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루몽》과 해석 방법론- 《홍루몽》의 특수 독자와 《홍루몽》의 해석 4-4

3. 신홍학 시기의 지연재 비평 연구

2) 비평가의 신분과 비평의 권위 설립

(3) 위핑보의 망설임: ‘비평가의 의도’와 ‘작가의 의도’의 구분

《홍루몽변》을 완성했을 때 위핑보는 지연재라는 인물의 존재를 전혀 몰랐고, ‘작자 스스로 비평과 주석을 붙였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당시 그는 고증의 바탕으로 삼을 만한 다른 자료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비평 자체에 의지하여 비평가의 신분을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홍루몽》 제18회에는 다음과 같은 비평이 있다.

요즘 속담에 “천 명의 군인을 양성할지언정 극단 하나를 양성하지는 않는다.”고 했으니, 배우들을 양성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리라. 한 극단에서 어떤 사람의 기예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낫다면 이 사람이 위세를 부리면서 온갖 악행을 저질러도 주인은 내쫓지도 못하고 꾸짖지도 못하며, 예뻐하지 않고 싶어도 실제로는 예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내가 배우들을 많이 겪어 보았는데 모두들 다 그러했다. 예전에 극단을 두고 있는 여러 세가 형제들과 얘기하는 도중에 이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모두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얘기하지 못했다. 이제 《석두기》에서 “원래 주인공 역할이 아니면 한사코 하지 않으려 했다.”는 구절을 읽으니 그가 재주를 믿고 다른 이들을 억압하며 악랄하게 질투하는 모습이 페이지 가득 선명하다. 그리고 “이향원에서 정담을 나누다”라는 회에 이르니 더욱 사실 그대로 묘사하고 있어서 30년 전에 내가 목격하고 겪었던 인물들이 종이 위에 나타났다. 《석두기》가 감정을 지극히 묘사하고 말을 지극히 확실하게 쓰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런 감정에 미혹되어 본 적이 없다면 이것을 보고 막연히 밀랍을 씹듯 되풀이 읽는다 하더라도 그 신묘함을 모를 것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같은 비평에 대해 위핑보가 《홍루몽변》과 《홍루몽연구》에서 달리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홍루몽변》에서 그는 주로 이 비평을 이용하여 비평의 연대와 비평가의 신분을 확정했다. 즉 비평의 연대는 (갑) 청나라 건륭 중엽이고, (을) 정고본이 간행되기 이전이라고 했다. 비평가의 연대에 대해서는 “비평가는 응당 조설근과 동시대 사람이지만 연배가 조금 늦은 사람일 터”인데 “결국 우리는 이것은 《홍루몽》에 대한 아주 초기의 비평과 주석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홍루몽연구》가 출판되었을 때 그는 지연재가 《석두기》의 비평을 한 일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전(1922년 4월)에 위핑보는 집에서 배우를 양성하는 일을 토대로 비평가가 건륭 중엽 물질적으로 풍요로웠던 시기의 인물이라고 추론하면서, 비평에서 ‘30년 전’이라고 한 것은 “비평을 하기 30년 전, 그가 이 책을 읽지 않았던” 때라고 풀이했다. 사실 이런 해석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비평에 분명히 “30년 전에 내가 목격하고 겪었던 인물들이 종이 위에 나타났다.”고 한 것은 소설 《홍루몽》에서 묘사한 인물과 비평가가 30년 전 현실의 삶에서 만났던 인물이 대단히 유사하다는 얘기이지, 30년 전에 비평가가 《홍루몽》을 읽은 적이 없다는 뜻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위핑보는 비평의 내용을 오해했기 때문에, 또한 그가 비평의 시간을 정고본 이전으로 정했기 때문에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즉 “어쩌면 30년 전에는 《홍루몽》의 필사본조차 없었을지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비평가는 응당 조설근과 동시대 사람이지만 연배가 조금 늦은 사람일 터이다.” 그러다가 1950년 10월 28일에 이르러 그는 관련된 장절(章節)의 내용을 수정했는데, 어쩌면 이 착오를 발견했기 때문에 앞서의 주장을 완전히 삭제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사유 방식도 완전히 달라졌다. 집에서 배우를 양성하는 일은 당시 비평가가 적어도 20살이 되었음을 의미하고, ‘30년 전’과 비평가가 비평을 쓰던 30년 후를 대비하면 당시 비평가는 적어도 50세가 되는데, 다만 조설근은 겨우 40세까지만 살았다. 그러므로 이른바 지연재는 대개 작자와 동시대 사람이긴 하지만 배분은 조금 빠른 사람이라는 것이다.

