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李贄-분서焚書 <전국시대를 논한다戰國論>

<전국시대를 논한다戰國論>

나는 《전국책》(戰國策)을 읽고 유자정(劉子政)[1]이 하잘 것 없다는 것을 알았다. 춘추(春秋)시대 다음이 전국(戰國)시대이다. 전국시대, 즉 ‘여러 나라 사이에 전쟁이 끊임없던 시대’가 되어서 저절로 ‘전쟁에 참여하는 나라들의 전쟁에 이기기 위한 책략’[戰國之策]이 있게 되었다. 정세의 추이에 따라 그것은 필연의 길이었다. 세상이 그렇게 되었으니, 춘추시대의 통치술로 통치할 수 없는 것은 명백하다. 하물며 삼왕[2] 시대의 통치술로 통치할 수 있겠는가![3]

오패[4]가 등장한 것은 춘추시대 때의 일이다. 오패는 왜 유독 춘추시대에 흥성했는가? 그 때 주나라 왕실은 이미 쇠미해져, 천자는 예악(禮樂)을 제정하고 정벌을 집행하는 권한을 가지지 못하고 제후를 호령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제후 중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방백(方伯)⋅연수(連帥)가 제후들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고, 서로 천자를 존중하자는 취지의 동맹을 맺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천하의 형세가 다시 하나로 합해졌던 것이다. 이는 마치 부모가 병들어 누워 집안 일을 돌보지 못함으로써, 여러 작은 형제가 다투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되자, 그 중 현명한 아들이 스스로 집안을 돌보는 존재로 나서서 결국 부모의 임무를 맡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명목상으로는 형제지만 사실은 부모이다. 설령 부모의 권한을 침범한다 해도, 사실상 부모가 이에 의지하여 편안하고, 형제가 이에 의지하여 화목하고, 좌우의 시종․하인 등 여러 사람이 이에 의지하여 질서가 잡히게 된다면, 그 집안을 위해서 아주 큰 수고를 하는 것이다.

관중(管仲)은 제나라 환공(桓公)을 보좌하여 환공이 첫번째로 패자(覇者)가 되게 했다. 이로부터 오패가 차례로 나타나서, 돌아가며 천하의 패자가 되어, 주나라 왕실을 보좌하며 울타리 노릇을 했다. ‘발이 많이 달린 벌레는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는 속담이 있듯, 주나라 왕실이 그럭저럭 이후 240여 년 동안 명맥을 유지한 것은 모두 관중의 공 때문이요, 오패의 힘 때문이다.

제후들이 더 이상 오패와 같은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이에 주나라 왕실을 삼킬 뜻을 품고, 천하를 하나로 합칠 계획을 마음속으로 품게 되었다. 제나라 선왕(宣王)이 하고 싶어 했던 것과 같은 경우이다.[5] 진(晉)나라가 세 나라로 갈라지고,[6] 제나라가 여씨(呂氏)의 나라에서 전씨(田氏)의 나라로 바뀌어도, 이런 하극상 사태를 바로잡을 제후가 없었다. 그리하여 결국 각 나라가 치열한 전쟁을 벌이는 전국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러니 천 리 먼 곳에서라도 모신(謀臣)과 책사(策士)를 모셔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원래 그 시대의 혼란은 결국 하나로 통일되지 않으면 멈추지 않을 형세였다.

유자정은 전한(前漢) 시대의 말기를 맞아, 왕실이 무너지려고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단지 삼왕(三王) 시대의 융성을 부러워하기만 했을 뿐 전국시대가 오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몰랐으니, 그의 소견은 참으로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다. 포표(鮑彪)⋅오사도(吳師道)라는 사람들도 각각 송(宋)나라⋅원(元)나라 말기에 태어나, 그저 남의 의견을 보고 들은 것만으로 가슴을 가득 채우고 인(仁)․의(義) 도덕에 관한 내용으로 귀를 채웠을 뿐이었다. 그들이 구구하게 포폄(褒貶)한 말을 어찌 입에 담을 수 있겠는가? 증자고(曾子固)[7]는 자부심이 적지 않은 사람이다. 모두들 그의 문장은 《육경》(六經)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한다. 그는 유향(劉向), 즉 유자정이 자기를 돈독히 믿지 않은 것과 사악한 설이 올바른 것의 자리를 대신한 것을 비난했다. 그러나 그 역시 《육경》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단지 멋대로 포폄을 통해 세상을 바로잡으려고 한 것으로, 그는 포(鮑)․오(吳) 또한 노(魯)나라⋅위(衛)나라 사람으로 본 것이다.[8]


