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李贄-분서焚書 경사구에게 답하다答耿司寇

경사구1)에게 답하다答耿司寇

이번에 이렇게 한 번 가르침을 받았으니, 이제 드디어 진정한 공부를 논한다고 할 수 있으며, 또한 진정한 친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公)은 왜 가르쳐야 하는지 모르면서도 반드시 저를 가르치려고 하시고, 저 또한 왜 배워야 하는지 모르면서도 반드시 공에게 가르침을 구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멈출 수 없는’[不容已]2) 자신의 참된 모습[眞機]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아아! 친구의 도가 끊어진 지 오래 되었습니다. 저는 평소 천고의 세월 동안 군신(君臣)의 관계만 있었을 뿐 친구의 관계는 없었다고 망령스럽게 떠들고 다녔는데, 사실 이 말이 어찌 그렇게 지나친 말이겠습니까?

군주는 용과 같이 턱 밑에 역린(逆鱗)3)이 있어서, 이것을 건드리는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죽음을 무릅쓰고 군주에게 간쟁하는 사람이 줄을 이어 왔으니, 이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죽더라도, 죽음으로써 간쟁했다는 명성이 널리 퍼지게 되니, 이는 뜻있는 사람들 역시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간쟁을 한다고 반드시 죽는 것이 아니라 결국 큰 복을 얻는 경우도 있으니, 어떻겠습니까? 해(害)를 피하려는 마음이 명리(名利)를 추구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럼없이 해가 될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해가 닥치지 않고 큰 이익이 돌아오는 경우도 있으니, 어떻겠습니까?

친구 사이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행히 자신의 충고가 친구에게 받아들여진다 해도 내게는 털끝 만큼의 이익도 없습니다. 불행히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작게는 반드시 다투고, 크게는 원수가 됩니다. 하심로(何心老)4)가 이 때문에 살신(殺身)을 하기에 이르러, 몸은 죽임을 당하고 명성 또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야말로 명백한 타산지석의 예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천고의 세월 동안 친구 관계라는 것이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익이 없다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안색을 붉으락푸르락하면서까지 감히 간쟁하는 것은 항상 군신 관계에서만 볼 수 있을 뿐, 친구 관계에서는 절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무슨 다행인지, 제가 공의 눈에 띄었습니다. 이는 귀한 일입니다. 또한 무슨 다행인지, 공이 저에게 가르침을 주게 되었습니다. 정말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입니다. 즐겁습니다! 유쾌합니다! 공자가 말했던, 나쁜 것을 고치도록 간절하게 권고하는 진정한 친구의 모습5)을 지금 다시 보는 듯 합니다. 어찌 단지 공(公)만이 진정한 친구는 나쁜 것을 고치도록 간절하게 권고하는 법이라는 공자의 교훈을 따르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저 역시 공자의 그 교훈을 따르기를 원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다만 공이 멈출 수 없는[不容已] 것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가리지 않으려는 점에 있고, 제가 멈출 수 없는[不容已] 것은 저의 도(道)를 위해 사람을 사귀고 가벼이 남들과 어울리지 않으려고 하는 점에 있어, 약간 다르다고 느낄 뿐입니다.

공이 멈출 수 없는[不容已] 것은 사람이 태어나서 15세까지 해야 할 일, 즉 <제자직>6)에 나오는 ‘집안에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우애를 다진다’[入孝出弟]는 등의 일이요, 제가 멈출 수 없는[不容已] 것은 15세 이후 성인이 되어 《대학》(大學)을 익혀서 천하에 밝은 덕을 밝히는[明明德於天下] 등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7). 공이 멈출 수 없는[不容已] 바는 넓지만 오직 아픈 곳을 만져주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말단적인 것에 있고, 제가 멈출 수 없는[不容已] 바는 한 가지에 전념하여 그저 저의 눈을 뜨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공이 멈출 수 없는[不容已] 것은 비나 이슬처럼 젖어드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청하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갑니다. 마치 시골 학교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 같아서, 얻는 효과는 적은데 들이는 노력은 엄청납니다. 제가 멈출 수 없는[不容已] 것은 서리나 눈처럼 시리고 준열한 것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공자가 말했듯 저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을 기다린 연후에 팝니다.8) 또한 대장군이 용병하는 것과 같이 곧장 먼저 왕을 사로잡습니다. 따라서 들이는 노력은 적은데 얻는 효과는 큽니다.

비록 이렇게 각각 수단은 다를지라도 멈출 수 없는[不容已] 본심은 같습니다. 마음이 같다면 멈출 수 없는[不容已] 것에 대한 공의 논의도 본래 말이 없는 가운데 서로 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공의 멈출 수 없는[不容已] 것은 옳고 저의 멈출 수 없는[不容已]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리고 공의 멈출 수 없는[不容已] 것은 성인(聖人)의 학문이요 저의 멈출 수 없는[不容已] 것은 이단의 학문이라고 주장한다면, 저는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공의 멈출 수 없는[不容已] 것은 멈춰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반드시 멈추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어서 정말 멈출 수 없는[不容已] 것이고, 저의 멈출 수 없는[不容已] 것은 멈출 수 없는[不容已] 것조차 모르는 것으로, 저절로 멈출 수 없는[不容已] 것이어서 성인 공자의 멈출 수 없는[不容已]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저는 또한 인정할 수 없습니다.

공이 이에 아직도 자기가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병통에 빠져 있을가 염려됩니다. 아직 사람들이 모두 기뻐할 만하지 않은데, 마침내 스스로 옳다고 여기면서 다른 사람들이 이를 옳다고 여기지 않는다고 비난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아직 ‘나라에 있으면 반드시 소문이 난다’[在邦必聞]9)고 할 만하지 않은데, 끝내 믿고 의심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단의 학문을 하여 공․맹의 바른 맥을 따르지 않는다고 비난하며 비웃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제 생각에 공의 멈출 수 없는[不容已] 것이 만약 과연 옳다면, 세상 사람들의 멈출 수 없는[不容已] 것이 모두 옳은 것이요, 만약 세상 사람들의 멈출 수 없는[不容已] 것이 진정 아직 옳지 않다면, 공의 멈출 수 없는[不容已] 것 또한 아직 반드시 옳은 것이 아닙니다. 이는 또한 제가 진정으로 멈출 수 없는[不容已] 것일 뿐입니다. 맞는지 틀리는지 아직 모르겠으니, 한 번 가르침을 바랍니다.

공이 하는 것을 보면, 특별히 다른 사람들과 그리 다를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그렇고, 저 또한 그렇고, 공 또한 그렇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머리 속에 아는 것이 있게 된 이후로 지금까지, 누구나 너 나 할 것 없이 먹을 것을 얻으려고 밭을 갈고, 씨를 뿌리려고 땅을 사고, 편안하게 살기 위해 집을 짓고, 과거에 급제하려고 책을 읽고, 존귀함과 현달함을 추구하며 관직에 몸 담고, 자손에게 음복을 전해주려고 풍수(風水)를 찾아 나섭니다. 갖가지 일용하는 모든 것이 자기 자신과 집을 위해서 계획하고 염려할 뿐, 남을 위해 생각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입을 열어 학문을 논함에 이르면, ‘너는 자기를 위하지만 나는 타인을 위한다’고 하고, ‘너는 자기 자신에게 이롭게 하려고 하지만 나는 남에게 이익이 되게 하려고 한다’고 하고, ‘나는 동쪽 집이 굶주리는 것을 가련히 여기고 또 서쪽 집이 참을 수 없는 추위에 떠는 것을 걱정한다’고 하고, ‘아무개 아무개 등은 문 앞을 나서서 남을 가르치려 하니 이는 공․맹의 뜻이요, 아무개 아무개 등은 남을 만나려고 하지 않으니 이는 자기만을 위하고 자기만을 이롭게 하는 무리[自私自利之徒]10)이다’라고 하고, ‘아무개는 행실이 비록 부지런하지 않지만 남과 선을 행하려고 하고, 아무개 아무개 등은 행실이 비록 매우 부지런하지만 불법(佛法)으로 사람을 해치기 좋아한다’고 합니다.

이로써 보자면, 말하는 것이 반드시 공이 행하는 그대로가 아니며, 행하는 것이 또한 공이 말하던 그대로가 아닙니다. 어찌하여 ‘말은 행실을 돌아보고 행실은 말을 돌아본다’[言顧行, 行顧言]11)는 공자의 가르침과 그리도 다르단 말입니까? 이것이 성인 공자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까? 돌이켜 곰곰히 생각하면, 도리어 저자거리의 소인배만도 못한 일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어떤 일을 하면, 그 입으로 그 일만을 말합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오직 장사하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고, 열심히 농사짓는 사람은 오직 열심히 농사짓는 것에 대해서만 말합니다. 그들의 말은 파고들수록 맛이 있고, 진정 덕이 있는 말이어서, 들으면 들을수록 싫증과 권태를 잊게 됩니다.

‘말은 행실을 돌아본다’는 공자의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 스스로 자식․신하․아우․친구의 도리를 아직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12) 공자가 그렇게 말한 것은 아마 정말로 아직 제대로 하지 못해서였을 것이요, 그저 겸손으로 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오직 이 네 가지만 죽을 때까지 한다 해도, 어찌 다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저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스스로 멈추고 더 이상 나아가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인은 이것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렵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아직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한 것입니다.

실제로 자기가 아직 제대로 하지 못해서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하였으니, 이는 말이 행실을 돌아본 것입니다. ‘나는 아직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말했으면 이는 정말로 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는 행실이 말을 돌아본 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독실하게 실천하고[慥慥],13) 항상 변함없고[有恒],14} 충(忠)과 신(信)을 주로 하고[主忠信],15)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고[毋自欺].16), 진정한 성인이 되었을 따름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온통 자기가 아직 하지 못하는 것은 모르면서 사람들에게 이 네 가지를 하지 못한다고 책하고 가르치려고 하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남에게 요구하는 것은 엄격하면서, 자기가 해야 할 것은 가볍게 여기니, 사람들이 믿으려고 하겠습니까?

