 바꾸는 것이다. 정신상태가 바뀌면 적어도 나한이 된다.
나한과 신선은 전혀 다르다.
불교와 도교는 역시 전혀 달랐다.
목적만 다른 게 아니라 방법과 경로도 달랐다. 예를 들어 도교는 수일守一을, 불교는 선정禪定을 중시했는데 이 두 가지는 다 정신의 집중과 한결같음을 요구하여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르다. 수일은 정, 기, 신이 새고 확산되는 것을 방지해 불로장생을 보장한다. 하지만 선정은 정력을 집중해 특정 대상(연꽃이나 여러 부처들)을 관조함으로써 최고의 지혜를 얻는다.
확실히 수일은 양생이며 선정은 마음을 닦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정혜定慧(선정과 지혜)를 함께 운용하는 것을 중시했고 도교는 성명性命을 함께 닦는 것을 중시했다. 성性과 명命은 신神과 형形, 즉 정신과 신체이다. 따라서 도교는 심신의 건강을 함께 추구했다.
이것은 당연히 훌륭한 사상이다.
선정은 선과 정을 합친 명칭이다. 선禪(Dhyāna)은 본말이 선나禅那이고 고요한 생각을 뜻한다. 정定은 기다림이며 다시 말해 집중이다. 그리고 혜慧(Mati)는 밝은 관찰이자 결단이다. 이 세 단어를 이어놓으면 고요히 생각하고(선) 정신을 집중해 탐구하고 나서(정) 미혹을 끊고 밝게 살핌으로써(혜) 불교에서 추구하는 반야般若를 얻는다는 것을 뜻한다.
반야(Prajñā)는 지혜, 혹은 지혜를 통해 열반의 피안에 도달하는 것이며 그래서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라고도 한다. 불교에서는, 생사는 미망의 세계로서 차안이며 열반은 해탈이고 피안이라고 생각한다. 차안에서 피안으로 가는 것은 바라밀다(Pāramitā)라고 한다. 그리고 차안에서 피안으로 가려면 지혜가 있어야 한다. 지智는 세상일을 인식할 수 있고 혜慧는 속세의 법칙을 깨달을 수 있는데 이 두 가지가 합쳐진 것이 반야이다.물론 반야는 속세의 평범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반야는 일반적인 의미의 지혜가 아니라 부처가 되는 데 필요한 특수한 인식이다. 최고의 지혜인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을 얻은 이는 심지어 붓다 한 사람뿐이다. 그러나 부처가 못 돼도 나한이 될 수는 있다. 관건은 깨달음을 얻었는지, 그리고 끝없는 고해에서 해탈했는지에 있다.9
이 문제는 더 신중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긴 하지만(이중톈중국사 14권을 참고) 불교와 도교의 차이는 매우 확연하다. 불교는 마음의 종교이고 도교는 생명의 종교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도교는 사람이 살면서 신선 같은 삶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랐지만 불교는 영혼의 안정과 추구에 더 주목했다. 그래서 불교는 복식과 행기 같은 것은 중시하지 않았다.
확실히 지혜와 방술은 서로 무관하다.
종교에 필요한 것은 귀신 놀음이나 연금술이 아니다.
그래서 석가모니 본인도 샤머니즘에 반대했다. 그는 심지어 제자들이 주술을 행하면 계율을 어기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그의 후계자들은 그 규정을 엄격히 준수하지는 않았다. 소승불교에서도 대승불교에서도 모두 부차적인 방식으로 주술을 남겨두었다. 브라만교와 결합한 밀교 같은 경우는 샤머니즘을 고도로 조직화하기도 했다.10
하지만 종교는 본질적으로 샤머니즘이 아니다. 그것이 계속 샤머니즘과 결탁해 분간하기 어렵다면 종교로 변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종교는 순수할수록 샤머니즘과 거리가 멀다. 중국의 선종이 바로 그랬다. 설령 선종이 진정으로 순수한 종교가 아니고 철학일지라도 말이다.
사실 선종은 불교가 외래문화로서 중국화가 필요했기에 탄생했다. 유학화된 선종은 그 중국화의 세 번째 행보였고 현학화된 반야학은 두 번째 행보였으며 샤머니즘화된 부도도는 첫 번째 행보였다. 첫 번째 행보는 황당해 보이기는 해도 그것이 없었으면 불교는 중국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물론 중국사의 이야기가 되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첫 번째 행보를 살펴보기로 하자.
4-3 벼락출세
“대화상大和尙이 오셨습니다!”