위핑보가 이전과 이후에 내린 두 가지 결론을 비교해 보면 비평가와 작자가 ‘동시대’ 사람이라는 관점은 일관되지만, 그 사이에 ‘항렬이 조금 늦다’는 것과 ‘배분이 조금 빠르다(높다)’라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위핑보의 추론 근거는 단지 하나의 비평 문장일 뿐이지만 사실 그는 이미 작자와 비평가가 조설근 동일인이라는 견해를 부정하고 있으며, 그런 관점은 거의 30년 동안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작자와 비평가가 동일인인지 여부가 중요한 이유는 비평가의 신분이 비평에 대한 학자들의 신뢰도에, 즉 비평의 가치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홍루몽연구》(1952)가 출판되기 전에는 비평가의 신분에 관해서 주로 후스의 주장과 저우루창의 주장이 있었는데, 위핑보는 비평을 운용하여 뒤쪽 30회를 연구했기 때문에 자연히 비평의 신뢰성 문제를 회피할 수 없었다.

지연재가 누구인가 하는 의문은 해결할 수 없다. 어떤 이는 조설근의 친척 형제라고 했다가 나중에 작자 자신이라고 했고(이것은 후스의 주장임: 인용자), 혹자는 작품에 등장하는 사상운이라고 하는데(이것은 저우루창의 주장임) 감히 정말 그렇다고 믿지 못하게 만든다.

비평가가 사상운이라는 주장에 대해 그는 ‘감히’ 믿지 못하겠다고 밝히면서도 논증을 하지는 않았다. 위핑보의 작업은 주로 자신의 분석을 통해 ‘작자와 비평가, 가보옥이 동일인’이라는 후스의 주장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비평에 대한 위핑보와 후스의 논의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으니 바로 다른 비평가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지연재의 신분에 주의를 집중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가장 큰 분기점은 후스가 지연재를 작자와 동일시하는 데에 비해 위핑보는 별개의 사람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비평가 문제를 간단히 만들어 버리는 경향이 뚜렷하다. 지연재와 작자가 동일이든 두 사람이든 간에 여전히 기홀수와 ‘여러 사람들[諸公]’의 비평을 못 본 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위핑보가 중시했던 비평만 놓고 보더라도 비평을 한 사람이 지연재인지 기홀수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아마 논의할 부분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이부판은 이 비평을 기홀수가 쓴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데에 비해, 위잉스는 그것이 “결코 조씨 집안의 인물이 자기 집안의 일에 대해 쓴 것이 아니라” 돈민[敦敏]이나 돈성[敦誠]이 쓴 것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위핑보의 작업이 의미 있는 것이었다. 비평가의 수가 몇이냐는 문제와 비평가와 작자를 구분하는 문제 사이에서 분명히 후자가 상대적으로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작자와 비평가를 구분하는 것은 비평의 가치를 평가하는 일과 연관된다. 비평이 작자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그 비평은 작자의 권위를 매우 중시하는 연구자에게는 무상의 권위를 갖기 때문이다. (본서의 결론을 참조할 것.)

사실상 신홍학 연구자들은 거의 모두 ‘작자 중심의 평론가(author-centered critics)’였다. 비평을 작자 본인이 쓴 게 아니라면 비평의 내용은 그저 한 비평가의 의견을 대표할 뿐이다. 비평가가 작자와 아주 친밀한 관계라 하더라도 비평가의 뜻이 결국 작자의 뜻과 같은 수는 없는 것이다. 이 또한 위핑보가 반복적으로 강조한 점이기도 하다.

둘째, 비평에 대한 단순한 연구라면 작자와 비평가를 구분하는 큰 문제가 우선이고 비평가의 수는 그런 구분을 하고 난 뒤의 부차적인 작업이니 작자 문제와 연관시키지 않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위핑보는 비평가의 나이로 작자와 비평가를 구분함으로써 실질적으로 비평의 권위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다. 소설의 본문과 비평이 한 사람에게서 나온 게 아니라면 당연히 논자는 비평을 금과옥조로 떠받들 필요가 없다. 후스의 관점에 따르면 지연재의 뜻은 작자의 뜻과 같지만, 위핑보가 보기에 지연재와 작자의 뜻은 사실상 동등할 수 없다.