성인은 사람들에게 반드시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춰야 한다고 책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모두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양명(陽明)선생은 “거리에 가득한 것이 모두 성인이다”[滿街皆聖人]17)라고 했고, 부처 역시 “마음이 곧 부처요, 사람마다 모두 부처이다”[卽心卽佛, 人人是佛]라고 했습니다.

사람마다 모두 성인이므로 성인은 사람들에게 보여줄 무슨 특별한 멈출 수 없는[不容已] 도리가 따로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말을 하지 않으련다”18라고 했습니다.

사람마다 모두 부처이므로 부처는 일찍이 중생을 제도(濟度)한 적이 없습니다. 중생의 상(相)이 없는데 어찌 남의 상(相)이 있겠으며, 도리(道理)의 상(相)이 없는데 어찌 나의 상(相)이 있겠습니까? 나의 상(相)이 없으므로 자기를 버릴 수 있으며, 남의 상(相)이 없으므로 남을 따를 수 있습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모두 부처라는 것을 친히 보고 선(善)을 남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선을 이미 남과 함께 하니, 어찌 유독 내게만 선이 있겠습니까? 남과 내가 선을 함께 하면, 어찌 한 사람의 선이라도 취하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밭갈고, 벼심고, 그릇 굽고, 고기 잡는 것으로부터 임금이 되는 것에 이르기까지 남으로부터 취하지 않은 것이 없다”19)고 한 것입니다. 후세 사람들이 미루어 암송하며 “이와 같이 남이 선을 행하는 것을 취하면 자기와 남이 함께 선을 행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20)

그러나 순(舜)은 애초부터 이런 식으로 남과 선을 행할 마음이 있지 않았습니다. 만약 순이 선을 남과 함께 하려는 마음이 먼저 있어서 남으로부터 취하였다면, 그가 선을 취한 것은 인위적 의도가 작용한 것으로 필시 정성스럽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지극히 신묘한 것으로, 남과 함께 하려는 인위적 의도가 작용하지 않습니다. 순 역시 필시 남과 함께 하려는 인위적 의도가 작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순은 오직 종신토록 선이 남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자기는 오직 취하였을 뿐입니다. 밭 갈고, 벼 심고, 그릇 굽고, 고기 잡는 사람들에게서도 취하지 못할 것이 없다면, 그밖의 천만 성인과 현인의 선을 취하면 안된다는 말입니까? 왜 꼭 오직 공자만을 배워야만 바른 맥을 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미 사람은 취할 선이 누구에게나 갖추어지지 않은 경우가 없으므로, 나에게는 당연히 줄 만한 선이 없고 가르쳐줄 만한 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자례(周子禮)21)에게 학문 강론을 허락하지 않은 담론 역시 너무 고심한 결과입니다. 그가 유로(柳老)22)의 기를 꺾었다고 하여 유로의 기를 살려주시려는 것이라면, 어찌 이렇게까지 유로를 비호하시려는 것입니까? 또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자례의 논의의 잘못을 덮어주기 위한 것이라면, 어찌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까? 공의 마음씀이 역시 너무 번쇄합니다.

이미 장편의 방대한 책을 세상에 내놓아 유포시키고, 다른 사람에게는 유포시키지 말라고 한다면, 이 무슨 이율배반입니까? 반복하여 자세히 완미해보면, 공의 마음씀이 또한 너무 정직하지 않습니다. 자례는 일찍이 자기의 과오로 생각한다고 스스로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설령 과오가 있어도 그 스스로가 덮어두려고 하지 않는데, 공은 도리어 덮으니, 이는 참으로 무슨 마음입니까? 옛날의 군자는 그 과오가 일식이나 월식과 같아서, 사람들이 모두 바라보고, 이것을 바로잡으면 또한 사람들은 모두 우러러보았습니다.23) 지금의 군자는 과오가 있어도 그대로 따를 뿐만 아니라, 게다가 변명을 합니다. 공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유로(柳老)는 평생 정좌(正坐)하면서 고요하고 적막하여, 세상 일에 아무것도 개의하지 않아 왔습니다. 그러므로 장진(長進)하지 않았는데, 공은 홀로 유로를 자랑으로 생각하니, 이는 또 무슨 이유입니까? 혹시 공이 유로에게 유감이 있어서, 그가 장진(長進)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유로에 대한 자례의 사랑은 마음과 골수로부터 나오는 것이요, 유로에 대한 공의 사랑은 표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이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유로는 자례에게 형이 됩니다. 자례는 형제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유로에게 신경쓰고 있습니다. 유로는 벼슬 길에 있지도 않고 이웃집과 다툴 만한 재산이나 밭을 가진 것도 없습니다. 유로를 비판하여 개인적인 이익을 얻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자례가 유로를 비판한 말들은 단 반 점이라도 사사로운 뜻이 없고, 오직 일편단심에서 우러나는 말입니다. 공은 총명한데, 어찌 유독 이것은 모른단 말입니까?

설령 자례의 말이 옳지 않다고 해도, 자례를 애석하게 여기는 것이 당연하지, 유로를 염려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만약 자례의 말이 맞다면, 유로를 애석하게 여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성인 공자의 정통 맥을 잇는다고 평소에 자부하는 공으로서 ‘진기'(眞機)를 멈출 수 없게 하여[不容已], 유로를 위해서 구구절절 개도하여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유로는 오직 공을 공경하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공의 말이 그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처럼 하면, 유로에게 무슨 보탬이 있겠으며, 유로 또한 공과 알고 지낸다는 것이 무슨 귀중한 의미가 얻겠습니까? 그러니 자례의 말에 과오가 있다고 한 것 또한 이제 어찌 할 수 없어, 그저 이 말로 책망할 뿐입니다.

만약 유로의 조예가 이미 깊은 경지에 이르러 쉽게 들여다볼 수 없다면, 공은 그런 유로를 크게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며, 그가 혹시 개의할까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세상을 피하여 숨어서 남들에게 알려지지 않아도 후회하지 않는다’24)는 것이 배움의 목적입니다. 사람들이 저의 학문을 알지 않으면 저는 현인이 됩니다. 이는 기쁜 일이지요. 현인이 저의 학문을 알지 않으면 저는 성인이 됩니다. 더욱 기쁜 일이 아니겠습니까? 성인이 저의 학문을 알지 않으면 저는 신인(神人)이 됩니다. 더더욱 기쁜 일 아닙니까?

공자 당시 공자를 이해한 사람은 오직 안자(顔子)뿐이었습니다. 자공(子貢)의 무리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공자가 공자인 진정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왜 자례가 꼭 공자를 알아야 합니까? 또한 유로를 눌렀다 하여 유금오(劉金吾)25) 등 여러 공의 무리에게 우리를 경시하게 하는 것을 어떻게 보고 있겠습니까? 저는 사람들이 우리들을 경시하는 것을 염려하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들이 스스로를 경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제가 이름을 보호하려 한다면, 어느 세월에 모든 것을 완전히 막고 덮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금오(金吾) 역시 인걸이라고 들었습니다. 공은 절실하게 그에게 학문을 강론하려 한다는데, 이것은 무슨 생각에서입니까? 혹시 공이 행하는 것을 통해 금오에게 가르쳐주려는 것인가요? 만약 가르쳐주는 것이 있다면, 저도 보고 무언가 얻을 수 있도록 하나하나 제게 보여주길 바랍니다. 만약 아무것도 보태주지 못하면서 자기의 무익한 헛된 강론을 듣게 하려는 것이라면, 그 이유를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저는 삼척동자도 속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호걸의 인물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공자가 학문을 강론한 것은 잘못일까요? 공자는 ‘성스러움’[聖]과 ‘어리석음’[愚]은 결국 같은 것으로 여기고, 여기에서 더하거나 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기린도 평범한 들짐승과 함께 달리고 봉황도 평범한 새와 함께 날아다니니, 모두 동류이다’26)[麒麟與凡獸並走, 凡鳥與鳳凰齊飛, 皆同類也]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만물이 모두 나와 동체(同體)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오직 하나 동류를 넘어선 학문이 있었으니, 공자만이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맹자가 위와 같이 말한 것에 맛이 있었을 뿐입니다.27) 그러나 그것이 동류를 넘어선 이유를 살펴보자면 ‘교’(巧)에 있습니다. ‘교’(巧)하다는 것은 인위적 노력을 용납하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인위적 노력을 들이지 않는 것은 탐구하지 않고 오직 인위적 노력을 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공자․맹자가 전하지 않은 비결을 잃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경솔하게 다른 사람들과 어찌어찌 된 일이라고 담론할 수 있겠습니까?

공이 이 말을 들으면 필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한 일이며 그러자면 《대학》의 처음에 나오는 ‘타고난 밝은 덕을 밝힌다’[明明德]는 내용을 주제로 삼는 것이 마땅한데, 이단의 학문을 일삼는 자들은 왜 꼭 허무적멸28)의 가르침을 퍼뜨려서 사람들을 현혹하려 하느냐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선(仙)이니 불(佛)이니 유(儒)니 하는 것은 모두 ‘명분’[名]일 뿐입니다. 공자는 사람이 명분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명교(名敎)로 사람을 유도했습니다. 석가는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으로 사람을 두려워하게 하였습니다. 노자는 사람이 삶을 탐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장생(長生)으로 사람을 끌어들였습니다. 모두 부득이하게 어떤 명목을 내세워 후세 사람들을 교화하고 유도한 것으로, 진실 그 자체는 아닙니다. 오직 안자만이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선생님은 제자들 각자의 개성과 자질에 맞추어 잘 이끌어 주신다’29)[夫子善誘]고 했습니다.

지금 제가 사는 모습 중에서 하나라도 공과 같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저 역시 관리 노릇 하기 좋아하고, 저 역시 부귀를 좋아하고, 저 역시 처자식이 있고, 저 역시 집이 있고, 저 역시 친구가 있고, 저 역시 빈객을 만납니다. 공이 저보다 더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공에게만 강론할 학문이 있고 공에게만 멈출 수 없는[不容已] 것이 많이 있겠습니까?

