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李贄-분서焚書 하심은을 논한다何心隱論

<하심은을 논한다何心隱論>

하심은(何心隱)이란 바로 양여원(梁汝元)을 말한다. 나는 하심은을 모른다. 그러니 또한 양여원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래서 일단 심은(心隱)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여 논하겠다.

세상 사람들이 심은에 대해 논하는 것을 보면, 높게 보는 사람이 세 부류이고 불만스럽게 보는 사람이 역시 세 부류이다.

심은을 높게 보는 첫번째 부류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 사람 중에서 자신의 인생을 풍요롭게 하려고 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공(公)은 유독 자신의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공의 집안은 대대로 재산이 넉넉했지만, 공은 관심 밖에 두고 신경쓰지 않았다. 단지 천지 사이에서 일세의 성현과 함께 살려고 했을 뿐이다. 이는 자신의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에 대한 공의 생각이 세상의 보통 사람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공은 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만 목숨을 걸고 이름을 이루려고 했을 뿐이다. 사람은 모두 죽게 마련인데, 그의 경우 백 가지 근심이 마음을 아프게 하고 만 가지 일이 형체를 초췌하게 하여 오장이 갈라지고 찢어지는 지경에 처해서 죽고 싶어도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 이름을 이루지 못해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이든 귀신이 죽이든, 죽는다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무슨 차이가 있는가? 또한 머리를 자르든 장이 끊어지든, 죽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어느 쪽이 더 장쾌하단 말인가? 백 가지 약이 독이 되고, 한 가지 독이 약이 되면, 무엇이 독인가? 장렬하게 죽든 소리없이 사라지듯 죽든, 죽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장렬하게 죽는 것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공은 본래 심사숙고한 것이다. 그러니 공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도 당연하다.”

심은을 높게 보는 두번째 부류는 이렇게 말한다. “공은 공자의 말을 외고 본받은 사람이다. 세상 사람들이 공자를 본받는 것은 공자의 쉬운 점을 본받는 것일 뿐이다. 공자의 도 중에서 어려운 점은 천하를 집으로 삼으면서 집을 가지지 않는 것에 있고, 집이나 전답을 천명으로 삼지 않고 많은 현인들을 천명으로 삼은 것에 있다. 그러므로 동류 중에서 특히 뛰어나 우뚝 솟은 사람이 될 수 있었고, 만물 중에서 첫머리에 오른 사람이 될 수 있었고, 노(魯)나라의 유일한 한 사람 유자(儒者)가 될 수 있었고, 천하의 유일한 한 사람 유자(儒者)가 될 수 있었고, 만세의 유일한 한 사람 유자(儒者)가 될 수 있었다. 공은 홀로 공자의 어려운 점을 실천했던 사람이다.

그가 남보다 가장 먼저 드러난 것도 이 때문이요, 그가 가장 먼저 남의 노여움을 산 것도 역시 이 때문이다. 공이 어떻게 죽음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 삭적벌목[1]하고, 진(陳)나라에서 양식이 떨어지고,[2] 광(匡)이라는 지방에서 죽을 고비를 당하여 두려움을 느끼는 등,[3] 성인 공자가 거의 죽을 뻔한 것도 여러 차례이다. 그가 죽지 않은 것은 오로지 행운이었다. 다행스럽게 죽지 않으면 사람들은 필시 정의를 위하여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행스럽지 못하여 죽으면 ‘어진 사람․뜻있는 인물은 살신성인(殺身成仁)한다’[4]라고 말하지 않던가! 죽어야 할 때 죽은 것인데, 공이 또한 어찌 사양했겠는가!

공은 죽음을 두려워한 것도 아니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도 아니요, 그냥 그대로 맡겨두었을 뿐이다. 또한 공은 이제껏 이렇게 살아왔는데, 또한 어찌 이렇게 죽지 않겠는가? 공이 죽음으로써 이름을 이루려고 했다는 저들의 말은 사실 틀렸다. 죽은 것은 그저 죽은 것일 뿐이다. 죽음으로써 무슨 이룰 이름이 있다고 공이 그것을 위해 죽으려고 했겠는가?”