이 작품은 비록 후반부의 잃어버린 부분을 모은 것이지만 자료는 모두 ‘지연재 비평’을 토대로 했다. 그런데 지연재 비평과 작자의 의도 사이에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가? ……우리는 당연히 ‘지연재 비평’을 중시해야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그대로 작자의 뜻을 대표하는 것 또한 그것을 지나치게 중시했다는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홍루몽변》에서 《홍루몽연구》에 이르기까지 위핑보는 항상 지연재와 작자를 구분했다. 하지만 나중에 그는 다시 비평 속에 작자 스스로 붙인 부분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경향이 생겼다. 1954년에 《신건설(新建設)》에 발표한 〈《홍루몽》 간론(簡論)〉에서 그는 《홍루몽》 제25회의 비평을 언급했다. 본문은 소홍(小紅)의 일을 서술하면서 “어느새 하루가 지나갔다[眼前過一日].”라고 되어 있는데, 그에 대한 비평은 다음과 같다.

반드시 “어느새 하루가 지나갔다.”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임홍옥(林紅玉)이 ‘일각을 견디는 게 여름 한 철처럼 느껴졌음’을 반대로 묘사한 것이다. 아는가?必云‘眼前過一日’者, 是反襯紅玉‘挨一刻似一夏’也, 知乎?

여기서 ‘아는가?’라는 말의 어투가 위핑보의 의혹을 크게 자극했다.

그가 ‘아는가?’ 하고 말한 것은 마치 우리에게 ‘아는가?’ 하고 묻는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또 어찌 아는가? 아주 이상한 일이다. 나는 근래에 지연재가 바로 조설근의 가명이 아닐까 상당히 의심스러워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작자가 작품을 쓸 때의 심리를 옆에 있는 사람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는 또 “지연재 경진본 제22회의 ‘산목자구(山木自寇)’, ‘원천자도(源泉自盜)’라는 구절 아래 모두 주석이 있는데, 이는 작자 스스로 붙인 것”이며, “이 글(가보옥이 쓴 〈부용여아뢰[芙蓉女兒誄]〉를 가리킴: 인용자)에 대해 지연재 경진본에 주석이 있는데, 이 역시 작자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홍루몽》 간론〉은 전문적으로 비평을 다룬 글이 아니라 그저 간단하게 자신의 관점을 제시한 것일 뿐이다. 위핑보의 관점은 《지연재홍루몽집평(脂硯齋紅樓夢輯評)》의 〈인언(引言)〉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 글에서 그는 지연재의 신분에 대해 재차 거론했다. 즉 “비록 지연재가 누구인지는 단정할 수 없지만 ‘지평재 비평’의 일부 비평과 주석은 그 정황과 어투로 볼 때 작자 자신이 쓴 것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경진본의 비평 하나를 예로 들었다.

《홍루몽》 제26회 본문: 가보옥은 곧 그와 요긴하지도 않은 한담을 조금 나누었다.[那寶玉便和他說些沒要緊的散話.]
경진본의 두 줄로 된 비평: 너무나 절묘하다! 하물며 가보옥이 진지하게 할 얘기가 어디 있겠는가? [妙極是極, 況寶玉有何正緊[經]可說的.]
두 줄 비평 아래 다시 두 줄로 된 비평: 이 비평은 작자에게 속은 것이다.[此批被作者偏[騙]過了.]

위핑보는 이 두 줄로 된 비평이 갑술본과 경진본, 유정본에 모두 보이므로 진짜 ‘지연재 비평’이지 후세 사람이나 소장자가 덧붙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여기서 본문 아래의 두 줄 비평은 지연재 비평이라고는 하지만 결코 지연재 비평이 아니며, 그 아래에 또 있는 두 줄 비평이 진짜 지연재 비평이다. 작자가 이미 주석을 붙인 데에 지연재나 다른 사람이 다시 비평을 하면서 원래 비평의 아래쪽에 쓴 것이다.” 다만 위쪽 비평이 행간이나 서미(書眉)에 적히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위핑보도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쨌든 이 작은 글씨로 적힌 비평은 이른바 ‘지연재 비평’이라는 것에 확실히 작자가 직접 쓴 글이 포함되어 있으며 또한 지연재 비평과 구분되지 않고 섞여 있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고 결론을 내렸다.