제가 사는 모습이 공과 하나같이 똑같으니, 인륜을 버리고 처자식을 떠나 삭발하고 검은 옷을 입는 등의 모든 것에 대해 공 역시 문제삼지 말고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일까요? 제가 공과 같지 않은 점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공은 높은 관리가 되었을 뿐입니다. 학문이 어찌 높은 관리라고 해서 뛰어나겠습니까? 만약 높은 관리라고 해서 학문이 뛰어나게 된다면, 공자․맹자는 당연히 감히 입을 열지 못합니다.

또한 동곽선생30)은 공이 견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동곽선생은 오로지 양명선생의 ‘양지’(良知)의 뜻을 발휘하여, 옛 것을 잇고 앞길을 여는 것을 자기의 할 일로 삼았습니다. 그의 훌륭한 점은 자기에게 쏟아지는 악명(惡名)을 피하지 않고 오로지 ‘동류’가 처한 위급한 상황을 구제하려고 한 것에 있습니다.

공은 이와 같이 할 수 있습니까? 저는 공을 잘 알고 있습니다. 공은 더 이상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동곽선생같아야만 비로소 정말로 멈출 수 없는[不容已] 것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근래에는 오직 용계선생31)만이 이을 수 있었고, 근계선생32)은 조금 이을 수 있었습니다. 공은 결국 동곽선생을 이을 수 없습니다.

왜냐구요? 명분을 따지는 마음이 너무 지나치고 자기의 것을 지키려는 마음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미워하는 것이 많으면서도, 말로는 오로지 인(仁)에 뜻을 두고 미워하지 말라고 하고, 사실은 사사로이 편애하는 것이 많으면서도, 말로는 오로지 널리 모든 것을 사랑하라고 하고, 사실은 자기의 견해를 단단히 고집하면서도, 말로는 오로지 자기만 옳다고 여기면 안된다고 합니다. 공은 근계에게 이런 점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까? 용계에게 이런 점이 있습니까? 하물며 동곽은 어떠했겠습니까?

억지로 하려고 하지 않는 것에 있을 뿐입니다. 방금 말한 원로 학자들은 모두 선이란 동류를 깨닫는 것과 같아 선과 악의 분별조차 필요없다는 것을 사실 그대로 깨달았기 때문일 뿐입니다. 분별이 없는데, 또한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지금 공에게는 이처럼 갖가지 분별이 있어서, 온세상의 도학 중에 공의 마음에 합당한 것이 없습니다. 심재선생33)의 학문도 잡종으로 분류하여, 공의 테두리 안에 들여놓지 않으려고 하는데, 하물며 다른 학문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요. 같은 시대 사람 중 공이 좋아하는 사람은 겨우 호려산34) 뿐이며, 그밖에 마성(麻城)의 주류당(周柳塘)과 신읍(新邑)의 오소우35) 이 두 사람만 특출하다 하시는데, 그렇다면 공이 선을 취하는 것은 너무 협소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천하에 밝은 덕을 밝힐 수 있겠습니까?

나는 공을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이 미덕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제(齊) 사람 중에서 나만큼 왕을 공경하는 사람은 없다’[齊人莫如我敬王]36)는 말이 있지요. 또한 공을 따르면 공이 필시 나를 사랑하리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공이 나를 사랑하면 현(縣)의 모든 사람들이 내게 예를 갖추고 나를 공경할 것이요, 오소우(吳少虞) 역시 나를 공경할 것이요, 관리든 선생이든 학생이든 모두들 나를 공경할 것입니다. 그렇게 좋은 나날을 보내는 일이 또 어디 있겠으며, 그렇게 쾌활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이 모두 나를 공경하는 것보다는 공 한 사람만이 나를 공경할 줄 아는 것이 낫고, 공 한 사람만이 나를 공경하는 것보다는 결국 공이 스스로를 공경하는 것이 낫습니다.

아! 공이 과연 스스로를 공경할 수 있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할 필요 있겠습니까? 스스로를 공경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보는 것과 듣는 것에 있어서 경계하고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자기를 속이지 않고, 스스로 만족을 구하고, 신독(愼獨)하는 것[戒謹不覩, 恐懼不聞, 毋自欺, 求自慊, 愼其獨]37)입니다. 성인 공자가 스스로를 공경하는 것이 대개 이와 같았습니다. 스스로를 공경하지 못하면서 남을 공경할 수 있는 경우는 아직 없었습니다. 이른바 근본이 어지러운데 말단의 것이 다스려지기를 바라는 것이니, 그런 이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두 한결같이 수신(修身)을 근본으로 한다[壹是皆以修身爲本]”38)고 했습니다. 이것이 올바른 맥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지극히 쉬우면서도 지극히 간략한’[至易至簡]39) 배움이요, ‘요점을 간략히 지니되 활용되는 범위는 무한한’[守約施博]40) 도(道)입니다. 그러므로 “군자가 수신(修身), 즉 자신을 수양하는 것 하나를 지킴으로써 천하가 태평해진다[君子之守修其身而天下平]”41)고 했고, 또 “사람마다 부모님께 효도하고 윗사람을 공경함으로써 천하가 태평해진다[人人親其親長其長而天下平]”42)고 했고, 또 “위에 있는 사람이 노인을 잘 모시면 백성들에게는 효도의 기풍이 일어난다[上老老而民興孝]”43)고 했습니다.

이렇듯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것에 대해 더 이상 무슨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단지 수신(修身) 두 글자만을 말했을 뿐입니다. 공자의 가르침은 이와 같을 뿐입니다. 저는 어느 구석에 또 멈출 수 없다[不容已]는 설이 있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공은 ‘수신’이 쉽다고 여기지도 말 것이요, ‘밝은 덕을 밝히는 것’[明明德]이 어렵지 않다고 여기지도 말 것이요, 사람들이 공부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염려하지도 마십시오. 사실 진실로 밝은 덕을 밝히려는 사람은 이삼십 년 동안 머리를 파묻고 해도 손에 잡을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그야말로 어렵사리 공부를 합니다. 어떻게 공부가 없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용계선생은 구십의 나이가 되었습니다만, 스무 살부터 학문을 시작하여, 고명한 스승을 만나고, 천하의 모든 책을 찾아 연구하고, 진리를 구하러 천하 방방곡곡의 수많은 사람들을 찾아다닌 끝에, 말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참다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어찌 공부가 없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공은 오로지 자기의 공부에만 전념하시고, 남이 공부하는 것이 쓸모없는 것이라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뜻이 있는 사람들이 저절로 모여서 함께 공부하는 것입니다. 뜻이 없는 사람과 비록 함께 얘기한다 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근계선생은 어릴 때부터 도(道)를 배워, 과거에 급제한 이후 십 년 만에 관직에 진출했습니다. 지금 일흔 두 살인데44), 여전히 사람을 만나러 강호 각처를 두루 다니고 있습니다. 이 어찌 오로지 도통을 전수하기 위한 것이겠습니까? 아마 그에게도 멈출 수 없는[不容已] 것이 있어서이겠지요. 그는 일생 동안 이름을 날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근래에 들어와 이름을 감추는 것을 조금 알게 되어, 강우(江右)․양절(兩浙)․고소(姑蘇) 및 말릉(秣陵)에 이르기까지 두루 돌아다니면서, 도학에 뛰어난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한 곳도 빼놓지 않고 찾아가 방문했습니다. 제자가 스승을 찾는다고 해도 그처럼 절실한 사람은 아직 없었습니다. 그 정도면 양지를 다했다[致良知]고 할 수 있으니, 더더구나 공부를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공은 다만 공부를 시작했을 뿐이니, 유가의 서적만으로도 탐구하기에 충분하고, 따로 불가의 경전을 볼 필요는 없습니다. 문자를 해석하는 것만 가지고는 끝내 진리를 깨닫기 어려우며, 자기의 견해를 꼭 쥐고 고집하는 것으로는 끝내 ‘진공자재’(眞空自在)의 경지를 얻기가 어렵습니다. 남의 밭만 갈다 보면 비옥하던 자기 집의 밭도 끝내 황폐해집니다. 공은 결코 나뭇꾼․목동․도공․어부 등의 견해를 비천한 사람들의 것이라고 하여 버리거나 소홀히 하지 말기 바랍니다. 옛날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더욱 잘 살폈습니다.

명성이란 바로 몸을 옭아매는 족쇄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소문에 의하면, 근계 어르신이 강호를 두루 돌아 다니는 동안 그를 이해하거나 믿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주류당(周柳塘)이 처음 집에 있을 때 그의 책을 읽고 100% 믿었는데, 남창(南昌)에 가서는 70% 믿게 되고, 건창(建昌)에 가서는 또 20% 감소하여, 50%밖에 믿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경(南京)에 도착해서는 믿을 만한 것을 10%라도 찾아보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주류당의 제자 증(曾) 아무개는, 비록 10%~20%라도 믿기는 했지만, 그가 말하는 것이 기이하다고 느낀 적이 많았다고 합니다. 초약후(焦弱侯)는 스스로 총명하고 남달리 뛰어나다고 생각했었고, 방자급(方子及)45) 역시 호걸이라고 자부하여, 모두 이 대법사(大法師)를 거들떠보지 않고 그를 이해하려 들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이 세상에 참된 눈을 가진 사람이 극히 드물고, 근계는 세상을 피하여 남에게 알려지지 않는 것[遯世不見知]46)의 묘용(妙用)을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근계가 자기의 쓰임을 잘 감춘 것은 아주 훌륭한 것입니다. 증 아무개가 돌아와 “근계를 이해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선생 한 분만이 이해하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니! 제가 근계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근계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저 한 사람만 알아주면 족합니다. 어찌 많은 사람이 알아줄 필요 있습니까? 많은 사람이 알아주는 것은 쓸 모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명성에 가까이하는 누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귀하게 여길 만한 것입니까? 그러므로 “나를 아는 사람이 드물면, 나는 귀한 것이다”[知我者希, 則我貴矣]47)라고 했습니다.