 [1] 한대(漢代) 유향(劉向)을 말한다. 경학자이고 문학자이며 목록학자이다. 패(沛) 땅 사람이다. 본래 이름은 경생(更生)이고 자정은 자이다. 역시 유명한 경학자인 유흠(劉歆)의 아버지이다. 저서로는 《홍범오행전론》(洪範五行傳論), 《열녀전》(列女傳), 《신서》(新序), 《설원》(說苑), 《별록》(別錄) 등이 있다.

 [2] 삼왕(三王)은 하(夏)나라의 우왕(禹王), 상(商)나라(후기에 殷나라로 개칭)의 탕왕(湯王), 주(周)나라의 문왕(文王)․무왕(武王)(둘을 합칭)을 말한다. 또한 이들이 통치하던 시대를 삼대(三代)라고 한다.

 [3] 춘추시대(春秋時代)와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중국 역사에서 정치적 무질서 시대의 대명사로 지칭된다. 그런데 두 시대의 중요한 차이점은, 정치적 판도로 볼 때, 춘추시대에는 형식적이나마 주나라 천자가 존속했고 천자의 권위가 인정되어, 여전히 주나라 질서가 적용되던 시대였고, 전국시대에는 주나라의 질서 체제가 무너져 약육강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점이다.

 [4] 오패(五覇)는 춘추시대에 한때 대단히 강성해서 천하의 패권을 잡았던 다섯 제후를 말한다. 제(齊)나라의 환공(桓公), 진(晉)나라의 문공(文公), 진(秦)나라의 목공(穆公), 송(宋)나라의 양공(襄公), 초(楚)나라의 장왕(莊王). 일설에서는 진(秦)나라의 목공(穆公)․송(宋)나라의 양공(襄公) 대신에 오(吳)나라의 부차(夫差)와 월(越)나라의 구천(句踐)이 들어간다고 하기도 한다.

 [5] 《맹자》 <양혜왕상>(梁惠王上) 참조.

 [6] 춘추시대에 위세를 떨쳤던 진나라는 내부 귀족의 분열로 인하여 결국 한(韓)․위(魏)․조(趙) 세 나라로 갈라졌다. 이는 제후 및 귀족의 등급을 무시한 최초의 하극상이며, 전국시대의 서막을 여는 사건이 되었다.

 [7] 송(宋)나라의 증공(曾鞏)을 말한다. 자는 자고(子固)이며 건창 남풍 사람이다. 젊은 시절 왕안석(王安石)과 교류하였다. 글을 잘 지었는데 구양수(歐陽修)가 그의 글을 보고 매우 특이하다고 평가하였다. 그는 역사의 고금을 넘나들면서 비평을 하였는데 사마천과 한유의 글도 가늠해 볼 정도였다. 그런데 그 비평의 근본을 육경에 두었다. 저서로는 《원풍유고》(元豊類稿)가 있다. 《송사》(宋史) 권319 참조.

 [8] 《논어》 <자로>(子路)에 “노나라와 위나라의 정치는 형제처럼 닮았다”[魯衛之政, 兄弟也]”는 말이 나온다. 노나라는 원래 주(周) 나라 때 주공(周公)이 책봉받은 지역이고, 위나라는 주공의 아우 강숙(康叔)이 책봉받은 지역이다. 두 나라의 시조가 형제이듯 정치 제도 역시 서로 닮았다는 말이다. 이로부터 ‘노위(魯衛)’라는 말은 형제의 대명사 또는 ‘서로 엇비슷하거나 같은 관계’를 일컫는 말로 쓰인다. 한편 주나라의 법률과 제도를 정비한 주공과 노나라에서 탄생한 공자로 인하여, ‘인의(仁義)를 존중하는 지역 또는 사람’의 뜻으로도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