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혁명’과 애국계몽가요 : 실패한 ‘시국詩國’ 재건의 꿈

강유위와 함께 청말의 변법운동을 주도한 인물이었던 양계초는 동원 가능한 모든 역량을 부강한 중국을 가능케 하는 데 투여하고자 했으며 글쓰기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새로운 ‘문학’을 구상했으며 그러한 구상의 근저에는 부강한 중국에 대한 열망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는 ‘시계혁명’, ‘소설계혁명’, ‘문계혁명’, ‘희극개량’에 대한 주장을 통해 새로운 중국을 위한 새로운 문학을 역설하였으며 동시에 근대적 ‘문학’의 범주를 제기했던 것이지요. 앞서 황준헌黃遵憲의 시를 소개하며 양계초의 시계혁명론에 대해 언급했습니다만, 이제 시계혁명에 내재한 욕망의 성격에 대한 논의를 위주로 좀 더 살펴보도록 하지요.

소설을 새로운 국민을 만들어내는 효과적인 도구로 보면서 그것에 대해 매우 분명한 요구를 했던 것에 비한다면, 양계초는 시에 대해서는 대단히 조심스럽게 접근했습니다. 그의 모색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어떻게 하면 시가 새로운 시대의식과 감수성을 충분히 표현하고 또한 국민 정신을 고양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었지요. 그러면서도 시가 ‘시답기’ 위해 가져야 하는 미학적 특질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문文’의 범주에 들지 못하던 소설을 새로 짜여진 ‘문학’ 범주의 가장 중요한 장르로 부각시키는 것은 쉬웠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시에 관한 오래된 미학적 원칙들은 너무나도 공고했고, 새로운 규준들은 쉽사리 손에 잡히지 않았던 듯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 바로 ‘신의경新意境-구풍격舊風格 조화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계초는 1899년 말에 쓴 「하와이 여행기」에서 ‘시계혁명’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처음으로 ‘신어구’, ‘신의경’과 ‘구풍격’의 조화를 주장했고 이후 『신민총보』에 연재한 「음빙실시화」를 통해 거듭 이 원칙을 천명했지요. 새로운 시대의식/감수성과 오래된 미학적 원칙들을 조화시키자는 일견 모순된 이 주장은 기본적으로 시의 소통성과 감염력의 확보가 중요하다는 인식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앞 장에서 다룬 ‘신학지시’의 경험은 이러한 점의 중요성을 양계초에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이때 양계초가 발굴해낸 ‘시계혁명’의 으뜸가는 모델이 바로 황준헌이었는데 신의경과 구풍격을 조화시킨다는 원칙에 잘 들어맞는 모범으로 꼽은 것이 그의 「오늘날의 이별(今別離)」입니다. 양계초는 이 시에 대해 이렇게 평한 바 있습니다:

황준헌의 시집에는 뛰어난 작품이 적지 않다. 특히 「오늘날의 이별」 네 수는 한번이라도 그의 문집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모두들 가장 먼저 외워 암송한다. 진백엄陳伯嚴은 역사에 빛날 빼어난 작품이라고 극찬했는데 아마도 공론일 것이다.……마침내 세상에 이 시편들을 유통시키니, 나는 이러한 인연과 이러한 공덕으로 시계천국詩界天國이 탄생하길 바란다.(「음빙실시화」 제29조)

그러면, 「오늘날의 이별」 첫 수의 전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별하는 심정은 바퀴와 같아,
순식간에 천 번 만 번 굴러가네.
내달리는 바퀴를 보고 있노라면,
마음속 수심은 더해만 가지.
그 옛날에도 산과 강은 있었고,
그 옛날에도 수레와 배는 있었건만.
그 수레와 배는 이별을 싣고 가더라도,
가고 멈춤이 자유로웠지.
요즈음의 배와 수레는
이별의 수심을 돋우기만 한다네.
순간의 경치조차
미련을 허용치 않네.
시간 맞춰 종소리 울리면
일분 일초도 기다려 주지 않는구나.
거대하고 무거운 조향타를 달고서도
부드럽게만 운항하네.
어찌 역풍이 없으랴마는,
뱃길 막는다는 석우풍石尤風도 두려워 않네.
당신을 전송하고 채 돌아오기도 전에
당신은 저 먼 하늘가에 도착하겠지요.
멀어지던 그림자 홀연히 사라지고,
아득히 파도만 넘실거리네.
떠나갔네, 이렇게 순식간에,
돌아올 때도 머뭇거리지 않겠지요?
바라건대 돌아올 때는,
경기구 타고 얼른 오시길.
*
別腸轉如輪, 一刻旣萬周. 眼見雙輪馳, 益增中心憂. 古亦有山川, 古亦有車舟. 車舟載離別, 行止猶自由. 今日舟與車, 倂力生離愁. 明知順臾景, 不許稍綢繆, 鐘聲一及時, 頃刻不少留. 雖有萬鈞柁, 動如繞指柔. 豈無打頭風, 亦不畏石尤. 送者未及返, 君在天盡頭. 望影倏不見, 烟波杳悠悠. 去矣一何速, 歸定留滯不. 所願君歸時, 快乘輕氣球.(「음빙실시화」 제29조; 황준헌, 『인경려시초人境廬詩草』 권6)

