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세 도시 기행-중세의 도시로 4

새로운 도시의 탄생

루유(陸游)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송대 도시의 경관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정비된 것이었다. 일반 서민의 주거는 여전히 작았고, 도시 내에는 슬럼도 있었다. 이것은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다. 지금은 이층이나 삼층 건물이 늘었지만, 그럼에도 서민의 집은 크지 않다.

송대가 되자 궁전과 관청, 사원과 같이 공공적인 성격이 강하고 그만큼 큰 건물이 지어졌다. 이것이 당에서 송으로 걸친 전란과 변동의 와중에 탄생한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서술한 대로다. 당에서 송에 걸친 변화는 근대중국의 형성에서 중요한 일이었지만, 이것은 도시의 변화 가운데서도 보여지는 것이었다. 이 동란의 시기가 끝났을 때, 도시도 다시 변신해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이 서민의 활약의 무대가 된 도시인 것이다. 그런 도시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역사의 흐름을 보면서 중세 도시의 형성과 경관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중국에서 도시의 외곽을 장식한 것은 성벽이었다. 성벽이 있어야만 도시이고 국가였다. 중국인은 나라조차도 성벽으로 둘렀다. 만리장성이 그것이다.

중국의 도시는 거대한 성벽으로 장식되었다. 그것은 옛날부터 내려온 축성법이었다. 고대 중국의 도시는 ‘국(國)’이라는 글자가 보여주고 말해주는 대로였다. ‘혹(或)’이라는 자는 ‘구(口)’와 ‘일(一)’ 획을 ‘과(戈)’ 자로 감싸듯이 해서 만들어진 문자이다. 곧 사람과 토지를 ‘창(戈)’으로 지키는 모양으로, 이것만으로도 ‘국(國)’이라는 의미가 있다. 무기로 사람과 토지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의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혹(或)’이라고 읽게 된 것이고, 이 글자에 ‘심(心)’을 붙여, ‘혹(惑)’이라고 읽게 되었다고 한다. ‘중(中)’ 자의 ‘구(口)’는 그리스의 아크로 폴리스에 해당한다는 설도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혹(或)’의 주위를 다시 큰 ‘口’로 둘러싼 것은 외곽의 존재를 보여주는 것도 되어, 상당히 재미있는 글자 해석으로 이어진다.

한자 논쟁은 차치하고라도 중국의 도시가 거대한 성벽으로 계속 둘러싸여 왔다는 사실은 역사가 보여주는 것이다. 아직도 정저우(鄭州)에는 은나라 시대의 거대한 성벽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이것은 시대와 함께 크게 변화해 왔다. 시대의 추이와 함께 이전보다도 한층 정비된 것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당의 창안(長安)이 그러하다. 창안은 제국의 수도에 걸맞게 한층 더 단정한 형태를 가진 성벽도시로서 출현했다. 하지만 이 성벽도 결코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이 장대하고 위엄이 충만한 외성도 실은 벽돌로 덮여 있지 않았다. 원래라면 판축(板築)이라는 방법으로 흙과 진흙을 다져 그 표면을 벽돌(磚)이라는 큼지막한 연와(煉瓦)로 굳힌 것이었겠지만, 이것이 시행되지 않고 진흙 벽(泥壁)이 드러난 그대로였다.

그렇게 하는데 막대한 비용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바 요시노부(斯波義信, 1930~ )가 사료를 모아 송대의 평균적인 축성 비용을 산출한 적이 있다. 주위가 10리 이내, 약 5.5킬로미터 정도 되고 높이가 3장(丈), 약 9미터 전후의 견고한 성벽을 쌓는 데, 십여 만에서 십오 만 관(貫)의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노동력도 연인원 100만 명 정도가 필요했다고 추정된다. 이것은 대단한 비용이다.

남송말에 관광지로서 이름이 높은 구이저우(桂州), 곧 구이린(桂林)의 성벽이 자주 수리되었다. 이미 서술한 바와 같이, 지도도 남아 있고, 비용과 그 나머지 것들을 합쳐서 암벽에 새겨놓았다. 비용이 막대했던 것은 사람과 돌, 나무, 벽돌, 석회, 기와 등이 대량으로 필요했던 데다 쌀과 소금 등의 소비도 상당량에 달했기 때문이다. 성벽의 건설이라는 것은 진정 대사업이었던 것이다.

