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李贄-분서焚書 <장횡거의 《역설》 서문張橫渠易說序, 代作>

<장횡거의 《역설》 서문張橫渠易說序, 代作>[1]

장횡거(張橫渠)선생은 오랫동안 제자들에게 《역경》을 강론했다. 그러던 중 ‘두 정(程)선생’[二程][2]이 《역경》에 대해 논한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두 정선생은 《역경》의 도를 깊고 밝게 깨우치셨는데, 나는 그렇지 못하다”라고 말하더니, 강론하던 자리를 용감하게 폐하고 ‘그동안 고수해오던 자기의 견해를 바꾸어’ 두 정선생의 견해를 따랐다. 그는 이처럼 용감했다. 나는 선생이 그동안 고수해오던 자기의 견해를 한꺼번에 바꾼 이것이야말로 바로 《역경》과 통한다고 생각한다.

진대(晉代) 사람들은 《역경》에 대해 논할 경우 항상 세 마디로 개괄했다. ‘쉽고 간략하면서 천하의 이치를 얻는다’[易簡而天下之理得]라고 했다. 이 ‘쉽고 간략함’[易簡]이 《역경》의 첫번째 요지이다. 또한 ‘시대가 변해도 바뀌지 않는다’[不易乎世]라고 했다. 이 ‘바뀌지 않는 것’[不易]이 《역경》의 두번째 요지이다. 또한 ‘일정한 형태로 고정되지 않고 변화하며, 천지와 사방에 두루 통용되어, 전형적인 것이 없이 오직 변화에 따라서 이에 맞게 적응할 뿐이다’라고 했다. 이 ‘바뀌는 것’[變易]도 또한 《역경》의 세 번째 요지이다.[3]

지극히 간략하기 때문에 쉽고, 바뀌지 않기 때문에 깊고, 바뀌기 때문에 신묘하다. 비록 세 마디로 말했지만, 사실은 하나의 이치이다. 깊으면 신묘하지 않은 것이 없고, 신묘하면 바뀌지 않는 것이 없다. 선생이 빠르게 바뀌는 것이 마치 손바닥을 뒤짚듯 쉬우니, 어쩌면 그리 신묘한가! 그러므로 나는 선생의 이 점이 바로 《역경》과 통한다고 생각하여, 《역설》(易說)의 서문을 쓴다.(권3)

<張橫渠易說序, 代作>

橫渠先生與學者論《易》久矣,後見二程論《易》,乃謂其弟於曰:“二程深明《易》道, 吾不如。 ”勇撤皋比,變易而從之,其勇也如此。吾謂先生即此是《易》矣。晉人論《易》,每括之以三言:曰易簡而天下之理得。是易簡,一《易》也。又曰不易乎世。是不易,一《易》也。又曰變動不居,周流六虛,不可為典要,惟變所適。是變易,又一《易》也。至簡故易,不易故深,變易故神。雖曰三言,其實一理。深則無有不神,神則無有不易矣。先生變易之速,易如反掌,何其神乎!故吾謂先生即此是《易》矣。作《易說序》。


 [1] 장횡거는 송대 이학자 장재(張載, 1021~1086)를 말한다. 횡거(橫渠, 현재 陝西省 眉縣 소재)에서 학문을 강론하였다.

 [2] 송대(宋代) 성리학의 기틀을 마련한 정이천(程伊川)․정명도(程明道) 형제를 말한다.

 [3] 이간(易簡)․변역(變易)․불역(不易)은 삼역(三易)이라고 부른다. 역의 세 가지 기본 성격을 말하는 것으로 후한시대 정현(鄭玄)의 《역찬》(易贊)과 《역론》(易論)에 “이간이 첫 번째 의의이고, 변역은 두 번째 의의이고, 불역은 세 번째 의의이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이 세 가지가 《역경》의 성격을 규정하는 세 틀이다. 본문에서 진대(晉代) 사람이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다만 위나라 초기의 현학자 왕필(王弼)의 역학사상이 한 대의 상수역(象數易)을 반대하면서 이러한 세 가지 의의를 현학적으로 재구성하였다. 그리고 이 왕필의 역학사상을 동진(東晉) 때의 한강백(韓康伯)이 이어 받는다. 그도 왕필과 마찬가지로 왕필의 역학을 발전시켜 상수역을 반대하면서 《역경》을 무형의 이치로 해석하는 의리역(義理易)을 제기하였다. 아마도 왕필에서 한강백으로 이어지는 의리역의 해석틀을 이지가 지적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