* 위 번역은 설순남의 번역에 자구 상 약간의 수정을 가한 것입니다.

이 시는 과연 새로운 감수성과 시대의식을 구현하고 있으면서도 시의 맛을 잃지 않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헤어진 님을 그리워하는 것은 중국시의 오랜 전통 가운데 하나지요. 그 가운데 근대적 감수성이라고 할 만한 것이 절묘하게 녹아 들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증기선, 기차, 기구 등의 새로운 탈것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관념을 크게 변화시켰다.
(「흥판철로興辦鐵路」, 『점석재화보』, 1884)

이런 그림-글을 접하는 사람은 아마도 비행선을 타는 사람에 버금가는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었으리라. 비행선을 그야말로 날개 달린 ‘배’로 그려놓은 것이 재미있다.
(「비선궁북飛船窮北」, 『점석재화보』, 1888)

양계초가 시계혁명을 제기했던 초기에 강조한 또 하나의 방향은 장편시가입니다. 황준헌의 「스리랑카의 와불상」에 대한 양계초의 찬사가 갖는 의미에 관해서는 앞에서 이미 이야기한 바 있는데요, 새로운 시에 남성성과 서사성이 구현되기를 희망했다는 점을 확인해 둡니다.

그런데 이처럼 전통적 시의 범주 속에서 그것의 변혁을 다각도로 타진하던 양계초에게 ‘노래’가 발견됨으로써 이전까지의 모색은 일거에 무색해집니다. 양계초는 1902년 11월에 『신소설新小說』을 창간하면서부터 황준헌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 잡지에 ‘잡가요雜歌謠’라는 난을 마련해 가사체 운문을 싣기 시작하지요. 가사체 운문이 애국심의 고취에 상당한 효용성을 갖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양계초의 사유 속에 시와 가요는 다른 범주에 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양계초가 ‘노래’를 부각시켜 ‘시’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것은 얼마 후, 『신소설』 첫 호에 실었던 황준헌의 「출군가出軍歌」가 「군중가軍中歌」, 「선군가旋軍歌」로 이어지는 「군가」 3부작의 일부라며 「음빙실시화」를 통해 전편을 소개하면서입니다. 다음에 인용하는 그의 발언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중국 사람들에게 상무정신이 없는 것은 그 원인이 아주 많지만 음악이 곱고 부드럽기만 한 것도 그 이유 가운데 하나로, 이는 근세의 식자들이 모두 언급한 바다. 옛날에 스파르타 사람들이 포위를 당하여 아테네에 구원을 요청했다. 아테네 사람들이 애꾸눈에 절름발이인 학교 선생을 그들에게 보내자 스파르타 사람들은 의아해 했다. 전선으로 파견되어간 이 선생은 군가를 지어주었고, 스파르타 사람들은 그것을 부르며 용기백배하여 결국 승리를 거두었다. 소리가 사람을 이토록 깊이 감동시킬 수 있으니 대단한 것이다. 우리 중국에는 일찍이 군가라 할만한 것이 없었다. 한 둘 있었다면 두보의 「출새出塞」 전후 편 정도, 많지 않다. 더욱이 이 마저도 사람을 분발․진작시키는 기운은 결여하고 있다. 이는 조국 문학의 결점일 뿐만 아니라 또한 국운의 성쇠와도 관련이 있는 바다. 예전에 황준헌의 「출군가」 네 절을 읽고서는 미친 듯 기뻐하였다. …… 그 정신이 웅장하고 활발하며 드넓고 깊음은 말할 필요도 없고 이러한 수사 또한 이천 년 동안 없었던 바, 시계혁명의 능사는 이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다. 내가 한마디로 정리해 말하건대, 이 시를 읽고서 일어나 춤추지 않는 자는 남자도 아니다.(「음빙실시화」 제54조)