돈의 가치

돈을 짊어지다(《바이사 송묘(白沙宋墓)》(1957년)에 수록).

성벽 건설의 비용이 얼마 정도였을까? 여기서 잠시 돈의 가치를 생각해 보자. 주요한 유통 화폐는 동화(銅貨)였다. 금과 은의 사용도 있긴 했지만, 일반 서민의 경우 동화였다. 기본은 동전 1매(枚)가 1전(錢), 곧 1문(文)이었다. 전 1000매가 1관(貫)이었다. 이것은 전 1000매를 끈에 꿰어(貫) 묶었기 때문이다. 전 1000매를 1민(緡)이라고도 한다. 송대의 그림 중에는 이 돈꿰미에 꿴 엽전을 그린 것이 여러 개 있다.

그렇기는 해도 단맥관행(短陌慣行)이라고 불렸던 관습이 있어 도시 속에서 독자적인 비율이 쓰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실제 환산은 상당히 번거로웠다.

단맥관행이라는 것은 똑같은 전으로도 점포에 따라 환산 비율이 다른 것을 말한다. 곧 정확하게는 전 100매가 100문임에도, 실제로는 이것보다 적은 매수로 100매에 상당하게 하는 방법이다. 게다가 이것은 민간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행하였다.

곧 전 77문으로 100문에 상당하게 하는 것이 관청의 비율이었다. 이를테면, 죠진(成尋)은 사오싱(紹興)에서 전 400문으로 쌀 5말을 샀다. 이것을 관청의 비율로 환산하면, 실제로 지불한 돈은 308문이 된다. 이것이 단맥관행이다. 이것뿐이라면 간단했겠지만, 실제로는 직종에 따라 시가가 달랐다. 《동경몽화록》에 북송의 카이펑의 비율이 소개되어 있다. ‘시중에서는 75문. 생선과 고기, 야채 등의 식료품점에서는 72문. 귀금속점에서는 74문. 보석점이나 하녀를 고용하거나 동물을 구입할 때는 68문. 책방에서는 56문’이 그것이다. 책의 환산 비율이 낮은 게 뭔가 시사적이지만, 어느 것이건 전100문으로 거래되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것은 나의 이해를 초월한다. 매일 약간의 돈을 가지고 살아야만 했던 카이펑의 시민이었다. 그들은 수중의 돈을 유효하게 사용하기 위해, 비율을 머릿속에 입력하고 물건을 샀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런 식으로 일상생활을 해나가야 했다면, 나는 송대의 도시에서 살아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식품을 300문 정도 사고, 책방에서 400문 정도 썼다고 한다면, 전부 700문이 되지만, 실질적으로 사용한 돈은 식품에는 216문, 책값으로는 224문이 되어, 전부해서 동전 440매가 된다. 이것은 부피가 커진다. 잠깐 장을 보러 간다고 해도 동전 1000매 정도가 된다. 이것은 필자의 물가 감각이 송대의 감각에 맞지 않는 탓이기도 하다. 실제로 동전 20문(文)이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잔할 수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동전을 100매건 200매건 가지고 나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마찬가지로 괴로운 것이다. 1매로 몇 전에 해당하는 동전도 나왔지만, 그렇다고 해도 꽤 많은 수가 필요했을 거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게다가 시대가 내려가면 동전의 질이 나빠졌기 때문에 그런 것도 동전의 가치와 관련이 있다. 송대 사람들은 무거운 동전을 가지고 복잡한 비율 계산을 하면서 일상을 살아갔던 것이다. 상업이 발전하는 가운데 그런 불편이 해소된 것도 있으니, 머지않은 장래에 지폐가 등장했던 것이다.

관료의 급료

이 문제는 기누카와 츠요시(衣川强)가 상세한 연구를 했다. 그것에 근거해 소개한다면, 송대의 관리는 많은 가족을 부양했다. 단순히 생각해도 양친과 처자라고 하는 가족 구성만으로도 7~8명이 된다. 여기에 미성년의 형제나 친척을 더하면 가볍게 열 명을 넘기게 된다.