위핑보의 견해는 표면적으로 후스의 관점과 어느 정도 가까운 듯하지만 실제로 그는 결코 후스처럼 극단적이지 않다. 그의 전체적인 견해를 자신의 말로 개괄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문제(지연재는 누구인가?)에 답하는 것은 증거 결핍으로 무척 곤란하다. 지연재가 조설근의 가명인지 여부도 나는 감히 말할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른바 진짜 지연재 비평에 작자가 직접 쓴 문장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지연재가 바로 조설근이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후스와 마찬가지로 위핑보도 비평 가운데 어느 부분이 작자가 직접 쓴 것이고 어느 부분이 지연재의 비평인지 구별하려고 시도한 적은 결코 없다.

비평가의 신분과 비평의 가치 사이의 관계에 대해 위핑보는 후스에 비해 더 높은 통찰력을 갖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일찍이 “비평과 주석이 반드시 원래부터 훌륭하지는 않았을 테고 또한 잘못된 말도 아주 많았고,”(1922년 4월 〈뒤쪽 30회의 《홍루몽》) “그 가운데는 극히 중요한 비평도 아주 많지만 전혀 상관없는 내용도 있으니, 책을 펼쳐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1931년 6월 19일, 〈지연재 비평 《석두기》 잔본[殘本]에 대한 발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또한 비평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과 비평가의 신분 사이에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지연재홍루몽집평》의 〈인언〉에는 비평에 대한 그의 태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두 단락의 글이 들어 있다.

1. 위에서 나열한 세 번째 문제(지연재는 누구인가? 기홀수는 누구인가? 지연재와 기홀수는 동일인인가 다른 사람인가?)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답변은 이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어쨌든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는 얘기하지 못하지만 이 비평들을 신뢰해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가운데 일부는 작자 스스로 붙인 비평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작자와 가장 가까운 친척에게서 나왔기 때문이다. 어느 측면에서 평가하든 간에 결국 대단히 가치가 높다고 할 수밖에 없다.

2. ‘쓴 사람[寫者]’과 ‘시기[年月]’의 각 측면에서 볼 때 이 지연재 비평에 대해서는 모두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렇긴 해도 위핑보의 태도는 대단히 신중하다. 그는 결코 지연재 비평을 맹목적으로 신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비평과 주석이 작자의 뜻을 100% 대표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평 가운데는 화습인을 칭찬한 항목이 아주 많다. 예를 들어서 제19회의 협비(夾批)에서는 그녀를 ‘효녀이고 의녀(義女)’라고 했고, 제21회의 두 줄로 된 비평에서도 그녀를 ‘현숙한 여자[賢女子]’라고 한 것 등등이다. 위핑보는 이것이 《홍루몽》 본문과 상응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제77회를 증거로 들었다. 이 회에서는 청문(晴雯)이 쫓겨나자 가보옥은 화습인이 몰래 흉계를 꾸민 게 아닐까 의심하는 듯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위핑보는 여기에 “불만의 뜻이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아예 문투에서 화습인이 청문을 몰래 해쳤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견해에 재론의 여지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첫째, 원문에서 가보옥의 말투는 그저 의심할 뿐이지 “화습인이 청문을 몰래 해쳤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는” 것은 아니므로 위핑보의 의심 정도는 지나치게 과대하다. 둘째, 원문의 말은 단지 가보옥의 관점일 뿐인데 위핑보는 가보옥의 뜻을 작자의 의도와 동일시하는 흔적이 뚜렷하다. 위핑보는 독자들에게 비평가의 뜻이 작자의 뜻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라고 하면서도 이야기 속의 인물(가보옥)의 뜻이 작자의 뜻과 동일한 것은 아니라는 점은 생각하지 않았다. 여기서 위핑보가 자서전설이라는 선입견의 영향을 받아 이런 자세한 구별을 소홀히 했다면 그건 유감스러운 일이다.