전례관典禮官이 소리 높여 외치자 제후와 귀족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의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것은 한 사람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다.
그 사람은 바로 불도징佛圖澄이었다.11
불도징은 후조 불교계의 우두머리였다. ‘대화상’은 후조의 황제 석륵이 그에게 내린 존호로서 ‘위대한 스승’이라는 뜻이었다.12그는 승려로서 가장 존귀한 지위를 얻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불학의 조예가 아니라 도교의 방술에 의지해 그런 지위를 얻었다.
불도징은 서역의 구자龜玆 지역 사람으로 아마도 인도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9살에 출가해 불경을 배웠고 중원에 들어오기 전에는 돈황敦煌에 머물렀다. 서진 회제 영가永嘉 4년(서기 310년), 그는 낙양에 도착해 불교를 전파했지만 서진 멸망 전의 병란을 만나 어쩔 수 없이 석륵의 한 부하 장수 집에 숨어 있었다.
어느 날, 석륵이 그 부하 장수를 불러 말했다.
“너는 그닥 뛰어난 지략도 없고 기이한 술수도 없는데 요즘 전장에 나가 싸울 때마다 그 결과를 알아맞히는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솔직히 고하거라.”
부하 장수는 답했다.
“제가 아니라 한 사문沙門이 알아맞히는 겁니다.”
사문Śramana은 불교의 승려를 말한다.
부하 장수는 또 말했다.
“그 사문은 장군이 천하를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석륵은 불도징을 불러 만났다.
당시 불도징은 자신이 벌써 백 살이 넘었으며 먹지 않고 호흡만으로 살아간다고 말했다. 소문에 따르면 그의 배에는 작은 구멍이 있고 평상시에는 솜으로 막아놓는다고 했다. 그러다가 밤에 책을 읽을 때 그 솜을 빼면 구멍에서 밝은 빛이 비쳐 방안 전체를 환히 밝힌다는 것이었다.
이런 인물이 어떻게 승려였겠는가. 틀림없이 도사나 샤먼에 더 가까웠다.
석륵은 승려든 도사든 상관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 사문이 자신에게 어떤 좋은 일을 가져다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물었다.
“불도는 무슨 영험함이 있소?”
불도징은 그 무식한 갈인에게 반야나 지혜 같은 것을 얘기해줘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맑은 물 한 대야를 가져오게 한 뒤 향을 사르며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순식간에 물속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연꽃이 자라났다.
사람들은 모두 크게 탄복했다.
사실 그것은 아마도 마술이었을 것이다. 당시 많은 승려와 도사들이 그처럼 마술을 부릴 줄 알았다. 동한 말년에 좌자左慈라는 도사가 조조 앞에서 아무것도 없는 놋대야에서 오송강吳淞江의 농어를 낚아 올린 적이 있었다. 또 한 번은 그가 술 한 병, 포 한 장으로 백 명이 넘는 사대부들을 배불리 먹이고 취하게 했는데, 알고 보니 그때 저잣거리에 있는 술집에서 술과 고기가 전부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조조는 요망한 일을 믿지 않아 그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좌자는 조조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즉시 벽을 뚫고 밖으로 도망쳤다. 그런데 거리의 사람들이 전부 좌자의 모습으로 변해버려 조조의 병사들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나중에 붙잡혀온 좌자는 이번에는 양떼 사이로 도망쳐 양으로 변신했다.
조조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
“너를 죽이지 않겠다. 그저 너의 도술을 시험해본 것일 뿐이다.”
그러자 늙은 숫양 한 마리가 앞발을 들고 사람처럼 일어서서 말했다.
“구태여 그럴 필요가 있나!”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수백 마리의 양들이 전부 늙은 숫양으로 변해 역시 앞발을 들고 일어서서 말했다.
“구태여 그럴 필요가 있나! 구태여 그럴 필요가 있나!”
조조는 끝내 좌자를 못 죽였다.13
마찬가지로 석륵도 불도징을 죽이지 못했다.
석륵이 갑자기 살심을 품은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통치자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속사정을 아는 것을 원치 않는데 불도징은 귀신같은 예측력을 갖고 있었다. 물론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석륵이 그를 죽여야겠다고 생각하자마자 불도징은 뺑소니를 쳤다. 석륵을 더 놀라게 한 것은, 그가 후회하고 그 승려를 보고 싶어 할 때, 자취를 감췄던 불도징이 다시 빙그레 웃으며 그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석륵이 물었다.
“어제 저녁에 왜 밖에 나가셨소?”
