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계초梁啓超의 「소설과 사회문제 치리(治理)의 관계를 논함」 : 부강한 국민국가와 소설의 힘에 대한 상상

1842년, 아편전쟁의 결과 맺어진 남경조약에 따라 개항된 상해는 19세기 후반기에 오면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 지역 최대의 무역항으로 부상하게 됩니다. 서양 사람들이 거주하며 영업 활동을 하던 치외법권 지구인 조계를 중심으로 새로운 성격의 공간이 형성되면서 상해는 전통적인 것과는 다른 새로운, 혼종적 문화가 싹트는 곳이 되었지요.

상해 조계의 경마장(「새마지성賽馬誌盛」, 『점석재화보』, 1884년)

1890년대의 상해에는 이미 제법 큰 소설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당시의 소설은 서구-근대적 의미의 ‘소설’(novel과 short-story)에 근사한 것을 일부 포함, 각종 일화나 풍문을 기록한 잡기류 같은 것들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컨대 당시 ‘소설’이란 도시민이 찾는 소일거리, 유흥거리로서의 ‘글로 쓰인 이야기’의 성격이 강했지요. 무술변법戊戌變法의 실패 후 일본에 망명 중이던 양계초가 ‘소설계혁명’을 제기한 것은 직접적으로는 일본의 정치소설을 참조한 것이지만 아울러 중국의 전통 소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상해에서 이미 흥기하고 있던 소설 출판을 염두에 두고서였습니다.

양계초는 소설 출판이 고조기로 접어들기 시작한 1897년, 『시무보時務報』에 연재하던 「변법통의變法通義」라는 글의 한 부분인 「논유학제오論幼學第五․설부說部」와 1898년에 쓴 「정치소설을 번역해 싣는 것에 대해(譯印政治小說序)」에서 소설의 ‘힘’에 대해 설파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양계초는 이미 소설의 힘이 사회를 변혁시킨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902년 11월, 양계초는 망명지 일본 요코하마에서 『신소설』을 창간합니다. 그는 창간호에 ‘소설계혁명’의 선언적 문건인 동시에 가장 주요한 이론적 문건이기도 한 「소설과 사회문제 치리(治理)의 관계를 논함(論小說與群治之關系)」을 발표합니다.*

한 나라의 국민을 혁신시키고자 하면 제일 먼저 그 나라의 소설을 혁신시켜야 한다. 마찬가지로 도덕을 혁신시키고자 하면 반드시 소설을 혁신시켜야 하고, 종교를 혁신시키고자 해도 반드시 소설을, 정치를 혁신시키고자 해도 반드시 소설을, 풍속을 혁신시키고자 해도 반드시 소설을 혁신시켜야 한다. 사람들의 마음이나 인격을 혁신시키고자 할 경우에도 반드시 소설을 혁신시켜야 한다. 이는 소설이 인간사를 지배하는 불가사의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위대한 성현들이 수만 마디의 말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도하고자 했지만 부족했는데, 황당한 생각이나 하는 선비와 장사치들은 한두 권의 책으로도 너끈히 사람들을 퇴폐적이 되게끔 하고 쇠락하도록 하였다. 고상한 군자로서는 이러한 일들을 자질구레하게 말할 바가 못 된다고 여겨 부득불 황당한 생각이나 하는 선비와 장사치의 손아귀에 맡겨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성질이나 위치는 또한 공기나 곡식과도 같아, 한 사회에서 회피하고자 해도 할 수 없고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것이 황당한 생각이나 하는 선비와 장사치들에게 맡겨졌으니, 결국은 그들이 한 나라의 주권을 쥐고 조정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아아, 만약 이와 같은 상황이 영원히 계속 된다면 우리나라의 전도를 그래도 물어볼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물어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오늘날 사회문제 치리(治理, 거버넌스)를 개량하고자 하면 반드시 소설계의 혁명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며, 국민을 혁신시키고자 하면 반드시 소설을 혁신시키는 데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양계초는 소설의 신비로운 힘을 강조하며 그것이 새로운 국민을 형성하는데 기여할 수 있음을, 기여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가 보기에 소설이 새로운 국민을 만들어내고 부강한 중국을 건설하는 데 기여할 수 없는 것이라면 ‘문학의 최고 경지(文學之最上乘)’로서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것이지요. 실제 정치판에서의 입지를 잃고 망명해 있던 양계초는 활용 가능한 매체를 총동원해서 부강한 국가와 각성한 국민을 만들어내는 데 필요한 작업에 몰두합니다. 이 글이 보여주는 과장의 수사는 그렇기 때문에 양계초의 열망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모든 시는 ‘군가’가 되어야 한다는 수사가 그랬듯, 소설이야말로 모든 것을 새롭게 할 힘을 가졌다는 주장은 그렇기에 결국 배제의 수사이기도 하며, 소설 혹은 문학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층위의 가능성들을 오직 하나의 목표로 수렴하는 환원의 수사이기도 합니다.