심은을 높게 보는 세번째 부류는 이렇게 말한다. “공은 홀로 자기의 길을 갔고, 자신 이외의 누구도 이전에는 없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공자가 비록 성인이라고 하지만, 그를 본받으면 효빈[5]의 꼴이 되고, 학보[6]의 꼴이 되어, 추한 여인의 천박한 꼴이 된다고 생각하여, 공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공은 “세상 사람들이 나의 소행에 대해 들으면 매우 괴이하게 생각하고, 당장 나를 죽이려고 분기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가 이미 먼저 그렇게 했다는 것은 전혀 모른다. 어쨌든 나로서는 공자를 본받는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 ‘내 방에 들어와 내 창으로 나를 찌르려는 사태’[7]는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공을 의심하고, 현명하지 않은 사람은 공을 음해하여, 공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 끝내 없었다. 결국 공 역시 불행하게도 도를 위하여 죽었다. 세상 사람들은 충효(忠孝)와 절의(節義)를 위해서 죽는 일이 있다. 이로 인해 죽어서도 그 이름이 남게 되기 때문이다. ‘태산(泰山)보다 무거운 죽음’이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도를 위해 죽는다는 것은 아직 듣지 못했다. 도는 본래 이름이 없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죽는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제 공은 죽었다. 나는 공이 죽은 이후 끝내 그 이름이 인멸되어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게 될까 염려된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 무창(武昌) 근처에는 사람이 수만 명이었다. 그런데 공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또한 공이 억울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때 한창 거리마다 온통 방을 내붙여 공의 죄상을 나열할 때, 모여들어 보던 사람들이 모두 그 거짓을 지적했고, 심지어 한숨쉬고 질타하며 차마 보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이로써 그 당시 사람들의 속마음을 알 수 있다.

기문(祁門)으로부터 강서(江西)에 이르기까지, 또한 강서로부터 남안(南安)을 거쳐 호광(湖廣)에 이르기까지, 지난 길이 3천여 리인데, 모든 사람들이 공의 얼굴은 모르되 공의 마음은 알고 있었다. 3천여 리 길 모든 사람들이 그랬었다. 단지 장상[8]에게 죄를 얻어 장상에게 유감있는 사람들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직에 큰 공을 세웠다고 깊이 믿는 사람들도 역시 이번 일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고, 모두 ‘공을 죽여서 장상에게 아첨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 도(道)가 자리잡고 있는 것은 마치 하늘에 떠 있는 해․달․별과 같아, 덮어버릴 수가 없다. 비록 공의 죽음을 무어라고 정의할 수 없다 하나, 사람들의 마음이 이와 같은 것은 이 도가 그렇게 만든 것이니,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공이 어찌 정말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겠는가! 공이 곤경에 빠졌을 때, 장자방(張子房)같은 사람이 없었으니, 누가 항백(項伯)을 살린 것처럼 그를 살릴 수 있었겠는가?[9] 그리고 노(魯)지방의 주가(朱家)같은 사람이 없었으니, 누가 계포(季布)를 벗어나게 한 것처럼 그를 벗어나게 할 수 있었겠는가?[10] 이로 인해 나는 도를 말하는 사람들이 거짓임을 더욱 믿게 되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자면, 그 때 노여움을 머금고 공은 억울하다고 외치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예전에 공을 한 번이라도 만나거나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그저 앉아서 공의 죽음을 쳐다보면서 도리어 돌까지 던진 사람들은 하나같이 공의 밑에 모여들어 학문을 강론받았던 제자들이다.

이를 통해,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은 거짓이 없기 때문에 그 본심을 감추지 못하고, 도가 어쩌고저쩌고 입에 담는 사람들은 진실이 없기 때문에 특출한 무리를 반드시 제거해 버리려고 한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다. 세상에 진실로 도를 말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공이 죽은 것은 결국 이로써 사문(斯文)을 잃게 된 것이다. 공의 죽음이 어찌 무겁지 않단 말인가! 어찌 단지 태산에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이상의 세 가지 견해는 그나마 보통 사람들과 진실을 함께 할 수 있었던 이 세상의 현인 군자들이 심은을 높이 평가한 내용이다.

심은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인륜(人倫)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그런데 공은 그 중 네 가지를 버렸다. 그러면서 자신은 스승⋅친구⋅현인⋅성인의 삶을 살아간다고 자부했다. 이는 너무 외곬로만 치닫는 것이어서, 가르침으로 삼을 만한 것이 없다.”