불도징이 답했다.
“장군이 악의를 가지셨기 때문이지요.”
석륵이 또 물었다.
“그러면 오늘은 또 왜 오셨소?”
불도징이 답했다.
“장군이 생각을 바꾸셨기 때문이지요.”
석륵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도인은 참 말도 청산유수로구려!”
그렇다. 이때 불도징의 호칭은 ‘도인’이었다.
불도징이 신임을 얻은 것은 그가 석륵을 도와 공을 세운 뒤였다. 그 일들은 예외 없이 신기한 이야기들이다. 예를 들어 그는 사원의 방울소리를 듣고서 어떤 적장들이 필히 패할 것인지 예견하기도 했고, 손바닥에 바른 참기름에서 전조의 황제가 포획되는 것을 보기도 했다. 그랬으니 석륵이 그를 신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더 주된 이유는, 똑똑한 석륵이 그 승려가 자신이 황제가 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 석륵은 불도징을 ‘대화상’으로 떠받들었다.
지금 돌아보면 불도징이 군막 안에서 전략을 세우는 데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로 신통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견식이 넓고 세상일에 밝았으며 제자들이 많아 소식이 빨랐을 뿐더러 필요할 때는 교활한 술수도 잘 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건의와 판단이 신묘하게 보였을 것이다. 결국 석륵과 그의 후계자 석호는 모두 그를 마음속으로 따르고 깊이 신뢰하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세상에 늘 잘 나가기만 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갈인의 정권도 모진 운명을 맞이했다. 서기 343년, 동진이 출병해 압박을 해왔고 전량과의 전쟁은 전세가 불리했다. 후조는 연이은 좌절로 인심이 불안해졌으며 석호도 원망과 분노가 가득했다. 그는 성이 나서 말했다.
“부처를 모시고 승려에게 재물을 바치는데도 외적이 쳐들어오니 부처가 무슨 소용인가?”하지만 불도징은 자신만의 견해가 있었다.
그 견해는 윤회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폐하는 전생에 대상인이셨는데 일찍이 나한 60명을 공양하여 금생에 중원에서 태어나 황제가 되신 겁니다. 이것은 선행에 대한 보상인데 왜 원망하시는 겁니까?”
이 말을 듣고 석호는 분노가 기쁨으로 바뀌어 무릎을 꿇고 불도징에게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석호에게는 또 의문이 있었다. 언젠가 그가 물었다.
“불법은 무엇이오?”“죽이지 않는 겁니다.”“짐은 천하의 주인인데 어찌 죽이지 않을 수 있단 말이오?”
불도징은 말했다.
“죽여야 할 자는 당연히 죽여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살심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며 무고한 사람을 마구 죽이는 것은 더더욱 안 됩니다. 폐하가 마음속에 자비를 갖기만 하면 복이 계속 이어질 겁니다. 온갖 죄를 저질러 죽어 마땅한 자를 몇 명 죽이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석호는 매우 만족했다.14
사실 불도징의 견해는 문제가 컸다. 대체 어떤 이들이 죽어 마땅할까? 이 세상에서 어떤 이들은 죽여서는 안 되는 반면, 어떤 이들은 죽어 마땅하고 죽여도 된다고 하면, 죽이지 않는 것이 불법이라는 주장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불도징은 이런 문제에 얽매일 리 없었고 문제의 답을 알았어도 우리에게 알려줄 리 없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석호를 불교 편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가 단지 제자의 허울만 쓰고 자비의 마음 같은 것은 눈곱만큼도 없었을지라도 말이다.
그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사실이 증명해주었다. 나중에 석호는 승려가 너무 많고 자질이 일정치 않다는 것을 감안해 관련 부서에 정리를 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이 기회를 틈타 몇몇 사람이 불교를 전면 금지하자고 제안했지만 석호는 이렇게 묵살했다.
“조나라 백성은 믿을 자유가 있다. 한족을 비롯해 누구라도 부처를 믿을 수 있다.”15
최고 당국자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어 불도징의 사업은 나날이 발전했고 불교도 요원의 불길처럼 빠르게 전파되었다. 후조의 짧은 수십 년 동안에 국내에 무려 893곳의 사원이 세워졌다. 그것은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후로 가장 높은 수치였다.불도징은 성공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불교의 생태환경을 바꾼 것이었다. 과거에 불교의 경전 번역과 사원 건립과 선교 활동은 주로 민간의 신도들에게 의존했고 여기에 지역 유지와 지식인의 도움이 더해졌다. 그런데 불도징이 최고 통치자로 하여금 불교를 국가 공권력의 보호 아래 두게 하여 황권을 이용해 교권을 얻은 것이다.