저는 근계가 너무 존귀하게 되는 것을 달가와하지 않습니다. 근계가 저와 도를 같이 하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고, 차라리 근계는 행동거지가 공을 닮았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그를 깊이 믿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것은 오대48)선생은 저와 조금 비슷합니다만, 공에 의해 오대선생의 마음은 뜨겁고 저의 마음은 너무 차다고 평가받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니! 그저 외형적으로만 암말․숫말․검은말․누런말 등을 구분한 것을 가지고 어떻게 말의 관상을 제대로 잘 볼 수 있겠습니까?

(여기까지 쓰고 보니) 대체로 거리낌없이 이 얘기 저 얘기 수많은 말을 적었습니다. 게다가 처지가 가난하여 대필하는 사람도 없어서, 직접 붓을 들어 허둥지둥 쓰고 보니, 전혀 말이 안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또한 감히 붓을 마음대로 휘두르지도 못했습니다. 공에게 거듭 노여움을 사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다 쓴 것을 마침내 봉하여 보냅니다.

수십 일 동안 중병을 앓아, 이 천한 몸이 아직 그다지 편안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더구나 이렇게 힘든 일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공이 한두 가지라도 믿어 주신다면, 이 순간 죽어서 구덩이에 묻힌다고 해도 매우 달갑게 원하는 바입니다. 공은 저의 이런 것이 무슨 마음이라고 생각합니까?

저는 불학(佛學)을 하는 사람입니다. 어찌 공과 이름을 다투려고 하겠으며, 혹은 관직을 다투려고 하겠습니까? 그런 것은 전혀 없습니다. 공이 만약 저를 믿지 못하시겠다면, 오대에게 저의 마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 번 물어보십시오. 오대는 그래도 공이 믿기 때문입니다. 만약 오대 역시 불학을 하는 사람이라서 미심쩍다면, 근계에게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 번 물어보십시오.

공은 또한 “지난번의 <이조부>(二鳥賦)는 원래 자례(子禮) 때문에 썼던 것이지, 공 때문이 아니었다”고 말했습니다.49) <이조부>가 만약 자례 때문에 쓴 것이라면, 어찌하여 자례는 후하게 대하고 불초한 이 몸은 박하게 대하십니까?

저는 저의 단점을 비호하거나 감추려 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의 잘못과 죄악을 들추고 공격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저의 스승입니다. 저는 공이 커다란 철퇴로 내리치듯 저의 잘못을 꾸짖어주길 오랫동안 바라고 있었습니다. 사물이 단련을 거치지 않으면 끝내 그릇으로 만들어지기 어렵고, 사람이 절차탁마하지 않으면 끝내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친구를 원할 뿐 이름을 원하지 않으며, 도를 구할 뿐 명성이나 칭찬을 구하지 않습니다.

공은 더 이상 저를 위해서 저의 결점을 덮어두어야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내게 허물이 없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남들이 저를 허물하는 것이 있는 것을 기뻐하며, 제게 허물이 있는 것을 근심하지 않고 저의 허물이 드러나지 않는 것을 근심합니다. 이것은 부처의 말이요, 마귀의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진담이요, 농담이 아닙니다. 공은 한 번 마음을 비우고 생각해 보십시오.

공이 집착하고 미혹되어 벗어나지 못하는 것들마다 각각 욕심이 많은 것에 그 병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옛 사람들이라고 무슨 특별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저 욕심을 적게 하는 것을 마음을 수양하는 요점으로 삼았으니50), 여기에 참된 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공은 이미 공자를 대종(大宗)으로 삼았으면서, 또 여러 성인의 장점을 겸하여 통달하려고 하니, ‘청’(淸)하려고도 하고, ‘임’(任)하려고도 하고, ‘화’(和)하려고도 합니다. 옛 전통을 잇고 새로운 시대를 열려는 성인의 역할을 발휘하려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애쓰면서, 또한 조상을 빛내고 후손에게 영광을 물려주려는 보통 세상 사람들의 욕망에도 시시각각 매달리지 않는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지니고 있는, 보통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생각을 저속한 생각이라고 하여 시시각각 덮어두려고 하면서, 옛 전통을 잇고 새로운 시대를 열려는 멈출 수 없는[不容已] 본심만을 드러내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합니다.

후한 봉록과 존귀한 신분을 보장하는 높은 지위를 탐내고, 조부와 부친의 선대까지 지위와 신분을 높여줄 수 있는 3품․2품의 벼슬자리를 탐내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이 공이 진정 멈출 수 없는[不容已] 것이요, 이것이 바로 공의 솔직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나는 지금의 임금과 백성을 요․순 임금과 그 시절의 백성들처럼 만들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나는 선지자와 선각자의 임무를 띠고 태어났다”51)고 둘러댑니다. 이는 욕심을 덮으려는 것이지 공이 멈출 수 없는[不容已] 진정한 본심이 아닙니다.

또한 이는 이윤(伊尹)의 뜻이지 공자의 뜻은 아닙니다. 공이 어찌 공․맹의 뜻에 대해서 듣지 않았겠습니까? 공․맹의 뜻에 의하자면 “그러므로 장차 무언가 위대한 일을 하려는 군주는 반드시 부르지 않는 신하가 있다. 자문을 구할 것이 있으면 그를 찾아간다. 덕있는 사람을 존중하고 도를 즐거워함이 이와 같지 않다면 함께 무슨 일을 할 수 없다”52)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노(魯)나라 목공(繆公)은 자사(子思)의 곁에 사람을 두었으며, 그렇지 않으면 자사를 편하게 해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53).

공․맹의 가법(家法)은 이와 같이 자중하는 것이었고, 또한 이와 같이 도를 중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공은 공자를 본받는 사람인데, 왜 이를 본받지 않고 꼭 이윤만을 본받으려는 것입니까? 이것이 성인 공자가 진정 멈출 수 없는[不容已]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단 말입니까? 제 생각에 공․맹이 지금 이 시대에 살았었다면, 그저 남들을 따라서 줄지어 몰려다니고 우르르 떼지어 관직을 사퇴했다가 다시 나아가면서 지위를 높이는 것에 연연하기보다는 차라리 종신토록 누추한 거리에서 곤궁에 처해서 굶주리며 살더라도 후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안자(顔子)는 공자의 이 점을 제대로 배웠습니다.54)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극명(克明)55)이 초탈(超脫)을 좋아하여 자손을 낳는 것에 신경쓰지 않는 것에 대해 분명히 유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도리어 말을 돌려 비호하며 “우리 집 애들이 초탈을 좋아해서 후손을 잇는 것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말하고, 이어서 엉뚱하게 이 사람 이탁오를 나무라며 “이탁오 그 사람이 초탈을 추구하여 후손을 잇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에 내 자식이 본받을 뿐이다”라고 말을 하다니요!

아니! 자식 낳고 손자 낳는 것이 무슨 일이길래, 그것까지 남을 따라서 하려고 한단 말입니까? 또한 초탈하면 자식을 낳으면 안된단 말입니까? 아들이 초탈을 좋아해서 아직 손자가 없다고 칩시다. 공은 초탈한 사람이 아닌데, 왜 아들을 많이 낳지 않았습니까? 저는 자식을 넷 낳았습니다만, 제대로 크지도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고, 늙으니 기운도 없어서, 천명이라 생각하고 위안을 삼으며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지, 사실 일찍이 초탈한 적이 없습니다. 공은 어째서 저를 심하게 무고하십니까?

또한 그 뿐만이 아닙니다. 극명이 초탈을 좋아하여 과거 급제에 신경쓰지 않는 것에 대해 분명히 유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도리어 말을 돌려 비호하며 “우리 집 애들이 초탈을 좋아하여 평상의 자잘구레한 집안 일에 달라붙어 신경쓰려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이어서 또 엉뚱하게 이 사람 이탁오를 나무라며 “이탁오 그 사람이 초탈을 추구하여 공명을 중시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집안 애들을 해친다”라고 말을 하다니요.

아니! 저 이탁오는 29세 때부터 관리가 되어 53세에 이르러서야 그만 두었습니다. 어디 눈꼽 만큼이라도 초탈한 적이 있습니까? 극명은 해마다 시험을 보러 북경(北京)에 올라갔으니, 어찌 공명을 가벼이 여긴 적이 있습니까? 시운이 아직 이르지 않은 것일 뿐입니다. 그 역시 굳게 참고 계속 기다려 왔습니다. 그런데 부친의 성미가 급하여, 그 잘못을 학업을 공들여 하지 않은 것에 돌리니, 이는 부친의 욕심이 너무 급한 것입니다. 세상에 이것에 공들이는 사람이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그런데 이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하나하나 당선되어야 한다면, 그것도 일찌감치 당선되어야 한다면, 이백(李白)․두보(杜甫)처럼 훌륭한 문장이 탈락될 리도 없고, 저와 공이 어떻게 요행으로 지목되는 일도 없었겠지요.

이른바 초탈이라고 하면 적어도 도연명(陶淵明)의 무리처럼 관직 생활도 하기 싫어지고 집안 돌보는 일도 하기 싫게 되어야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공은 스스로에 대해서는 초탈하지 않은 사람이라야 집안을 돌볼 수 있는 법이라고 생각하십니다만, 극명 또한 초탈했다고 해도 집을 버리고 돌보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그가 초탈한 것에 대해 어찌 유감이 있을 수 있습니까? 만약 그가 도연명을 따라갈 정도로 초탈했다면, 저는 공이 차라리 치하를 받았으면 받았지 유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은 욕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등지고 어긋나는 지경에 이르고, 그러므로 혼란스런 지경에 이르고, 그러므로 이와 같이 어둡고 가리워지는 것일 뿐입니다.