어쨌든 위핑보는 화습인의 예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냈다. “이러니 지연재 비평을 《홍루몽》 본문과 똑같이 평가하거나 더 나아가 지연재 비평을 갖고 이 본문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나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지연재 비평에 대해) 중시하는 것은 괜찮지만 지나치게 중시해서도 안 된다.” 결국 위핑보가 보기에 지연재 비평은 본문과 거의 비슷한 위치를 얻을 수는 있지만, 또한 본문과 지연재 비평 사이에는 여전히 ‘거리’가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본문에 대한 독자의 해석이 비평가의 해석과 충돌한다면 비평가의 견해는 결국 부차적인 지위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실제 비평을 진행할 때 위핑보는 비평의 내용들을 어떻게 운용했는가? 여기서는 두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첫째, 《홍루몽》에서 해석자에게 매우 중시되는 것은 ‘창작 의도’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위핑보 자신의 견해가 있다. 그는 《홍루몽》이 비록 종족과 정치, 사회 등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지만 주요 대상은 가정이며, 그 가정에서 중요한 인물은 가보옥과 금릉12차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전기’를 쓴 ‘작자의 의도’를 뒷받침할 어떤 증거가 있는가? 위핑보는 갑술본 《홍루몽》 제2회의 미비를 인용했다.

아마 저자는 사실 형제의 슬픔과 형제의 위세 때문에 이 규방 부녀자들의 전기를 지었을 것이다. 蓋作者實因鶺鴒之悲, 棠棣之威, 故撰此閨閣庭幃之傳.

그런 다음 그는 “간단히 말해서 《홍루몽》의 창작 의도는 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로 보건대 그는 비평가가 ‘작자의 의도’를 장악하고 있었다고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예는 1952년에 그가 《홍루몽변》(1923년 출판)을 수정하여 《홍루몽연구》를 출판할 때 〈뒤쪽 30회의 《홍루몽》〉에서 경진본 제42회의 총평을 인용한 것이다.

‘차(釵, 설보차)’와 ‘옥(玉, 임대옥)’은 비록 이름은 두 개이지만 사람은 한 몸이니, 이는 허구적 문장[幻筆]이다. 이제 작품이 제38회에 이르렀을 때 이미 3부의 1 남짓 지나 버렸다. 그러므로 이 회에서는 두 사람을 합쳐서 하나로 만든 것이다. 임대옥이 죽은 후 설보차에 대해 서술한 문장을 보면 내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釵玉名雖二個, 人卻一身, 此幻筆也. 今書至三十八回時已過三分一有餘. 故寫是回使二人合而爲一. 請看代[黛]玉逝後, 寶釵之文字便知余言不謬矣.

위핑보는 이 비평을 무척 중시했다.

1. 이것은 제42회의 마지막 총평으로서 척료생 판본에는 없는 것이지만 특별히 중요하다.

2. 이것은 《홍루몽》을 읽는 새로운 관점이다. 설보차와 임대옥은 200년 동안 애정의 판도에서 유명한 원수지간이라는 것이 모두들 똑같이 이야기하여 깰 수 없는 생각이었는데 뜻밖에 작자는 두 미인을 하나로 합치려 했다. 지연재 선생은 뒤쪽 문장을 인용하여 증거로 삼았는데, 아마 임대옥이 죽은 후 설보차가 틀림없이 대단히 상심했을 것이다. 그가 “내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확실히 작자의 뜻임을 알 수 있다.

위핑보는 왜 이 비평을 중시하는가? 바로 비평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확실히 작자의 뜻”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는 〈“수이홍군방개야연(壽怡紅群芳開夜宴)” 도해(圖說)〉에서 ‘두 미인이 하나로 합치됨[兩美合一]’에 대해 부연하면서 “《홍루몽》에서 설보차와 임대옥을 고상하게 일컬어 ‘쌍절(雙絶)’이라고 하는데 작자가 재능이 뛰어나다 할지라도 우열을 가리기 어렵고, 다정한 공자(公子, 가보옥) 또한 ‘더 헤아려 봐야[還要斟酌]’ 한다고 했으니, 어찌 혼자 쏟은 사랑을 나란히 핀 두 송이 꽃의 열매로 옮긴단 말인가!”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차대합일설(釵黛合一說)’이다. (1954년의 ‘《홍루몽》 사건’에서 이 주장은 많은 이들의 비판 대상이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홍루몽 문제 토론집》 제1~3집을 참조하기 바란다. 그러나 위잉스와 우샤오난[吳曉南]은 이 견해를 지지했다.) 그 연원을 따져 보면 설보차와 임대옥이 둘 다 빼어나서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는 주장은 사실 지연재 비평에서 비롯되었다. 이 예를 통해서 지연재 비평과 작자의 의도가 《홍루몽》의 해석과 맺고 있는 밀접한 관계(즉 위핑보의 말처럼 “《홍루몽》을 읽는 하나의 새로운 관점”이다), 그리고 지연재 비평에 대한 위핑보의 신뢰 정도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