그것은 중국 불교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16
그래서 불도징은 시대에 획을 그은 인물이 되었다. 그의 역사적 지위는 아마도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를 무릎 꿇려 참회하게 만든 밀라노의 대주교만이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이중톈중국사 9권⋅두 한나라와 두 로마를 참고). 더욱이 불도징의 성공은 그 전에는 예가 없었으나 그 후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시대부터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승려들이 궁정에 들어갔고 고승의 정치 참여가 전통이 되기까지 했다. 방술로 간주되던 불교가 마침내 벼락출세를 한 것이다.
4-4 한 걸음씩 나아가다
그와 동시에 도교도 발전을 이루었다.
불교가 외국에서 중국으로 갔다면 도교는 하층계급에서 상층계급으로 갔다. 동한 순제 시기(서기 125~144년)에 우길于吉이 태평청령서太平淸領書를 썼을 때부터 북위 태무제가 태평진군太平眞君(서기 440년)으로 연호를 바꾸고 친히 도단道壇에 올라 부록을 받을 때(서기 442년)까지 그 3백 년은 기나긴 여정이었다.
끝도 없는 그 길을 도교는 꾸준히 한 걸음씩 나아다.
사실 불교의 중국화가 세 번의 행보를 거친 것처럼 도교의 합법화도 세 단계를 거쳤다. 첫 단계는 민간 도교로서 바로 천사도와 태평도였다. 이 두 가지는 도교 발생의 지표로 간주되기는 하지만 실상은 ‘유사 종교’ 혹은 ‘준准 종교’일 뿐이었고 더구나 기층, 심지어 지하의 민중에게 속했다.17
그래서 천사도와 태평도는 합법적인 지위가 없었을 뿐더러 단속과 탄압을 받았다. 특히 태평도가 황건적으로 변한 이후로 더 그랬다.
손은의 조직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다행히도 수장이었던 장노張魯가 조조에게 투항한 덕분에 천사도는 액운을 피해 전파될 수 있었다. 더 다행이었던 것은 천사도가 일부 위진 명사들의 주목과 환영을 받은 것이었다. 여러 고위급 사족이 도교에 가입했고 심지어 대를 이어 도교를 신봉하는 가문도 나타났다. 왕희지, 갈홍葛洪, 도홍경陶弘景의 가문이 그랬다. 수장과 주요 세력이 방사에서 명사로 바뀌면서 도교는 두 번째 단계로 올라섰다. 민간 도교가 사족 도교로 바뀐 것이다.18
사족 도교는 민간 도교의 업그레이드판이었으며 사족계급의 사치품이자 마취제이기도 했다. 사실 문벌제도와 혼란한 정치 때문에 사족은 계급으로서는 법적인 특권을 누리며 안일하고 사치스러운 삶을 영위했지만 개인으로서는 자신의 운명을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특히나 아무도 언제 하늘에서 화가 자기 머리 위로 떨어질지 모르는 것이 가장 무서웠다.
한가한 나날을 잘 보내고 고귀한 신분을 과시해야 했기에 청담淸淡이 생겨났다(이중톈중국사 11권⋅위진풍도를 참고). 불안한 영혼을 위로하고 공허한 정신을 기댈 데가 있어야 했기에 도교가 유행했다.
그러면 왜 불교가 아니라 도교였을까?
왜냐하면 동진 이후 양자강 하류의 동남부 지역에 안착한 사족들이 관심을 두었던 것은 더 이상 국가의 흥망과 민족의 성쇠가 아니라 기득권과 개인의 안위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중생을 널리 제도하고 싶어 하지 않고 단지 자신의 건강과 장수만을 바랐다. 그래서 도가 학파 중에서 양주楊朱가 주장한 급시행락及時行樂(시기를 놓치지 않고 그때그때 삶의 즐거움을 누린다는 뜻), 장자가 주장한 소요자재逍遙自在(시공간이나 사물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로움을 누린다는 뜻) 그리고 도교에서 선양한 복식, 행기, 양생, 신선술이 전부 사대부들에게 채택되어 사랑을 받았다.
더군다나 불교는 오랑캐의 것이고 도교는 한족의 것이었다.