양계초가 『신소설』 창간호부터 연재하기 시작한
「신중국미래기」. 이 소설이 미완으로 그치고 만 것은 ‘정치소설’의 명운을, 나아가 신중국의 미래의 불투명함을 예견하는 것이었을까.

그런데 부강한 국민국가와 소설의 힘에 대한 양계초의 이와 같은 ‘상상’이 당시 중국 소설의 중심지였던 상해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요?

중국 내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하던 양계초가 『신소설』이라는 소설 전문지를 창간하고 거기에 「소설과 사회문제 치리의 관계를 논함」을 발표한 것은 아마도 상해의 소설인들에게 크게 고무적인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상해의 소설계에서는 이 글에 호응하여 ‘소설의 힘’과 사회적 의의를 천명한 유사한 입장의 글들이 잇달아 발표되었지요.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적보현狄葆賢의 「문학상 소설의 위치를 논함(論文學上小說之位置)」(1903), 김천우金天羽의 「인정을 묘사한 소설과 신사회의 관계(論寫情小說於新社會之關系)」(1905), 하증우夏曾佑의 「소설원리小說原理」(1905), 천륙생天僇生의 「소설과 사회를 개량하는 일 사이의 관계에 대해 논함(論小說與改良社會之關系)」(1907), 서념자徐念慈의 「나의 소설관(余之小說觀)」(1908) 등으로, 양계초의 논의에 기반하여 그것을 확장하거나 다듬고 보충한 것들이었습니다.

실제 창작을 하던 쪽 사람들의 입장을 볼까요. 오견인吳趼人은 『신소설』의 영향을 받아 1906년 9월에 창간한 『월월소설月月小說』의 서문에서 양계초가 제창한 ‘소설계혁명’의 영향에 대해 “내가 생각하기에 저 음빙자飮冰子(양계초)의 「소설과 사회문제 치리의 관계를 논함」이 나타나 소설의 개량을 제창하고서 몇 년 되지 않아 우리나라에서 새롭게 지어지고 새롭게 번역된 소설이 수없이 많은데, 마치 길吉한 복일復日(월, 일의 오행이 겹치는 날)이 거듭 끊이지 않고 이어져 다할 때가 없는 것과 같은 형국이었다”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다소 과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현재까지 파악된 자료를 근거로 할 때 1902년 이후 소설의 고조기에 접어들었다는 점은 사실입니다. 오견인 자신으로 보자면 그전까지는 『한의 바다(恨海)』와 같은 연애소설을 짓고, 자질구레한 읽을거리를 싣는 여러 문예소보文藝小報에 간여했던 사람으로 양계초가 창간한 『신소설』에 「이십년 동안 목도해온 괴이한 현상들(二十年目睹之怪現狀)』을 연재하면서 ‘정치소설’로 방향을 전환한 인물이지요.

일본 체류 기간의 양계초. 당시 대다수 망명객과 유학생이 그랬듯 변발을 버린 모습이다.

1902년 이후 상해의 소설 출판이 늘어난 공을 「소설과 사회문제 치리의 관계를 논함」에만 돌릴 수야 당연히 없겠지요. 하지만 그러한 팽창이 가능했던 제반 물질적 조건들과 함께 이와 같은 부류의 논의가 갖는 힘이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신소설』에 뒤이어 등장한 『수상소설繡像小說』(1903년 창간), 『월월소설』(1906), 『소설림小說林』(1907) 등에 실린 소설들은 하나같이 ‘정치소설’, ‘사회소설’, ‘과학소설’ 등 ‘모모소설’하는 꼬리표를 달기 시작하며 이를 통해 이전의 소설과는 다른 ‘신소설’이라는 점을 스스로 표방합니다. 여기에는 ‘신소설’로서 새로운 세계를 독자에게 소개하고 그들을 계도한다는 포부가 담겨 있었지요. 이와 같은 ‘꼬리표’는 양계초가 비판한 ‘구소설’과는 달리 ‘새롭고’ ‘올바른’ 소설임을 표방하는 표식으로 사용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당시 소설의 극도로 상업화된 속성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유행’을 따라가는 형국이기도 했지요.