“윗사람과는 화기애애하게 말하고 아랫사람과는 카랑카랑 강직하게 토론하는 것[11]이 융통성있게 세상을 사는 도이다. 그런데 공은 홀로 남들에게 거슬리는 말과 행동으로, 스스로 그 허물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공이 아무리 현명하고 지혜롭다 한들 자신을 보호하지 못한 것이다.”

“도란 사람의 본성에 뿌리를 두는 것이요, 배움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평이함이다. 너무 어려운 것으로 사람을 옭아매려고 하면 반발하는 사람이 반드시 많아지고, 길에서 사람을 꾸짖으면 집안에 있는 사람도 편안하지 못하며, 사람을 재물로 모으면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이 다투어 일어난다. 그의 죽음은 애초에 그 스스로 불러들인 것이다.”

이상의 세 가지 견해는 세상의 학자들이 심은을 비난하는 내용이다.

나는 이런 것은 논할 것도 못된다고 생각한다. 단지 입을 것․먹을 것만 넘보고 제 몸과 제 입만 제일 먼저 생각하는 세상의 용렬하고 저속한 사람들이 도가 무엇인지 배움이 무얼 하는 것인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감히 제멋대로 헐뜯고 비방한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 사람들의 말을 어떻게 입에 담을 수 있겠는가!

심은을 높게 본 사람들이 역시 아무래도 거의 진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너무 지나친 감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그의 모습을 직접 보았거나, 또는 그의 의론을 앞에서 직접 듣고 그가 배운 바를 상세히 살펴본 적도 없었으니, 갑작스레 내가 허물을 논한다는 것 또한 말이 되지 않는다.

나는 그저 임시로 내 생각을 말할 뿐이다. 앞으로 만의 하나 이 세상에서 공을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나는 공이 ‘밖으로 드러난 용’[見龍]의 자리에 있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깊이 잠겨 있지 않고 종일 밖에 나타나 있으면 필시 ‘항’(亢)[12]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공이 죽음에 이른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항’의 자리에 있어도 용은 용이다.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용이 ‘항’의 자리에 있지 않으면 ‘상구’(上九)는 빈자리이다. 자리를 비울 수 없다면 용은 ‘항’의 자리에 있지 않을 수 없다. 오직 공이 홀로 이 한 ‘효’(爻)에 해당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공은 ‘상구’의 대인(大人)이라고 할 수 있다. 심은에 대한 나의 의견은 바로 이것이다.(권3)


 [1] 삭적벌목(削跡伐木)에서 ‘적’(跡)은 ‘적’(迹)으로도 쓴다. 《장자》 <양왕>(讓王)에서 “공자는 노(魯)나라에서 두 번 쫓겨나고, 위(衛)나라에서 쫓겨나 자취를 감추고[削跡], 송(宋)나라에서 나무를 하며[伐木] 살았었다”라고 말한 내용이 나온다. 그래서 삭적벌목(削跡伐木)은 ‘일자리를 얻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다’ 또는 ‘세상을 피하여 은거하다’ 등의 뜻으로 쓰인다.

 [2] 《논어》 <위령공>(衛靈公) 참조.

 [3] 《논어》 <자한>(子罕) 참조.

 [4] 《논어》 <위령공>(衛靈公) 참조.

 [5] 효빈(效顰)은 ‘얼굴 찡그리는 것을 그대로 따라 하다’라는 말로, ‘좋고 나쁜 것도 가리지 못하고 무턱대고 남을 따라 하다’라는 뜻의 성어이다. 옛날 천하 최고의 미녀 서시(西施)와 추녀 동시(東施)가 있었다. 하루는 서시가 속이 안 좋아서 얼굴을 찡그리며 길을 가고 있었다. 우연히 이를 본 동시는 ‘아! 저것이 바로 아름답게 보이는 비결이구나!’라고 생각하고, 항상 얼굴을 찡그리고 다녔다. 그 추한 모습이 역겨워 동네 사람들은 온통 문을 닫아걸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가족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간 사람도 있었다. 이 고사에서 나온 성어가 동시효빈(東施效顰)으로, ‘효빈’은 그 준말이다. 《장자》 <천운>(天運) 참조.