그래서 도교의 사족화와 불교의 현학화가 동시에 이뤄지기는 했지만(모두 동진 때 완성되었다) 사족화된 도교는 현학으로 변하지 않았다. 현학으로 변한 것은 불교의 반야학이었다. 다시 말해 불교에 대해 명사들은 더 주목한 것은 의리義理, 즉 철학적 의미와 사변의 정신이었다. 그러나 도교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전혀 달라서 매우 실용주의적이었다.
요컨대 청담에는 불교가, 신선술에는 도교가 관련되었다.
그래서 동진에서는 승려가 현학을 논하고 명사가 단약을 만들었다. 왕희지 같은 사람은 현학도 논하고 단약도 만들었다. 물론 민간 도교는 의문의 여지없이 사이비로 간주되어 명사들의 중시를 받지 못했다.
이때부터 도교는 양 극단으로 분화되기 시작했다. 지하로 숨어든 민간 도교는 계속 통속적인 형식으로 전파되었고 심지어 그 안에서 비밀조직이 나와 농민 반란의 기치와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반면 상층 사회로 침투한 사족 도교는 서재와 도관에서 궁정까지 들어가 마지막에는 황가皇家 도교로 변했다.
그것이 세 번째 단계이다.
황가 도교의 탄생은 필연적이었다. 사실 황제의 후원이 없으면 어떤 종교도 합법성을 갖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도교도 자신을 황권의 날개 아래에 두고 최고 권력의 도움을 받아 생존과 발전을 도모해야 했다. 다만 그들이 그 한 걸음을 내디딘 것은 불교보다 거의 백 년 가까이 늦었다. 하지만 도교 역시 북방 소수민족의 정권에 의지했고 그들에게도 불도징 같은 인물이 있었다.
도교의 불도징은 구겸지寇謙之였다.
구겸지는 북위 상곡上谷 창평昌平(지금의 베이징 촹핑) 사람으로 조상이 명문가인데도 자신은 어려서부터 신선의 도에 심취하였다. 안타깝게도 이 신선 후보자는 열정이 넘치고 태도가 성실했는데도 불구하고 오래 약을 먹고 연마를 해도 거듭 실패만 하다가 우연히 한 고인을 만났다.
고인의 이름은 성공흥成公興이었다.
성공흥은 구겸지에게 물었다.
“선생은 도를 배울 뜻이 있어 보이는데 은거를 할 수 있겠소?”“당연히 그럴 수 있습니다.”
구겸지는 성공흥을 따라 화산華山의 어느 밀실에 가서 그가 주는 약을 먹었고 그때부터 허기를 못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이어서 숭산嵩山의 밀실에 가서 두 번째 약을 받았을 때, 그는 놀라서 줄행랑을 쳤다.
그 약은 독충과 몇 가지 구역질나는 것들이었다.
성공흥은 탄식을 하며 말했다.
“보아하니 선생은 신선이 될 인연이 없는 것 같구려. 하지만 나라를 안정시키고 제왕의 스승이 될 수는 있겠소.”
당시 구겸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단지 알려진 것은 그 후 어느 날, 성공흥이 세 번째 밀실에서 죽고 이튿날 부활한 뒤 숭산으로 마중을 나온 두 선동仙童과 함께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알고 보니 성공흥은 본래 신선이었는데 잘못을 저질러 속세에 귀양을 왔다가 기한이 되어 하늘로 돌아간 것이었다.
신선도 잘못을 저지른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구겸지는 성공흥이 ‘우화등선’한 뒤에도 계속 숭산에 머물다가 태상노군太上老君과 그의 현손玄孫(손자의 손자)을 만났다. 그 두 신선은 구겸지에게 도교의 비급과 각종 방술을 전하고 그에게 ‘천사天師’의 직책과, 사방 만 리에 있는 사람과 귀신을 다스릴 권한을 내렸다. 그리고 그에게 두 가지 신성한 사명도 주었는데, 그것은 도교를 바로잡고 북방의 태평진군을 보좌하라는 것이었다.
확실히 이것은 무협소설에나 나오는 이야기지만 놀랍게도 정식으로 사서에 분명하게 기록되었다. 태상노군이 속세에 내려온 것은 북위 신서神瑞 2년(서기 415년) 10월 22일이고 그의 현손이 숭산에 강림한 것은 태상泰常 8년(서기 423년) 10월 5일이라고 했다.19
날조의 수준이 이 정도면 실로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그 두 날짜는 실제로 존재했겠지만 구겸지가 일의 준비를 마친 시점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 두 가지 사명도 그가 스스로 자신에게 부여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곧 구겸지의 뛰어난 점이었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또 도교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3백 년 가까운 천사도의 역사와 현재의 상황을 깊이 성찰한 결과였다.