앞서 살펴보았듯, 양계초는 새로운 어구의 적절한 구사를 통해 새로운 사유방식과 새로운 시대정신을 적절히 표현해 내면서도 전통시가 가지고 있던 특별한 ‘맛’을 잃지 않은 시계혁명의 모범적인 예로 일찌기 황준헌의 「오늘날의 이별」를 꼽으며 이러한 작품을 통해 ‘시계천국詩界天國’이 형성되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또한 양계초가 「스리랑카의 와불상」을 추켜세웠던 것은 고착화되어 있던 시의 장르적 특성을 극복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가늠해 보려는 시도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제시한 모범들이 일순 같은 작자의 상대적으로 투박하고 우악스러운 그리고 대단히 선동적인 군가 가사에 의해 대체되어 버린 것입니다. 「출군가」의 제1절을 보도록 할까요:

사천 여 년의 오랜 나라,
우리의 온전한 땅일세.
이십세기엔 누가 주인이더냐?
우리들 천지신명의 후예들이지.
보아라 무수한 황룡깃발 춤추는 것을.
울려라, 북소리, 울려라!

四千餘歲古國古, 是我完全土. 二十世紀誰爲主? 是我神明冑. 君看黃龍萬旗舞. 鼓鼓鼓!(「음빙실시화」 제54조)

물론 「군가」에 대한 위와 같은 칭송은 과장과 전도顚倒의 수사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소설을 혁신하는 것이 한 사회의 모든 부문을 혁신하는 데 관건이 된다라고 설파한 것과 마찬가지지요. 이러한 수사는 오래된 범주/개념의 타개와 새로운 가능성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고무적일 수 있지만 그러한 수사를 추동한 힘, 즉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모종의 열망은 결국 새로운 운문의 설자리를 상당 부분 축소시키고 맙니다.

「군가」를 ‘발견’한 양계초가 신식 창가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03년에서 1904년 무렵으로, 중국의 학당 창가를 선도한 주요 인물인 심심공沈心工(1870~1947)․증지민曾志忞(1879~1929)의 활동에 주목하면서입니다. 이들은 모두 일본 유학생들로, 함께 ‘음악강습회’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법학을 공부하던 증지민은 1903년에는 도쿄음악학교에 입학합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장쑤성江蘇省 출신 유학생들이 꾸리고 있던 『장쑤』 잡지에 「악리대의樂理大意」(제6호)와 「창가 교수법과 설명(唱歌之敎授法及說明)」(제7호) 등의 논문을 발표했고 이와 함께 「연병練兵」, 「춘유春游」, 「양자강揚子江」 등의 노래를 실었습니다.

이듬해 양계초는 증지문이 도쿄음악학교에 입학한 것을 치하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작년에 학생 모군이 도쿄음악학교에 입학하여 음악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나는 이를 데 없이 기뻤다. 국민의 품질을 개조하고자 한다면 시가와 음악이 정신 교육의 한 요체가 될 것임은 약간의 식견이 있는 자라면 알 수 있는 것이다. …… 대개 명나라 이전에는 문학가들이 많은 경우 음률에 통달하여, 아악이나 희곡을 막론하고 대부분 사대부가 주관하였으니, 비록 어쩌다 쇠미해져도 천박하고 비속함이 아주 심한 정도에 이르지는 않았다. 본조本朝에 들어온 이래로 음율의 학문을 사대부들이 더 이상 돌보지 않게 되어 선왕들의 음악에 의한 교화는 이에 전적으로 교방敎坊 배우들의 손에 맡겨지게 되었다. 유럽 문명사를 읽어보면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문학가의 은혜를 입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중국의 문학가들의 경우 국민에게 어찌 터럭만큼의 영향이라도 주었다고 하겠는가? 그 이유를 따져보면 시와 음악이 분리되었던 소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시, 사詞, 산곡散曲 세 가지가 모두 줄줄이 늘어놓은 골동품이 되었으니 문학가는 참으로 사회의 버러지가 되어 버렸다. 요사이 『장쑤』 잡지를 읽어보니 중국의 음악을 개량해야 한다는 견해를 거듭 펴고 있다. 제7호에 이미 군가와 학교가 몇 곡의 악보를 실었는데 그것을 읽어보고는 책상을 치며 감탄하였으니, 이야말로 중국문학 부흥의 선구로다.(「음빙실시화」 제77조)