극명이 어떤 사람입니까? 무쇠같은 근골을 타고났는데, 그저 줏대없이 남들이 하는 그대로 따라하며 남의 발뒤꿈치만을 따라가려고 하겠습니까? 남들이 하는 그대로 따라 하는 사람은 광대입니다. 나는 극명이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설사 극명이 지방에서 수재로 천거되지 않더라도, 진사에 합격하지 않더라도, 큰 관리가 되지 않더라도, 이 세상에 몇 안되는 뛰어난 인물이 되어 남다른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공 앞에서 작은 이해득실을 따지는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오소우(吳少虞)가 제게 “초공(楚倥)이 거리낌없고 방자한 것은 모두 당신이 가르친 것입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제가 “어찌 이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할 수 있소?”라고 했더니 오소우는 “당신이 가르치지는 않았다고 해도 당신의 영향을 받아 방자하다고 해야 타당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아니! 초공이 언제 방자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리고 그는 바로 저의 스승으로, 저는 오직 그를 스승으로 섬길 줄만 알 뿐입니다. 그의 눈은 사방 바다처럼 식견이 가득 차 있는데, 남의 뒤꿈치를 따라가려고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초공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오소우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는 모두 공으로부터 나온 것인 듯 합니다. 만약 공에게서 나온 뜻이라면, 공 또한 너무 어긋난 것입니다. 설령 올바른 안목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해도 눈이 없다고 할 수야 있습니까? 제 생각에 공은 마음을 비우고 이 천한 사람의 말 한 마디를 잘 들어두어, 자칫 일생을 그르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저는 공이 오로지 조상을 영광스럽게 하고 후손을 복되게 하는 것에만 전념하는 것은 필시 달가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공이 결국 옛 전통을 잇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성인의 일까지 겸하여 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몸으로 두 가지 임무를 맡는 것은 비록 성인 공자라고 해도 결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들 리(鯉)가 죽자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안회가 죽자 통곡을 했고, 처가 집을 나가자 더 이상 아내를 구하지 않았고, 리(鯉)가 죽은 이후 첩을 얻어 다시 아들을 낳으라는 말도 듣지 않은 것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도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도를 행하는 것이 중요하므로, 그밖의 것은 당연히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공은 그래도 초탈을 병통으로 여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공을 보자니, 도를 전하려는 뜻은 사실 없었고, 도를 중시하는 생각도 사실 없었습니다. 공이 도를 창도한 이래로 공의 도를 이어받은 사람이 과연 누구입니까? 다른 곳에서는 저도 모르겠고, 신읍(新邑)에서만 보더라도 공의 진짜 맥을 잇는 사람이 과연 누구입니까? 면전에서는 따르고 등뒤에서는 어기고, 직접 행동으로 가르치는 것이나 준수할까, 말로 가르치는 것은 단 반 마디라도 받들어 행한 적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그런 사람들과 절대 접촉하지 않으려고 하고, 저들 역시 당연히 저와 접촉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제게는 빌붙을 만한 세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허허! 스승이라는 사람은 제자가 되려고 찾아왔다는 사람이 사실은 부귀와 권세를 추구하여 아첨을 하려고 찾아왔다는 사실을 모르고, 스승의 임무를 사양하지 않고 맡으면서 “나의 도덕이 감화를 주어 그가 오게 한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제자라는 사람 역시 자기가 권세와 인기에 빌붙기 위해서 찾아왔다는 사실을 잊고, 돌아가지 않고 오랫동안 거짓으로 있으면서 “나는 도를 스승으로 삼고, 나는 덕을 벗으로 삼는다”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이것이 도를 배우는 것이라면, 조금이라도 올바른 뜻이 있는 사람은 그런 사람과 어울리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저같은 사람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제가 두문불출하는 것은 혼자서 잘난 척 고고하게 살려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과 관계를 끊고 세상을 도피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 세상을 도피하려고 했다면 산 속 깊이 들어갔을 것입니다.

제가 마성(麻城)에 머무르는 것은, 단지 이곳이 공이 있는 곳으로부터 거리가 좀 멀고 사람 또한 제법 많은 데다가, 공의 말과 가르침이 아직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중에는 조금이나마 함께 어울릴 만한 진인(眞人)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뿐입니다. 비록 상지(上智)의 자질을 갖춘 사람을 찾지는 못했지만, 하나하나 함께 이야기해보면 속된 점이 없습니다.

황피(黃陂) 축선생(祝先生)56)은 예전에 남경에서 누차 만났습니다. 그 당시 저는 이 사람의 자질이면 정말 함께 공부할 만한데 다만 기골이 너무 약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만나서야 비로소 그가 자신의 마음을 어둡게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비록 간담을 모두 드러내는 사람은 아닐지라도 간담을 토해낼 수는 있다고 할 만합니다. 그가 조금 더 건강해진다면, 충분히 이 일을 이어받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은 더욱 더 신경을 써서 북돋우고 키워주기 바랍니다.

듣자 하니 마성(麻城)에 신임 현령(縣令)이 오자 주류당(周柳塘)이 이 기회에 강회(講會)를 열어서 현령을 회주(會主)로 추대하려고 한다는군요. 백성의 부모인 현령에게는 백성을 보살핀다는 밤낮으로 쉴 수 없는 본분의 일이 있습니다. 왜 꼭 특별히 어느 학파나 모임의 기치를 내세움으로써 통일된 현 안의 학파나 모임이 분열되게 해야겠습니까?

모임에 참가한 사람이 현명하다고 한다면 모임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은 불초하다는 것이 됩니다. 사람마다 불초하다는 좋지 않은 낙인이 찍히게 한다면 이는 우리가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한 현령이 참가한다면, 누가 모임에 참가하기를 원하지 않겠습니까? 누구나 모임에 참가하길 원한다면, 모임에 참가하는 사람 중에는 필시 불초한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불초한 사람이 많으면, 현명한 사람은 필시 참가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모임은 오로지 불초한 사람을 모으기 위한 것이 됩니다. 모임을 주관한 처음의 뜻이 어찌 그러했겠습니까마는, 형세는 부득불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될 뿐입니다.

게다가 모임을 여는 것이 현령에게 어떤 이익이 되겠습니까? 쓸데없이 소인들이 이를 틈타 현령을 어지럽히고 소란스럽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현령이 현명하다면 일을 아주 잘 처리하겠지만, 그래도 여러 가지에 신경을 쓰는 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백성을 다스리는 본분의 일에 전념하지 못하게 하고, 만약 현령의 총명함이 아직 남들보다 뛰어나지 않다면, 이 모임은 바로 성명(性命)을 자르는 칼이나 도끼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인(仁)의 마음을 지닌 사람이 이것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만약 현령이 과연 성명을 소중하게 여긴다면 스스로 스승을 구하고 벗을 찾을 것이므로, 내가 그 노고를 대신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일까요? 내가 도를 배우려고 생각했을 때는 바로 고각로(高閣老)․양이부(楊吏部)․고예부(高禮部)57) 여러 공이 금기할 때였습니다. 그 때는 모임이란 절대 없었고, 또한 입을 열어 성명에 대해 말하는 사람조차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때 이 성명에 대한 공부를 절실하게 바라던 터라, 자연스럽게 친구를 찾아, 말을 하지 않은 스승이 저절로 많이 모였습니다. 왜 꼭 모임을 연 뒤에 공부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쉽게 알 수 있는데 주류당은 무엇 때문에 알지 못한 겁니까? 만약 현의 모든 문생 중에 주류당의 도를 이해하고 받아들인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이제 이 기회를 틈타 현령에게 전수하고자 한다면, 스스로 이 도를 현령에게 가르치면 될 것이요,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모아 그들의 눈과 귀를 어지럽혀서는 안됩니다. 만약 현령이 도를 깨달았다고 생각되어 주류당이 이에 대해 듣고 싶은 것이라면 주류당이 스스로 찾아가 토의하고 확인하면 됩니다. 또한 현령에게 도가 있어, 현령이 스스로 멈출 수 없다[不容已]면, 스스로 사람을 취하고 모이게 할 것입니다. 굳이 내가 현령을 대신하여 적기(赤旗)를 앞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반복하여 생각하면, 모든 것이 결국 이름을 뒤쫓는 마음이 끌어당기는 것이라, 본말이 뒤바뀌지 않을 수 없습니다. (권1)