그러면 당시 도교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저속하고, 혼란스럽고, 정권에 해로운 것이었다. 예를 들면 방중술을 수련한다는 명목으로 음란한 짓을 했고, 사람들에게 부록을 준다는 명목으로 재산을 갈취했고, 종교 활동을 한다는 명목으로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사람들을 모아 소동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사대부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통치자의 비위를 거슬러 도교는 조만간 금지와 탄압을 받을 운명이었다.
종교개혁이 꼭 필요했다.
폐단의 제거(방중술의 폐지, 위서僞書의 청산)와 제도 혁신(재계의 본보기와 계율에 대한 수정)부터 조직의 정비(교단 지위의 부자상속 같은 폐습의 개혁)에 이르기까지 개혁은 전방위적으로 수행되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했던 것은 단호히 국가 정권을 옹호하는 한편, 대중을 미혹하고 모반을 저지르는 행위를 엄금한 것이었다.
개혁 후의 도교는 신新천사도 혹은 북北천사도라 불렸다. 그것의 핵심 가치는 사실 유가가 주장한 삼강오상三綱五常이었다. 그리고 종교의 형식은 불교를 대대적으로 모방했는데 제단을 세우고, 공덕을 쌓고, 경문을 낭송하고, 계율을 지키는 것 등이었다. 심지어 육도윤회六道輪回를 선양하기까지 했다. 결국 개혁의 목표는 사실상 두 가지, 유교를 겸하고 불교를 끌어들이는 것이었다.도교는 여기저기에서 벤치마킹을 했다.
이렇게 대국을 고려해 스스로를 개조했으니 통치자의 환심과 사대부의 동의를 얻는 게 당연했다. 서기 424년 또는 425년, 다시 말해 유의륭이 송 문제가 된 그해 혹은 그 이듬해에 구겸지는 북위의 수도 평성에 천사도의 도량을 설립했다. 그리고 16년 뒤, 태무제는 연호를 태평진군으로 바꿨고 또 2년 뒤에는 친히 도단에 올라 부록을 받는 한편, 그것을 새 황제가 즉위할 때마다 반드시 거행해야 하는 의식으로 삼았다.21
도교는 정식으로 북위의 국교가 되었다.
구겸지는 북위의 국사國師가 되었다.
그때는 불도징이 대화상으로 존경받던 때로부터 거의 백 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일찍이 중국의 북방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불교는 또 당시에 어떤 상황이었을까?
4-5 태무제와 양무제
불교는 큰 재난에 직면했다.
서기 446년, 태무제 탁발도가 친히 도단에 올라 부록을 받은 지 4년 뒤인 그해에 그는 전국적으로 불교를 금하라는 명을 내렸다. 태무제의 명령은 명확했다. 사원과 불상을 다 부수고, 불경을 다 불사르고, 승려도 나이를 막론하고 다 죽이라고 했다. 게다가 군대를 이끌고 수도를 나와 반란을 평정했던 태무제는 장안에서 벌써 그 끔찍한 일을 행했다.
다행히도 평성을 지키던 황태자 탁발황은 생각이 달랐다. 그는 한편으로 부황에게 편지를 올려 불가함을 역설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일부러 정보를 흘려 각지의 승려들이 불경과 불상을 갖고 몸을 숨기게 했다. 하지만 숨을 방도가 없는 사원들은 하루아침에 파괴되었고 황태자 본인도 무거운 대가를 치러야 했다. 하지만 그가 암암리에 보호해주지 않았다면 불교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그것은 중국 불교 역사상 최초의 대법난大法難이었다.
그 법난을 야기한 원인은 여러 가지였다. 근본적인 원인은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직접적인 원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태무제가 장안의 어떤 사원에서 무기와 재물, 술을 마시는 집기와 여자를 발견했기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그의 옆에서 누가 부추겼기 때문이었다.22
태무제를 부추긴 사람은 최호였다.
최호는 탁발도의 총신이자 구겸지의 친우였다. 당시 구겸지는 날조한 신화와 경전을 갖고 평성에 갔는데 뜻밖에 당국은 그리 호락호락하게 속아주지 않았다. 태무제는 그에게 숙식만 제공해주었으며 조정의 관리들도 반신반의했다. 최호가 없었으면 구겸지는 틀림없이 아무 일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 최호는 왜 구겸지를 도우려 했을까?
뜻이 맞았거나, 혹은 이해관계가 맞았다.