이밖에도 그들의 생활에는 많은 연고자가 있었다. 연고를 유지해온 일족과 동향의 사람들, 또는 제자나 유모, 가정교사, 하인과 하녀, 여기에 첩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관료는 송대에는 좀 더 상급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의지해 왔고, 가족은 수십 명이 된다.

유명한 쑤쓰(蘇軾)는 20여 명의 가족과 행동을 같이 했고, 왕안스(王安石)도 수십 명의 가족을 부양하고 있었다. 루유(陸游)도 열 명 정도 부양했다.

수십 명이라는 것은 막연한 것이기에, 20명의 가족으로 생활비를 계산해 보자. 20명이라면 한 달 식비가 북송의 경우 6관 전후가 되었다. 이것은 쌀값만으로, 여기에 고기나 생선, 야채와 같은 부식비를 더하면 30명으로 15관 전후가 되는데, 게다가 이것은 최저 생활비였다. 이것을 왕안스의 예로 본다면, 그가 지방의 현 지사였을 적의 봉급이 제 수당을 포함해 30관의 월봉을 받았다고 추정되기에, 엥겔 계수는 50퍼센트가 된다. 곧 급료가 식비로 절반이 날아가 버린다.

당연하게도 생활비는 부족했다. 최하급 사대부라도 한 달에 100관 전후의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들의 생활 실태를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이다. 유명인으로 필력이 있다면, 책이나 원고료로도 수입을 얻을 수 있지만, 무명에 악필인 관료라면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급료가 적다고 한탄한 그들의 넋두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은가?

이와 관련해 당시의 큰 부자를 묘사해 보겠다. 웨이저우(渭州)의 비단 상인은 연 70만 관의 세금을 납부했고, 화이난(淮南)의 상인은 여행 중에 지폐 수십 만 관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이것은 천문학 적인 숫자이다. 혼자 힘으로 성벽은 물론이고 도시 그 자체를 만들어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송의 성제(城制)(《무경총요(武經總要)》에 수록)

이야기가 빗나갔지만, 이것으로 축성의 비용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만약 축성 비용을 15만 관으로 한다면, 이것은 왕안스 급의 관료 5천 명 분의 월급에 해당하고, 그 배후에 10만 명 정도가 이에 의지해서 생활할 만큼의 돈이라 할 수 있다. 단순한 환산과 비교는 할 수 없지만, 당시의 생활에서 상당히 거액이었던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물론 물가도 단순히 비교할 수는 없다. 당시와 지금의 물가 환산은 다르다. 인건비가 극단적으로 쌌던 당시와 인건비의 폭등이 현저한 지금의 상황도 다르다. 건축의 방식도 오늘과 크게 달랐기 때문에, 이것만 가지고는 헤아리기 어려울 것이다.

부언한다면, 그런 공사가 이권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어느 시대에서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남송대 사람인 류커좡(劉克莊)의 기록에 의하면 라오저우(饒州)의 하급 관리가 성을 수리하는 비용 가운데 3만 관의 전을 쌀로 바꾸고, 그 쌀을 우화(羽化), 즉 벌레가 났다는 것을 핑계로 횡령하여 마침내 그 돈으로 관직을 사고도 많은 돈을 축재했다가 적발되었다. 공공사업에 몰려들어 우글거리는 자들의 모습이 언뜻 엿보이지 않는가?

그리하여 원의 수도였던 다두(大都), 곧 지금의 베이징도 최후까지 판축인 채로 비에 의한 토사 유출을 막기 위해 갈대가 씌워져 있었다는 것은 천가오화(陳高華)가 논한 바이다. 다두에는 그것을 위해 갈대를 베는 부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 사정은 기본적으로는 다음 왕조인 명대에 들어서도 변화가 없었던 듯하다. 베이징의 성벽도 완성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당당한 성벽이 완성되고, 주위를 두터운 벽돌로 두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경과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강남의 도시는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성벽을 완비하고 있었다. 항저우도 그렇고, 쑤저우도 그랬다. 이를테면, 쑤저우가 주위 40리 정도의 성벽을 벽돌로 둘러싼 것은 특히 습윤한 기후에 대처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것은] 도성 건설 기술의 높이와 도시 유지의 경제적 기반의 확실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쑤저우가 그렇게 지켜질 만한 도시였다는 것을 그 자체로 증명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