1) 경정향(耿定向)으로, 경씨 사형제 중 맏이이다. <이온릉전>(李溫陵傳) 주12와 <경초공선생전>(耿楚公先生傳) 주1 참조.
2) 경정향에게 답장한 이 긴 편지에서 키 포인트가 되는 말이 ‘불용이’(不容已)이다. 이는 ‘멈춤(그침)을 용납(허용)하지 않는다’라고 직역되는데, 이지에게 있어 양지(良知)․동심(童心)․진기(眞機)․본심(本心)․진성(眞性)․제일념(第一念) 등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인간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본성이 마치 물이 흐르듯 멈출 수 없이 자연스럽게 분출되는 것을 형용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어떤 것이 과연 자연스러운 본성(본심)의 발출인가”하는 문제에 대해 경정향과 자신의 실생활에 입각한 토론을 진행하고 있다.
3) 역린(逆鱗)은 용의 턱 밑에 거꾸로 나 있다는 비늘로, 이것을 건드리면 용이 화를 내, 건드린 사람을 반드시 죽인다는 전설이 있다. 예로부터 군주는 용에 비유되었고, 따라서 역린은 군주의 비위를 건드려 화를 내게 만든다는 뜻으로 쓰였다.
4) 하심은(何心隱)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심은(1517~1579)의 본명은 양여원(梁汝元), 자는 주건(柱乾), 호는 부산(夫山)이다. 일화를 하나 소개하자면, 언젠가 하심은이 경정향(耿定向)과 국사관사업(國士館司業) 장거정(張居正)(후에 재상이 됨)과 동석하였다. 하심은이 장거정에게 “공(公)께서는 태학(太學)에 몸 담고 계시는데, 정말로 《대학(大學)》의 도(道)를 터득하고 계십니까?”라고 물으며 뚫어지게 바라보자, 장거정은 눈을 부라리며 “그대는 항상 높이 날 뜻을 품고 있으면서, 날지 못하고 있는 것 같소”라고 대답했다. 이윽고 하심은은 경정향에게 “장공(張公)이 재상이 되면 필시 학문 강론을 금지시킬 것이요, 필시 나를 해칠 것입니다”라고 말했는데(경정향 <里中三異人傳> 및 <省志本傳> 등 참조), 실제로 그는 옥사(獄死)했다. 이지는 하심은을 높게 평하여 <하심은을 논한다>[何心隱論]을 지었고, 이밖에 <등명부에게 답하다>[答鄧明府, 《분서》 권1] 및 <황안의 두 스님을 위해 쓴 글 세 편>[爲黃安二上人三首]․<초의원 태사에게>[與焦漪園太史]․<초약후에게>[寄焦弱侯](이상 세 편은 《속분서》 권2) 등에서 그를 언급하며 칭찬했다. 반면에 경정향은 <마을의 세 기인에 대한 전>[里中三異人傳]에서 그를 ‘하광’(何狂)이라고 칭하여, 그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보인다.
5) 《논어》 <자로>(子路), “자로가 이렇게 물었다. ‘어찌해야 선비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였다. ‘간절하고 자상하게 힘쓰고 화목하여 기쁜 듯 하면 선비라고 할만하지. 벗을 사귈 때에는 간절하고 자상하게 격려해 주고, 형제 사이에는 화목하고 기쁘게 대해야 하느니라.”[子路問曰, ‘何如, 斯可謂之士矣?’ 子曰, ‘切切偲偲, 怡怡如也, 可謂士矣. 朋友, 切切偲偲. 兄弟, 怡怡’]
6) <제자직>(弟子職)은 《관자》(管子)의 편명이다. 입효출제(入孝出弟)의 내용은 《논어》 <학이>(學而)에도 나온다.
7) 이 점에 관련된 논쟁은 두 사람의 격렬한 논쟁 중에서도 특히 사상사의 본질과 관련되는 부분이다. 앞의 주 2에서 말한 바와 같이, 본심(本心), 또는 진기(眞機)를 멈출 수 없는[不容已] 것은, 이지가 말한 동심(童心)․진성(眞性)․제일념(第一念) 등과 같이, 멈추지 않고 자기에게서 분출되는 것을 가리킨다. 이지는 경정향이 멈출 수 없는[不容已] 것을 효제(孝悌)라고 규정한 것을 비판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효제’가 선(善)이라고 하는 선험적 틀이 지워지는데, 이는 진정으로 멈출 수 없는[不容已] 본심에 대한 하나의 질곡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멈출 수 없는[不容已] 것은 멈출 수 없는[不容已] 것조차 모르는 것으로, 저절로 멈출 수 없는[不容已] 것’이라고도 말하여 자기로서는 아무 것에도 의지하지 않는 경지에 서서 이른바 무선무적(無善無迹)의 경지에 자존(自存)하는 것임을 주장한다. 경정향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지의 멈출 수 없는[不容已] 것은 불교의 적멸멸기(寂滅滅己), 즉 인륜을 버리고 고절(孤絶)의 경지로 가는 것, 혹은 일상과 평상의 차원을 초월하여 공중으로 비상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경정향은 이지의 관점을 기이(奇異)와 평상(平常)을 구분하려는 소승(小乘)의 차원이라고 비판하며, 평상의 실지(實地)에서 진정한 도를 수행․증험하라고 한 것이다. 평상의 실지에서 도를 수행․증험하려는 것은, 사실 이지가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것 중의 하나로, 이 점에서 두 사람의 논점이 어긋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두 사람이 주장하는 ‘평상’이라는 것은 각각 그 내용이 전혀 다르다. 이지는 ‘평상’에 일체의 전제를 두지 않고 있어, 인륜과 강상(綱常)에 인간 본래의 평상태가 선험적으로 있다고 믿는 경정향과는 결정적으로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8) 《논어》 <자한>(子罕) 참조.
9) 《논어》 <안연>(顔淵) 참조.
10) 이 말은 유학자들이 불교를 비난할 때 상용하던 용어이다.
11) 《중용》 참조.
12) 《중용》, “군자의 도리는 네 가지인데, 나 공자는 한 가지도 잘하지 못합니다. 아들에게 구하는 바로써 아버지를 섬기는 일을 잘하지 못합니다. 신하에게 구하는 바로써 임금을 섬기는 일을 잘하지 못합니다. 아우에게 구하는 바로써 형님을 섬기는 일을 잘하지 못합니다. 벗에게 구하는 바로써 먼저 그에게 베푸는 것을 잘하지 못합니다. 떳떳한 덕을 실행하며 떳떳한 말을 삼가서 부족한 것이 있으면 감히 힘쓰지 않을 수 없으며 남는 것이 있어도 감히 다하지 않아서 말이 실행을 돌아보며, 실행이 말을 돌아볼 것이니 군자가 어찌 독실하지 않으리오!”[君子之道四, 丘未能一焉. 所求乎子, 以事父, 未能也, 所求乎臣, 以事君, 未能也, 所求乎弟, 以事兄, 未能也, 所求乎朋友, 先施之, 未能也. 庸德之行, 庸言之謹, 有所不足, 不敢不勉, 有餘, 不敢盡. 言顧行, 行顧言, 君子胡不慥慥爾]
13) 《중용》 앞의 주석 참조.
14) 《논어》 <술이>(述而) 참조.
15) 《논어》 <학이>(學而)와 <자한>(子罕) 참조.
16) 《대학》 참조.
17) 왕양명의 제자 동나석(董羅石)이 어느날 외출했다 돌아와서 왕양명에게 “오늘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왕양명이 “무엇이 이상한 것이란 말이냐?”라고 물었다. 그가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이 모두 성인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왕양명은 즉각 “그건 보통의 일이다. 그게 어찌 이상한 것이냐?”라고 대꾸했다(《傳習錄》 卷下) 이는 사람마다 모두 양지(良知)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사람은 곧 성인이라고 봄으로써, 자기 기질의 악(惡)을 버리고 완전한 선(善)으로서의 성인을 지향하는 송학(宋學)의 성인관을 크게 변혁시킨 것이다. 게다가 이지는 성인을 형이하학적 위치로 끌어내려, 성인은 사람이 부귀영달을 지향하는 것을 따름으로써, ‘따르는 것에 의해 이를 편안히 받아들인다’(<答耿中丞>)라고 했고, 또는 더욱 단적으로 “성인도 또한 사람이다.……곡식․낟알․옷․먹을 것을 끊고 자기만 황야로 도피할 수 없다. 따라서 비록 성인이라도 권세와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道古錄》 권1)라고도 말했다.
18) 《논어》 <양화>(陽貨) 참조.
19) 《맹자》 <공손추상>(公孫丑上) 참조.
20) 《맹자》 <공손추상>(公孫丑上)에서 주자(朱子)는 주석에서 “사람에게 선(善)이 있으며 억지로 힘쓰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서 취한다. 이것이 ‘선을 다른 사람과 함께 한다’는 조목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남의 선을 취하여 나에게 베풀면 남은 한층 더 선을 하는 데에 힘쓴다. 이는 내가 그 선을 실행하는 것을 돕는 것이다”라는 해석을 덧붙이고 있다. 결국 여기서 “선을 다른 사람과 함께 한다”[善與人同]와 “다른 사람에게 선을 실행하도록 한다”[與人爲善]의 의미를 따온 것이다.
21) 주자례(周子禮)는 이 글 외에 《분서》 권1 <경중승의 이야기에 답하다>(答耿中丞論淡), 권3 <나의 열 가지 벗>(李生十交文) 등에서도 언급되었다. 이지는 구도의 과정에서 자기보다 뛰어난 벗이나 진정으로 자기를 알아주는 벗을 찾으려는 마음이 특히 강하였다. 이런 마음은 한편으로는 그 이외의 사람을 무시하는 오만함으로 비치기도 하였으며, 또한 이미 찾은 벗에게도 끊임없이 자기보다 뛰어난 것을 찾았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항상 자기보다 나을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그에게는 항상 진정한 벗을 만나게 되기를 바라는 한탄을 하는 동시에, 일단 얻었다고 생각되는 벗에게는, 적어도 그 시점에서는, 최대의 찬사를 보내주는 면이 있다. 여기서 주자례에 대한 찬사도 그대로 무조건적인 것일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사람이 마성 사람이라는 점과 경정향과도 관계가 있는 사람이라는 점(《경천대선생문집》 권3 <與周柳塘> 제4수에도 그 이름이 나옴), 그리고 이 글의 뒤에 나오는 마성의 주씨 형제 중의 한 사람이라는 점에 비춰 본다면, 이지와 친했던 부류의 사람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다.