명문가 출신의 최호는 화하문명의 옹호자였고 그의 이상은 선비족과 탁발 정권을 완전히 한화시키는 것이었다(본서의 제2장을 참고). 그래서 최호는 불교라는 외래종교에 대해 반감이 컸다. 그가 떠받들려 했던 것은 유가학설이었다. 비록 그 유학은 이미 순수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에 대해 구겸지는 깊은 이해와 동정을 표했다.
그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신천사도는 도교의 외피를 뒤집어쓴 신유학이었고 구겸지의 종교개혁은 도교의 유학화였다. 그는 심지어 최호에게 겸허히 가르침을 청했다.“태상노군이 제게 부여한 사명은 태평진군을 보좌해 영원한 전통을 계승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게 유교를 겸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저는 재주가 미천하고 견문이 좁으니 많은 가르침을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래서 최호는 구겸지가 유학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도왔다.
구겸지는 최호에게 양생의 비방을 전수했다.23
서로 이익을 주고받을 수 있음을 확인한 뒤, 최호는 태무제 앞에서 구겸지를 추어올렸다. 그때 최호가 길게 늘어놓은 말을 보면 사실 요점은 딱 하나였다.
“구겸지처럼 고매한 은거 도사가 청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찾아온 것은 폐하가 받은 천명이 옛날의 황제黃帝에 못지않음을 증명해줍니다.”
이런 말을 듣고 태무제가 어떻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구겸지의 성공은 최호의 공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최호가 불교를 탄압하려 했을 때 구겸지는 찬성하지 않았다. 물론 도교와 불교는 의견의 대립과 이익의 충돌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입씨름이었을 뿐 본격적인 싸움은 아니었다. 상대를 몰살시키려는 일을 석가모니든 태상노군이든 지지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구겸지는 최호에게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불상을 훼손하고 사람을 죽인다면 화가 온 가문에 미칠 겁니다!”
나중에 최호는 과연 멸족을 당했다.
불교는 잿더미 속에서 다시 일어났다. 태무제가 죽고 그 뒤를 이은 문성제文成帝는 불법을 부흥시키라고 조칙을 내리는 한편, 불교를 탄압한 책임을 관련 부서가 선제의 의도를 잘못 읽은 탓으로 돌렸다. 그래서 전 황태자 탁발황의 은밀한 도움으로 자취를 감췄던 불상과 불경과 승려들은 모두 다시 햇빛을 보았다. 그 후로 불교는 두 번째 대법난(본서의 제5장을 참고)을 당할 때까지 다시 흥성했다.
두 번째 대법난은 서기 574년에 발생했다. 그 사이의 135년 동안 불교는 줄곧 북방의 통치자들에게 숭배를 받았다. 섭정을 했던 북위의 한 태후는 사원을 세우고 예불을 했을 뿐만 아니라 권력투쟁에서 패한 뒤에는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려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석가모니의 보우를 받지 못하여, 분노한 쿠데타 수괴에 의해 황하에 던져졌다.25
하지만 그 태후가 새 도읍 낙양에 세운 영녕사永寧寺는 북위 불교 번영의 상징이었다. 당시 낙양에 가람伽藍(Sanghārāma)이라 불리는 불교 사원이 천여 곳이나 됐는데 영녕사는 틀림없이 제일 장관인 사원 중 하나였다. 그 금빛 찬란한 외관을 보고서 중국 선종의 시조인 달마達摩조차 며칠이나 경의를 표하며 합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사월초파일의 석가탄신일에는 더 전례 없는 성황을 이뤘다. 깃발이 숲처럼 세워지고, 보개가 구름을 이루고, 흩날리는 금박지가 햇빛 아래 반짝이고, 범악梵樂과 독경 소리가 하늘까지 울려 퍼졌다. 낙양은 그야말로 불국佛國의 수도였다.26
사실 태무제가 불교를 탄압한 지 몇 년 만에 수도 평성의 서쪽 교외에서 운강雲岡석굴의 착공이 시작되었다. 그 후로 백여 년에 걸쳐 십만 개가 넘는 불상이 조각되었고 가장 큰 것은 높이가 20미터가 넘었다. 낙양 천도 후에는 또 성 남쪽에서 용문龍門석굴이 착공되어 4백 년 넘게 공사가 이어졌다. 여기에 전진前秦이 착공한 돈황석굴 등까지 감안하면 붓다의 그 자상한 얼굴과 눈빛이 없는 데가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북조의 그 많은 석굴은 남조의 480곳에 달하는 사원에 비견될 만했다.27
하지만 불교가 최고의 예우와 숭배를 받은 것은 태무제의 불교 탄압이 있은 지 81년 뒤였다. 그해(서기 527년)에 남조의 한 황제는 건강의 어느 사원에 가서 황포를 벗고 가사를 입은 뒤 보통 신도의 신분으로 사원 안에서 잡일을 하고, 경문을 읽고, 불학을 공부했다. 교회 안에서 흰 옷을 입고 무릎을 꿇었던 테오도시우스 1세와 완전히 똑같았다(이중톈중국사 9권⋅두 한나라와 두 로마를 참고). 단지 그 로마 황제는 참회를 하려 했고 이 중국 황제는 사신捨身을 하려 한 것이 달랐을 따름이다.