양계초는 읊는 운문으로서 나름대로의 미학을 발달시켜온 전통적인 시, 사, 산곡을 일거에 부정하며 그것을 짓는 이들을 사회의 ‘버러지’라고까지 칭하고 있습니다. 중국문학 부흥의 관건은 새로운 노래, 구체적으로 새로운 군가와 학교 창가에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이러한 주장은 황준헌의 「군가」를 ‘시계혁명’의 최고치로 추켜세운 것이 그러하듯 과장의 수사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 수사 속에서 그 동안 새로운 시의 가능성을 다각도로 탐색하던 그의 고민은 무화되고 말지요. 부강하고 영광스러운 국민국가에 대한 믿음을 정서적 차원에서 환기시키는데 아주 용이한 ‘노래’가 ‘시’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새로운 감수성과 시대의식을 복잡한 미학적 장치들을 통해 구현할 새로운 시에 관한 사유는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난 것입니다. 이러한 구도는 결국 근대 중국에서 기존의 ‘문文’ 질서가 무너지면서 근대적 문학 체계로 재편되는 과정에 깊숙이 개입하는 욕망, 그 중심에 자리하는 원리가 부강한 중국에 대한 열망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양계초는 모든 시가 노래가 될 것을 요구한 데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특정한 내용을 노래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가 황준헌의 「군가」를 시계혁명의 최고치로 선언했음은 이미 살핀 대로입니다. 『장쑤』에 실린 것을 비롯하여 증지민 등이 지은 노래 역시 ‘구국’과 ‘계몽’의 소망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지만 권학의 내용부터 일상적 덕목의 강조, 과학적 지식의 소개, 여성 권리의 구가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다양한 내용을 노래했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양계초가 시계혁명으로 포섭하고자 한 창가는 주로 군가나 직접적으로 부강한 중화를 노래한 것들이었습니다. 그가 「시화」를 통해 소개하고 있는 창가는 증지민이 유치원생 용으로 지은 「까마귀(老鴉)」가 효성을 노래하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드러내놓고 내셔널리즘을 구가하는 것들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황준헌의 근작으로 소개하고 있는 「소학교학생상화가小學校學生相和歌」도 그 내용에 있어 예외가 아닙니다. 이 가운데 양계초 자신이 가사를 쓴 「애국가」를 우선 보도록 하겠습니다. 양계초는 요코하마橫濱의 화교 학교인 대동학교大同學校에서 자신이 쓴 「애국가」에 곡을 붙이자 무척 고무되어 악보와 함께 「음빙실시화」에 소개합니다. 원래 사용된 기보법은 기독교 선교사들이 들여온 것으로, 숫자와 기호를 사용하여 음높이와 길이 등을 표시하는 이른바 ‘간보簡譜’로 되어 있는데 밑에는 오선보로 옮겨보았습니다.*

* 간보를 오선보로 옮기는 작업은 하가영이 도왔습니다.

넓디넓은 우리 중화
가장 큰 대륙의 가장 큰 나라,
스물 두 개 성省이 한 집안을 이루었네.
물산이 풍부하기로는 세상에 으뜸,
하늘의 곳간이라 해도, 힘있는 나라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네.
보지 못했는가,
영국과 일본은 그저 섬 세 개로도 우뚝 일어섰거늘,
하물며 당당한 우리 중화야.
우리들의 단체를 결성하고
우리들의 정신을 진작시켜,
이십 세기 새로운 세계에서
힘차게 날아오르니 누가 겨루리?
사랑스럽다, 우리 국민이여!
사랑스럽다, 우리 국민이여!

(泱泱哉我中華! 最大洲中最大國, 卄二行省爲一家. 物産腴沃甲天地, 天府雄國言非誇. 君不見, 英日區區三島尙崛起, 況乃堂堂吾中華. 結我團體, 振我精神; 二十世紀新世界, 雄飛宇內疇與倫? 可愛哉我國民! 可愛哉我國民!) 「음빙실시화」 제119조.