22) 주사구(周思久)의 호가 유당(柳塘)이다. 호북(湖北) 마성 사람이다. ‘십오륙 년 동안 관직에 있었는데, 자기 집 한 채도 세우지 않았고, 밭 한 뙈기도 없었다. 그저 친구의 도움으로 보잘 것 없는 글방 하나 창건하게 되었다.’(《경천대선생문집》 권5 <與直指議墮書院>)고 할 정도로 청렴하고 독실하게 학문했던 사람이었다. 경정리(耿定理)가 죽은 뒤에 이지는 이 사람에게 의지하여 마성의 지불원에 와서 정착하기에 이르렀는데, 사실 그의 동생 주우산(周友山)과 더불어 이지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 중의 하나였다. 또한 경정향은 이지와 논쟁할 때 주류당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지에 대한 자기의 말을 누누히 했었으니, 경정향이 주류당을 사상적 동반자로 중요하게 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주류당은 ‘경정향은 명교를 중시하고 이지는 진기(眞機)를 안다’고 두 사람을 평하였고, 이것이 또 경정향을 촉발시켜 기나긴 반론의 편지를 썼으니(《경천대선생문집》 권3 <與周柳塘> 제18수), 이로부터 또한 그의 식견이 매우 투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인지 이지도 이 두 사람을 열심히 만났고, 경정향과 있었던 논쟁과 달리, 주류당에게도 경정향에 대한 반론 혹은 오해 등에 대한 변명을 길게 써서 보냈다.(《분서》 증보1 <答周柳塘>) 이지는 동생 주우산과 먼저 친해지고, 그 인연에 의해 마성에서 형 주류당에게 의탁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지가 만년에 사귀었던 사람 중에서 가장 가까웠던 사람 중의 하나일 것이다.
23) 《논어》 <자장>(子張) 참조.
24) 《중용》 참조
25) 앞의 <이오릉전>의 주에 금오(金吾)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26) 이와 관계된 언급이 《맹자》 <공손추상>(公孫丑上) 및 기타 고전에 보인다. 주희(朱熹)는 여기서 기린과 봉황에 중점을 두어, ‘기린은 들짐승이지만 들짐승 중의 으뜸이고, 봉황은 날짐승이지만 날짐승 중의 으뜸이듯, 성인은 사람이지만 사람 중의 으뜸이며, 공자는 그 중의 최고봉이다’라고 해석했다. 이지는, 위 말의 중점이 ‘동류’(同類)에 있는데, 주희가 이것을 잘못 파악하여 위와 같이 엉뚱한 해석을 낳았다고 비판한 것이다.
27) 《맹자》 <공손추상>(公孫丑上)에서 공자(孔子)를 ‘그 동류를 뛰어 넘은’[出於其類] 존재라고 칭송한 유약(有若)의 말을 가리킨다.
28) 허무적멸(虛無寂滅)은 유교 입장에서 도교와 불교를 비판할 때 상용했던 용어로, 도교는 허무를 추구하고 불교는 적멸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배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29) 《논어》 <자한>(子罕) 참조.
30) 동곽(東廓)은 추수익(鄒守益, 1491~1562)의 호이다. 추수익의 자는 겸지(謙之)이고, 강서(江西) 안복(安福) 사람이다. 처음에 주자학을 공부하다 여러 의문을 품었었는데, 양명을 만나 논란을 반복한 끝에 모든 의문이 얼음 녹듯 풀리게 되어, 이후 양명학에 전념하게 되었다고 한다. 강서 지역에 양명학의 기반을 굳히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하였다. 황종희(黃宗羲)는 《명유학안》(明儒學案)에서 “양명학은 강우학파(江右學派)만이 그 정통을 이었는데, 추동곽(鄒東廓)․나염암(羅念庵)․유양봉(劉兩峰)․섭쌍강(聶雙江)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明儒學案》, 권16, <江右學案序>)라고 했다. 이지는 《속장서》, 권22, <리학명신전》(理學名臣傳)에서 추수익의 말을 소개했다.
31) 용계(龍谿)는 왕기(王畿, 1498~1583)의 호이다. 왕기의 자는 여중(汝中)이고, 절강(浙江) 산음(山陰) 사람이다. 왕양명의 후학으로 양명의 사구교(四句敎)설을 논쟁할 때 사무설(四無說)을 주장한 이른바 현성파(現成派), 곧 양명좌파로의 분기를 이룬 인물이다.
32) 근계(近谿)는 나여방(羅汝芳, 1515~1588)의 호이다. 나여방의 자는 유덕(惟德)이고, 강서 남성 사람이다. 이지와 2번 정도 만나서 학문에 대해서 듣고 거의 스승을 대하듯이 하였다. 나중에 이지의 부고를 접하고 비탄한 마음으로 <나근계선생고문>(羅近溪先生告文, 《분서》 권3)을 지었다. 그의 적자지심(赤子之心)에 대한 논의가 <동심설>에서 소개되고 있다. 왕용계의 학풍에 비해서 능동적인 것이 특징이다.
33) 심재(心齋)는 왕간(王艮, 1483~1541)의 호이다. 왕간의 자는 여지(汝止)이고, 강소(江蘇) 태주(泰州) 사람이다. 왕양명이 강서지역을 순무할 때 학설을 듣고 그의 문하가 되어, 뒷날 양명학을 널리 전파하는 데 공헌한 인물이다. 태주학파(泰州學派)의 창시자로 뒤에 이지 학설의 단초를 열었다.
34) 여산(廬山)은 호직(胡直, 1517~1585)의 호이다.
35) 오소우(吳少虞)는 신읍(新邑) 사람이다. 신읍은 구성(舊縣)인 마성(麻城)에 대비하여 황안(黃安)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경(耿)씨 형제들과 같은 고향 사람들이었는데 전기는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경정향과 주류당 등의 인물과 가깝게 지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36) 《맹자》 <공손추하>(公孫丑下)에 나오는 말이다. 맹자가 제나라 왕을 만나러 갈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제나라 왕은 현자를 직접 방문하는 예의를 갖추지 않고, 몸이 아프다고 하면서 맹자가 자기를 방문해달라고 하자, 맹자도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다음날 동곽(東郭) 대부에게 문상 갔다가 경자(景子)의 집으로 가면서 제나라 왕을 만나지 않으려는 뜻을 드러냈다. 왕이 만나려 하는데 자꾸 피하는 것을 왕을 공경하는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냐고 경자가 맹자에게 물었다. 그러자 맹자는 “아니! 이게 무슨 말씀이오? 제나라 사람 중에 왕에게 인의의 도리를 말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찌 그들은 인의가 좋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습니까? 마음속으로는 ‘이런 왕과 어떻게 인의를 논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이보다 더 왕을 공경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나는 요순의 도가 아니면 감히 왕 앞에서 말을 꺼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제 나라 사람 중에 나만큼 왕을 공경하는 사람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속으로 그렇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무턱대고 순종하고 공경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공경이 아니라 오히려 불경(不敬)이라는 뜻에서 이지가 맹자의 이 말을 인용하였다.
37) 《중용》, 《대학》 참조.
38) 《대학》 참조.
39) 《역경》 <계사상>(繫辭上) 참조.
40) 《맹자》 <진심하>(盡心下) 참조.
41) 《맹자》 <진심하>(盡心下) 참조.
42) 《맹자》 <이루상>(離婁上) 참조.
43) 《대학》 참조.
44) 이를 통해 볼 때, 이 편지는 1586년, 이지가 60세일 때 쓰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45) 자급(子及)은 방항(方沆, 1542~1608)의 자이다. 방항의 호는 인암(訒菴)으로, 복건(福建) 보전(莆田) 사람이다. 이지가 만년에 이 사람에게 보낸 편지가 《속분서》에 수록되어 있다(권1 <與方訒菴>) <명시기사》(明詩紀事, 《庚集》 권9)에 의하면, 형부낭중(刑部郎中)․운남첨사(雲南僉事) 등을 역임했다고 하는데, 이지와는 관직에 있을 때 함께 근무했던 사람으로 생각된다.
46) 《중용》 참조
47) 《노자》 <70장> 참조.
48) 오대(五臺)는 육광조(陸光祖, 1521~1597)의 호이다. 육광조의 자는 與繩이고, 절강(浙江) 평호(平湖) 사람이다. 이지의 《속장서》 권18에 전기가 수록되어 있다.
49) 《속분서》 권1 <초약후 태사에게>[與焦弱侯太史]에서 이지는 초굉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초동(楚侗, 경정향을 말함)선생께서 근래 <이조부>(二鳥賦)를 썼는데, 형은 그 글을 보았는지요? 그 어른이 이 아우를 가르치는 것을 잊지 않는 것에 실로 감격하여(반어적 표현임), 그 때 되는대로 몇 마디 비판의 말을 적어 답장했고, 또 몇 마디 적어 극명(克明, 경정향의 아들인듯)에게 부탁하여 전해달라고 했지요.” 이로써 보자면, 여기서 말하는 <이조부>는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주려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자례를 위하여 썼다고 경정향이 말한 것은 이지의 반발에 대한 변명이었을 것이다.
50) 《맹자》 <진심하>(盡心下) 참조.
51) 《맹자》 <만장상>(萬章上)에 나오는 이윤(伊尹)의 말이다. 이윤은 탕왕(湯王)이 하(夏)나라의 폭군 걸(桀)을 물리치고 상(商)나라를 세우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맹자》 <만장상>의 내용을 대략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윤은 유신(有莘)이라는 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탕왕이 융숭한 예물과 함께 사람을 보내 이윤을 초빙해오게 했다. 그러자 이윤은 ‘탕왕이 융숭한 예물로 나를 초빙한들 내가 무엇하러 가겠는가? 나는 그저 논밭에서 요․순의 도를 즐기며 살 뿐이다.’라고 대답했다. 탕왕이 세번째 사람을 보내 초빙하자, 이윤은 태도를 확 바꿔 말했다. ‘논밭에서 요․순의 도를 즐기며 사는 것보다는 이 시대 왕을 요․순같은 왕이 되게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이 시대 백성을 요․순의 백성같은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늘이 이 백성을 이 세상에 내려보낸 것은 선지자와 선각자로 하여금 후세의 사람들이 도를 알고 깨우치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선각자이다. 나는 이 백성이 이 도를 깨닫게 하겠다. 내가 그들을 깨닫게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52) 《맹자》 <공손추하>(公孫丑下) 참조.
53) 《맹자》 <공손추하>(公孫丑下) 참조.
54) 《논어》 <옹야>(雍也) 참조..
55) 경극념(耿克念)과 함께 경정향의 아들일 것으로 추정된다.
56) 축황피(祝黃陂)선생은 경정향의 제자 중 하나인 축세록(祝世祿, 1539~1610)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의 자는 연지(延之), 호는 무공(無功)이며, 강서(江西) 덕흥(德興) 사람이다. 하지만 추측일 뿐이다.
57) 고예부(高禮部)는 당시 예부상서로 있었던 고의(高儀)를 말한다. <예약>(豫約) 참조.