사신은 바로 속세를 버리고 석가모니를 모시는 것이다.
스스로 원해 사신을 한 사람은 양 무제였고 그 사원은 동태사同泰寺였다. 동태사의 유적 위에 지금 있는 명대의 계명사鷄鳴寺가 지어졌다. 양 무제는 모두 4차례 사신을 했는데 당연히 그때마다 신하들이 1억의 보상금을 지불하고 데려왔다. 다시 말해 양 무제는 동태사에서 4번 사신을 하면서 그 사원을 위해 4억의 국가 기부금을 모집해준 것이다.28
그는 실로 불교의 최대 서포터였다.
양 무제는 득의양양해서 심지어 스스로 ‘황제 보살’이라 자처했다. 하지만 달마는 코웃음을 쳤고 그가 공덕이 전무하다고 생각했다(이중톈중국사 14권을 참고). 사실상 그런 것이 그 기부금은 결코 그 개인의 돈이 아니었다. 전부 백성의 고혈이었다.29
더구나 불교에 대한 양 무제의 열광적인 지원은 이미 국가 재정과 민생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생각해보라. 당시의 정책에 따라 사원은 무상으로 토지를 받았으며 승려는 세금을 낼 필요가 없었다. 그 결과, 어느 관원이 말했듯이 세상 호구戶口의 반을 잃고 말았다. 그런 추세가 계속되면 곳곳에 사원이 들어서고 집집마다 머리를 깎을 테니 국가에 속한 땅과 사람이 한 뼘, 한 명이라도 남을 리가 없었다.30
양 무제도 이 점을 몰랐던 것이 아니다. 그가 택한 방법은 소승불교가 고기를 먹어도 된다고 한 규정을 폐지하고 본인이 솔선수범해가며 백성들에게 술과 고기를 금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가짜 자비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하물며 양 무제의 채식은 저렴하지도 않았다.31
실제로 불교가 도교와 동시에 탄압당한 것을 포함하여 여러 차례 탄압을 당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어느 정권도 자신들의 노동력과 전투력이, 자신들이 보기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수도자로 몽땅 바뀌는 것을 원치 않았다.
통치자들은 종교의 규모를 통제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제적인 이유 외에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다. 사실 종교가 정치에 과도하게 개입하면 통치자들은 경계하고 대비해야만 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그들이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것은 유학밖에 없었다. 유가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람은 집에서는 효자이고 밖에 나가면 충신이니 이런 이들을 누가 좋아하지 않겠는가?
안타깝게도 유학은 종교가 아니어서 치세에만 맞고 난세에는 맞지 않았다. 난세에는 질서도 없고, 권위도 없고, 희망도 없어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신밖에 없었다. 그래서 통치자는 귀신의 권위를 빌리려 했고 반란자들은 초자연적인 힘으로 가장했으며 민초들은 구세주가 오기를 염원했다. 그래서 불법이 크게 행해지고 도교가 크게 흥한 것이다.
남은 일은 선택이었다.
선택에도 통치자의 사적인 호오를 비롯한 여러 기준이 있었다. 그런데 위진남북조에는 민족문제도 있었다. 석호는 말하길, “부처는 이민족의 신이므로 마땅히 섬겨야 한다.”라고 했다. 그래서 북방은 불교를, 남방은 도교를 중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32
그런데 이상하게도 북위의 태무제는 이민족인데도 불교를 탄압했고 남조의 양 무제는 한족인데도 불교의 비위를 맞췄다. 이것은 전도된 일이 아닌가? 태무제와 양 무제는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이런 전도 현상의 배후에는 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해답은 아마도 북조가 종말을 고한 시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중텐중국사 12 남북조 >번역: 김택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