4/4박자의 전형적인 행진곡 풍인 이 노래에 대해 양계초는 곡조가 “웅장하고 강건하다”라고 평했습니다. 이 곡은 한때 양계초의 영향력과 함께 널리 유포되어 중화민국 초기까지 국가 대용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스스로 가사를 지은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이 노래는 양계초가 구상한 새로운 창가의 방향을 집약적으로 보여주지요. 이 노래의 중심에는 크고 부강한 중화에 대한 희망이 담겨 있습니다. 담겨 있을 뿐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구구절절 그러한 희망의 반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내셔널리즘은 무조건적인 것으로 영국과 일본으로 대표되는 저 ‘작은’ 나라들이 “우뚝 일어섰거늘”(崛起 ! 최근 들어와 많이 듣지요…) 우리라고 못할소냐 하는 패기로 충만해 있지요. 이러한 패기는 필연적으로 타자에 대한 강한 배제를 내포하는 바, 이 노래에서는 그것이 은폐되어 있지만,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역시 양계초가 가사를 쓴 것으로 ‘아아음악회亞雅音樂會’의 첫 연주회에서 소개된 「황제가黃帝歌」의 제1절과 제4절을 보겠습니다:

<제1절>
밝게 빛나는 우리 시조, 이름은 헌원軒轅,
곤륜산에서 내려오셨네.
북으로는 흉노족을 남으로는 묘족苗族을 몰아내셨지.
전장을 치달리며,
다른 종족을 몰아내고 주권을 정초하시어
우리 자손들에게 물려 주셨네.
아! 우리 자손은 시조의 영광을 잊지 말지어다!

赫赫我祖名軒轅, 降自崑崙山. 北逐獯鬻南苗蠻, 馳驅戎馬間. 掃攘異族定主權, 以貽我子孫. 嗟我子孫無忘無忘乃祖之光榮!(「음빙실시화」 제120조)

<제4절>
끊임없이 계승된 우리 시조, 이름은 헌원,
후손 가운데 영웅과 호걸이 많으니,
진시황과 한무제 그리고 당태종,
온 천하에 서슬 퍼런 위세를 떨치었네.
오늘날까지도 백인들은 황인종이 일으킬 환란을 말하며
듣는 이는 안색이 바뀐다네.
아! 우리 자손들은 시조의 영광을 더욱 드높이세!

繩繩我祖名軒轅, 血胤多豪俊. 秦皇、漢武、唐太宗, 寰宇威棱震. 至今白人說黃禍, 聞者顔爲變. 嗟我子孫發揚蹈厲乃祖之光榮!(위와 같음)

황제黃帝는 중국에 문명을 가져온 전설적인 군주들인 ‘삼황오제’ 가운데 한 명으로 국민국가를 사유하기 시작한 당시 중국 지식인들이 내셔널리즘을 선양하기 위한 상징적 인물로 많이 언급했으며 이들은 ‘황제기원黃帝紀元’을 사용해서 연도를 표기하기도 했습니다. 황제 이야기는 타자에 대한 폭력적 배제와 구축을 강하게 암시합니다. 황제는 동이족의 수령이었다고 짐작되는 치우蚩尤를 물리치고 중원에 화하족華夏族, 즉 한족漢族의 나라를 세운 제왕으로 알려져 있지요. 노래의 서두에 구가되듯 그는 북으로는 흉노족을 그리고 남으로는 묘족을 몰아낸 제왕이기도 합니다. 제4절에 오면 전설 시대의 황제는 역사상으로 안으로는 통합을 이루고 밖으로는 흉노를 구축한 것으로 잘 알려진 세 명의 제왕으로 대체됩니다. 그리고 결국 흉노와 묘족으로 대표되는 ‘타자’들은 백인종으로 대체되지요. 당시 구미에는 장래 황인종이 일으킬 환란, 즉 ‘황화黃禍’에 대한 두려움이 광범위하게 조장되어 있었습니다. 중국을 바라보는 서구인들의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의 한 양상이라고 해야 할 터인데, 현실적으로 미국인에서는 중국인 이민노동자들을 핍박하는 빌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양계초는 이를 뒤집어 이를 통해 중화의 영광을 송양합니다. 백인종은 결국 황제 혹은 진시황․한무제․당태종과 같은 강력한 지도력에 의해 일으켜 세워진 중화의 서슬 퍼런 위세에 굴복하게 되고 말리라는 희망을 구가한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결국 현실의 좌절과 자기 비하에 대한 관념상의 역전일 뿐이었습니다. ‘중화’ 주체로서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 그 뒤편 저 깊은 곳에는 결국 ‘내 안’의 오리엔탈리즘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 주체는 ‘중국(동양)―여성’을 타자화하는 저 서구의 시선을 의식합니다. 그리고 곱고 부드럽기만 한 옛 시와 음악을 부정하고 강건한 새 시대의 노래를 희망하는 가운데 자신을 바라보는 그 ‘서구―남성’과 닮은 자신을 상상하는 것이지요. 새로운 시를 구상하는 주체의 근저에 있는 이러한 욕망은 이미 장편시가에 대한 칭송에 내재했던 바이지만 창가에 대한 입장에서 그것은 극단적인 형태로 드러납니다.