양계초가 소설의 가치를 크게 선양한 후 소설을 쓰고 출판한다는 것이 ‘매문賣文’ 이상의 의미를 갖는 일로 여겨지기 시작한 점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소설을 짓거나 번역하는 일은 수지가 맞는 일이기도 했거니와 국민의 정신을 함양시키는 가치 있는 일로 받아들여져 적지 않은 이들이 이 일에 ‘투신’하게 됩니다. 일종의 ‘문화 사업’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문화 사업’은 대거 상해에 진출하여 언론․출판계에 몸담고 있던 강남江南 출신의 중하층 문인들에게는 자신들의 뜻을 펴면서 생계도 도모할 수 있는 구미당기는 일이었던 셈입니다. 전통 시기에 문인들이 통속적인 문학과 관련된 활동을 한 경우, 그것이 합당한 일이라는 의의 부여를 해야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상해에서 상업적인 소설을 쓰는 사람들도 자신들의 작업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이념적 포장을 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명분의 문제였고 문인 자신의 사회적 역할의 확인과도 관련된 문제였지요. 「소설과 사회문제 치리의 관계를 논함」 이전에도 (번역)소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언술이 없지 않았습니다. 엄복嚴復과 하증우夏曾佑가 함께 썼다고 알려진 「본 신문에 소설을 부록으로 싣는 이유에 대해(本館附印說部緣起)」(1897년), 양계초의 「정치소설을 번역해 싣는 것에 대해(譯印政治小說序)」(1898년), 구위원邱煒萲의 「소설과 인민의 지혜의 관계(小說與民智關系)」(1901), 임서林紓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 대한 발문(黑奴吁天錄跋)」(1901)과 같은 글들은 새롭게 번성하기 시작한 소설에 주목하면서 그것의 역할은 무엇일 수 있는가에 대한 모색인 동시에 그것을 창작 혹은 번역하는 작업에 대한 일종의 합리화의 논리이기도 했지요. 양계초의 글은 이러한 기왕의 논의를 바탕으로 소설에 ‘새로운 국가와 새로운 국민의 창조’라는 막중한 과제를 부여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과연 소설의 창작과 번역이 늘어났고 상해의 문인들이 양계초의 주장에 호응하며 그것을 소설의 의의 및 소설가의 사회적 지위를 변호하는데 적극 이용하였습니다만, 정작 양계초의 입장에서 긍정할만한 소설은 소수에 불과했으며 엄밀한 의미에서 ‘정치소설’이라고 할 만한 것으로 1901년에서 1906년 사이에 단행본으로 출판된 것은 고작 36편에 불과했답니다. 그 가운데에는 편역에 가까운 것으로 서구에서 일어났던 정치사회적 변혁을 다룬 것이 21편에 달했지요. 1900년대 후반에서 중화민국 초엽에 이르는 시기는 정치적 격동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상해의 소설판을 지배한 것은 20세기 초 상해판 ‘재자가인才子佳人’ 소설이라고 할만한 ‘원앙호접파鴛鴦蝴蝶派’의 소설이거나 사회의 추잡한 면을 흥미 위주로 들추어내는 ‘흑막소설黑幕小說’과 같은 싸구려 황색 소설이었습니다. 양계초가 희망한 대로 소설이 새로운 국민을 창출하는 ‘계몽’의 매체로 기능하지는 못했던 셈이지요.

하지만 소설이야말로 ‘문학의 최고 경지’라고 주장한 양계초의 언설은 분명 중국에서의 소설의 시대의 개막을 선언한 포고문인 셈이었고, ‘계몽을 통한 신중국의 창출’과는 다른 맥락이긴 합니다만, 상해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시장과 독자층을 확보한 새로운 소설을 매개로 새로운 ‘중국’이라는 공동체가 상상되는 국면이 곧 펼쳐지게 됩니다. 또한 그의 계몽주의적, 환원론적 소설관이 이후 변형된 형태로 거듭 등장하여 ‘소설’을 옥죄었던 현상도 간과할 수 없겠습니다.

*인용한 번역은 김월회의 번역에 자구 상 약간의 수정을 가한 것입니다. 전문 번역은 김월회 역, 「소설과 대중정치의 관계를 논함」(『자료와 소식』 제4호, 한국중국현대문학학회, 1994. 4.)을 볼 것. 필자 역시 이 글을 처음 발표할 때는 ‘群治’를 ‘대중정치’로 번역했는데, 여기에서는 최근 중국에서 통용되는 풀이를 참작해 ‘제반 사회문제에 대한 치리(거버넌스)’라는 의미로 옮겼습니다.

(민정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