 [6] 학보(學步)는 한단학보(邯鄲學步)의 준말로, 《장자》 <추수>(秋水)에 나온다. 옛날 중국 조(趙)나라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아주 멋있어서, 이웃 나라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연(燕)나라 수릉(壽陵) 지방의 몇몇 소년들이 조나라 사람들의 멋진 걸음걸이를 배우고 싶어서 조나라의 수도 한단으로 갔다. 오가는 사람들의 걸음을 관찰하며, 열심히 그대로 따라해 보려고 애를 쓰다, 결국 조나라 사람들의 걸음걸이도 배우지 못하고, 원래 자기들의 걸음걸이도 잊어버려서, 기어서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래서 한단학보는 ‘무턱대고 남을 모방하려다가 자기 것마저 잊어버리다’라는 뜻의 성어로 쓰인다.

 [7] 원문은 ‘입실이조과’(入室而操戈)이다. 《후한서》(後漢書) <정현전>(鄭玄傳)》에 나오는 말이다. 당시 임성(任城)과 하휴(何休)가 공양학(公羊學)을 좋아하여, 《공양묵수(公羊墨守)》(公羊墨守)․《좌씨고황》(左氏膏肓)․《곡량폐질》(穀梁廢疾) 등을 저술하자, 정현(鄭玄)은 그들의 이론을 근거로 도리어 그들을 반박하는 글을 썼다. 그러자 하휴는 “그가 내 방에 들어와, 내 창을 들고 나를 찌르는구나!”라고 하며 탄식했다. 이로써 ‘입실조과’(入室操戈)라는 말이 ‘상대방의 이론을 근거로 도리어 상대방을 공격하다’라는 뜻의 성어로 쓰인다.

 [8] 장상(長相)은 당시의 재상 장거정(張居正)을 말한다.

 [9] 항백(項伯)의 이름은 전(纏)으로, 항우(項羽)의 계부(季父)이다. 장자방, 즉 장량(張良)은 유방(劉邦)의 최고 참모 중의 하나였다. 유방이 먼저 진(秦)의 수도 함양(咸陽)을 점령하고, 항우가 뒤늦게 함양에서 멀지 않은 홍문(鴻門)까지 도착했다. 군사력은 우세였지만 명분에서 밀렸던 항우 측이 아예 유방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자, 항백이 이 사실을 은밀히 장량에게 알렸다. 군사력의 열세에서 살아날 방법을 장량과 논하던 유방이 항우의 계부인 항백을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를 보이므로, 장량은 “진나라 때 저와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습니다. 한 번은 그가 살인죄를 저질렀는데, 제가 그를 살려 준 적이 있지요”라고 대답했다. 《사기》 <항우본기》(項羽本紀) 참조.

 [10]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다툴 때, 계포(季布)는 항우를 위해 싸워, 여러 차례 유방을 곤경에 빠트렸다. 유방이 천하를 차지하여 고조(高祖)로 등극하면서, 거액의 현상금을 걸고 자기를 여러 번 곤경에 빠지게 했던 계포를 잡게 했고, 누구든 계포를 숨겨주는 자는 삼족을 멸하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다. 이 때 노(魯) 지방의 주가(朱家)가 계포의 능력을 아까워하여, 삼족이 멸할 형벌을 마다 않고 계포를 데리고 있다가, 기회를 보아 유방에게 말함으로써, 계포를 등용하게 했다. 《사기》 <계포열전>(季布列傳)》 참조.

[11] 《논어》 <향당>(鄕黨) 참조.

[12] 《역경》에서 여섯 개의 효(爻)가 모두 양인 괘가 ‘건’(乾)卦이다. 여섯 개의 양의 효 중에서 가장 위에 있는 것을 ‘상구’(上九)라고 한다(예를 들어, 여섯 개의 효 중에서 가장 위의 효가 음이면 ‘상육’(上六)이라고 하고, 가장 아래의 효가 양이면 ‘초구’(初九)라고 하고, 세번째 효가 음이면 ‘삼육’(三六)이라고 하고……이와 같이 가장 위는 ‘상○’, 가장 아래는 ‘초○’, 중간의 두 번째부터 다섯 번째까지는 ‘이○’ ~ ‘오○’라고 한다). ‘건’ 괘의 상구의 자리를 ‘항’(亢)이라고 하고, 효사(爻辭)는 ‘항룡유회’(亢龍有悔)이다. 그 풀이를 보면, ‘귀하되 지위가 없고, 높되 따르는 백성이 없고, 현자가 그 밑에 있으되 보좌하지 않아, 하는 것마다 후회가 있다’이다. 그래서 이 ‘항’의 자리는 ‘이전의 왕조가 자리를 잃으며, 이후의 왕조가 물려받는 징조’로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