창가에 대한 수사학적 부추김 속에서 새로운 시의 가능한 방향에 대한 세심한 고려가 무화되었듯, 새로운 노래가 선양하는 노골적인 내셔널리즘 속에서 같은 시기 양계초의 논설이나 학술적인 논문이 보여준 중국과 아시아 그리고 나아가 세계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보다 풍부하고 세심한 고찰은 간 데 없어지고 맙니다. 이쯤 되면 그가 구상한 새로운 ‘문학’․새로운 시는 인식과 성찰의 도구로서의 역할은 박탈당하고 말며 오로지 눈먼 선동의 그릇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시계혁명’은 양계초를 위시한 근대 중국의 개혁가들이 전환의 시대 속에서의 정체성의 혼란을 어느 정도 극복하고 근대적 국민국가 창출의 주체로서 스스로를 세우는 과정, 부강한 국민국가를 상상해 나가는 과정과 맞물려 있습니다. 이들의 부강한 국민국가 건설의 꿈은 한편으로는 위대한 ‘중화’ 재건의 꿈이기도 하지요. 그에 상응하는 시계혁명은 그렇기에 신학지시에서 나타난 혼란상을 극복하고 ‘시국詩國’을 재건하고자 하는 희망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옛 중화의 세계를 부정하고 해체하는 타자를 성급히 닮음으로써 ‘중화’ 주체를 다시 세우기를 희망했던 기획이 허망한 것이듯, 창가에 대한 수사 속에서 ‘시국詩國’을 재건하려는 희망 역시 무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오랜 시의 나라 중국에서는 20세기에 들어와 ‘모든 시는 군가가 되라’는 수사가 큰 힘을 발휘하는 가운데 다양한 감수성을 표현해내고 세계에 대한 성찰을 담아내는 ‘시’는 위축되는 상황이 거듭 나타납니다. 20세기 중국에서 ‘시’는 애국창가, 항전가요, 혁명가요, 선전가요의 거센 흐름 속에 꺼질 듯 꺼질 듯 깜박이는 반딧불 같은 존재였습니다. 어디 시뿐입니까? 대중의 애환을 반영하는 가요도 시시로 금기시 되었지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러한 현상에 나름의 이유가 있었음을 부정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국민국가의 노래들이 그랬듯, 20세기 중국의 ‘군가’들은 나름대로 존재이유가 있었습니다. 억압에 대해 저항하는 힘의 원천이 되었던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로 인한 다양성의 말살은 두렵습니다. 「야래향夜來香」*이나 ‘초패왕의 노래’와 공존하기를 거부했던 그것들이 또 얼마나 많은 억압과 배제를 낳았는지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 「야래향」은 만주국 태생으로 중국인 행세를 했던 일본인 여가수 이향란李香蘭 즉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의 1940년대 히트곡이다. 상해를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었지만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가수의 성분과 노래의 퇴폐성이 비판 대상이 되어 금지곡이 되었다. 1978년 이후 개혁개방과 더불어 등려군鄧麗君의 리바이벌곡을 통해 다시 중국 인민들에게 알려졌다; ‘초패왕의 노래’는 대중에게 사랑 받았던, 경극을 비롯 중국 고전 악극에서 불리던 노래들을 범칭한다. 「초패왕 항우, 우미인과 이별하다(覇王別姬)」는 중국 고전 악극의 인기 있는 레퍼토리 중 하나로 ‘사면초가’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항우와 우미인의 사별을 다루고 있다. 문화대혁명 기간, 고전 악극과 그 배우들을 ‘봉건시대의 잔재’로 규정하여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상황이 영화 『패왕별희』에 잘 묘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