卷一 書答 答耿司寇

此來一番承教,方可稱真講學,方可稱真朋友。公不知何故而必欲教我,我亦不知何故而必欲求教于公,方可稱是不容已真機,自有莫知其然而然者矣。

嗟夫!朋友道絕久矣。余嘗謬謂千古有君臣,無朋友,豈過論歟!夫君猶龍也,下有逆鱗,犯者必死,然而以死諫者相踵也。何也?死而博死諫之名,則志士亦願為之,況未必死而遂有巨福耶?避害之心不足以勝其名利之心,以故犯害而不顧,況無其害而且有大利乎!

若夫朋友則不然:幸而入,則分毫無我益;不幸而不相入,則小者必爭,大者為仇。何心老至以此殺身,身殺而名又不成,此其昭昭可鑒也。故余謂千古無朋友者,謂無利也。是以犯顏敢諫之士,恒見于君臣之際,而絕不聞之友朋之間。今者何幸而見仆之于公耶!是可貴也。

又何幸而得公之教仆耶!真可羨也。快哉怡哉!居然複見愢愢切切景象矣。然則豈惟公愛依仿孔子,仆亦未嘗不願依仿之也。

惟公之所不容已者,在于泛愛人,而不欲其擇人;我之所不容已者,在于為吾道得人,而不欲輕以與人,微覺不同耳。公之所不容已者,乃人生十五歲以前《弟子職》諸篇入孝出弟等事,我之所不容已者,乃十五成人以後為大人明《大學》,欲去明明德于天下等事。公之所不容已者博,而惟在于痛癢之未;我之所不容已者專,而惟直收吾開眼之功。公之所不容已者,多雨露之滋潤,是故不請而自至,如村學訓蒙師然,以故取效寡而用力艱;我之所不容已者,多霜雪之凜冽,是故必待價而後沽,又如大將用兵,直先擒王,以故用力少而奏功大。雖各各手段不同,然其為不容已之本心一也。心苟一矣,則公不容已之論,固可以相忘于無言矣。若謂公之不容已者為是,我之不容已者為非;公之不容已者是聖學,我之不容已者是異學:則吾不能知之矣。公之不容已者是知其不可以已,而必欲其不已者,為真不容已;我之不容已者,是不知其不容已,而自然不容已者,非孔聖人之不容已:則吾又不能知之矣。恐公于此,尚有執己自是之病在。恐未可遽以人皆悅之,而遂自以為是,而遽非人之不是也。恐未可遽以在邦必聞,而遂居之不疑,而遂以人盡異學,通非孔、孟之正脈笑之也。

我謂公之不容已處若果是,則世人之不容已處總皆是;若世人之不容已處誠未是,則公之不容已處亦未必是也。此又我之真不容已處耳。未知是否,幸一教焉!

試觀公之行事,殊無甚異于人者。人盡如此,我亦如此,公亦如此。自朝至暮,自有知識以至今日,均之耕田而求食,買地而求種,架屋而求安,讀書而求科第,居官而求尊顯,博求風水以求福蔭子孫。種種日用,皆為自己身家計慮,無一厘為人謀者。及乎開口談學,便說爾為自己,我為他人,爾為自私,我欲利他;我憐東家之饑矣,又思西家之寒難可忍也;某等肯上門教人矣,是孔、孟之志也,某等不肯會人,是自私自利之徒也,某行雖不謹,而肯與人為善,某等行雖端謹,而好以佛法害人。以此而觀,所講者未必公之所行,所行者又公之所不講,其與言顧行、行顧言何異乎?以是謂非孔聖之訓可乎?翻思此等,反不如市井小夫,身履是事,口便說是事,作生意者但說生意,力田作者但說力田,鑿鑿有味,真有德之言,令人聽之忘厭倦矣。

夫孔子所云言顧行者,何也?彼自謂于子臣弟友之道有未能,蓋真未之能,非假謙也。

人生世間,惟是四者終身用之,安有盡期。若謂我能,則自止而不複有進矣。聖人知此最難盡,故自謂未能。已實未能,則說我不能,是言顧其行也。說我未能,實是不能,是行顧其言也。故為,故為有恒,故為主忠信,故為毋自欺,故為真聖人耳。不似今人全不知己之未能,而務以此四者責人教人。所求于人者重,而所自任者輕,人其肯信之乎?

聖人不責人之必能,是以人人皆可以為聖。故陽明先生曰:“滿街皆聖人。”佛氏亦曰:“即心即佛,人人是佛。”夫惟人人之皆聖人也,是以聖人無別不容已道理可以示人也,故曰:“予欲無言”。夫惟人人之皆佛也,是以佛未嘗度眾生也。無眾生相,安有人相;無道理相,安有我相。無我相,故能舍己;無人相,故能從人。蓋強之也,以親見人人之皆佛而善與人同故也。善既與人同,何獨于我而有善乎?人與我既同此善,何有一人之善而不可取乎?故曰:“自耕稼陶漁以至為帝,無非取諸人者。”後人推而誦之曰:即此取人為善,便自與人為善矣。舜初未嘗有欲與人為善之心也,使舜先存與善之心以取人,則其取善也必不誠。人心至神,亦遂不之與,舜亦必不能以與之矣。舜惟終身知善之在人,吾惟取之而已。

耕稼陶漁之人既無不可取,則千聖萬賢之善,獨不可取乎?又何必專學孔子而後為正脈也。

夫人既無不可取之善,則我自無善可與,無道可言矣。然則子禮不許講學之談,亦太苦心矣,安在其為挫抑柳老,而必欲為柳老伸屈,為柳老遮護至此乎?又安見其為子禮之口過,而又欲為子禮掩蓋之耶?公之用心,亦太瑣細矣!既已長篇大篇書行世間,又令別人勿傳,是何背戾也?反覆詳玩,公之用心亦太不直矣!且于禮未嘗自認以為己過,縱有過,渠亦不自蓋覆,而公乃反為之覆,此誠何心也?古之君子,其過也如日月之食,人皆見而又皆仰;今之君子,豈徒順之,而又為之辭。公其以為何如乎?柳老平生正坐冥然寂然,不以介懷,故不長進,公獨以為柳老誇,又何也?豈公有所憾于柳老而不欲其長進耶?然則于禮之愛柳老者心髓,公之愛柳老者皮膚,又不言可知矣。柳老于子禮為兄,渠之兄弟尚多也,而獨注意于柳老;柳老又不在仕途,又不與之鄰舍與田,無可爭者。其不為毀柳老以成其私,又可知矣。既無半點私意,則所云者純是一片赤心,公固聰明,何獨昧此乎?縱子禮之言不是,則當為子禮惜,而不當為柳老憂。若子禮之言是,則當為柳老惜,固宜將此平日自負孔聖正脈,不容已真機,直為柳老委曲開導。柳老惟知敬信公者也,所言未必不入也。今若此,則何益于柳老,柳老又何貴于與公相知哉!然則子禮口過之稱,亦為無可奈何,姑為是言以逭責耳。設使柳老所造已深,未易窺見,則公當大力柳老喜,而又不必患其介意矣。何也?遁世不見知而不悔,此學的也。眾人不知我之學,則吾為賢人矣,此可喜也。賢人不知我之學,則我為聖人矣,又不愈可喜乎?聖人不知我之學,則吾為神人矣,尤不愈可喜乎?當時知孔子者唯顏子,雖子貢之徒亦不之知,此真所以為孔子耳,又安在乎必于子禮之知之也?又安見其為挫抑柳老,使劉金吾諸公輩輕視我等也耶?我謂不患人之輕視我等,我等正自輕視耳。

區區護名,何時遮蓋得完耶?

且吾聞金吾亦人傑也,公切切焉欲其講學,是何主意?豈以公之行履,有加于金吾耶?

若有加,幸一一示我,我亦看得見也。若不能有加,而欲彼就我講此無益之虛談,是又何說也?吾恐不足以誑三尺之童子,而可以誑豪傑之士哉!然則孔子之講學非歟?孔子直謂聖愚一律,不容加損,所謂麒麟與凡獸並走,凡鳥與鳳皇齊飛,皆同類也。所謂萬物皆吾同體是也。而獨有出類之學,唯孔子知之,故孟子言之有味耳。然究其所以出類者,則在于巧中焉,巧處又不可容力。今不于不可用力處參究,而唯欲于致力處著腳,則已失孔、孟不傳之秘矣,此為何等事,而又可輕以與人談耶?

公聞此言,必以為異端人只宜以訓蒙為事,而但借“明明德”以為題目可矣,何必說此虛無寂滅之教,以研人邪?夫所謂仙佛與儒,皆其名耳。孔子知人之好名也,故以名教誘之;大雄氏知人之怕死,故以死懼之;老氏知人之貪生也,故以長生引之:皆不得已權立名色以化誘後人,非真實也。唯顏子知之,故曰夫子善誘。今某之行事,有一不與公同者乎?亦好做官,亦好富貴,亦有妻孥,亦有廬舍,亦有朋友,亦會賓客,公豈能勝我乎?何為乎公獨有學可講,獨有許多不容已處也?我既與公一同,則一切棄人倫、離妻室、削發披緇等語,公亦可以相忘于無言矣。何也?仆未嘗有一件不與公同也,但公為大官耳。學問豈因大官長乎?學問如因大官長,則孔、孟當不敢開口矣。

且東郭先生,非公所得而擬也。公郭先生專發揮陽明先生“良知”之旨,以繼往開來為己任,其妙處全在不避惡名以救同類之急,公其能此乎?我知公詳矣,公其再勿說謊也!須如東郭先生,方可說是真不容已。近時唯龍溪先生足以繼之,近溪先生稍能繼之。公繼東郭先生,終不得也。何也?名心太重也,回護太多也。實多惡也,而專談志仁無惡,實偏私所好也,而專談泛愛博愛;實執定己見也,而專談不可自是。公看近溪有此乎?龍溪有此乎?

況東郭哉!此非強為爾也,諸老皆實實見得善與人同,不容分別故耳。既無分別,又何惡乎?

公今種種分別如此,舉世道學無有當公心者,雖以心齋先生,亦在雜種不入公彀率矣,況其他乎!其同時所喜者,僅僅胡廬山耳。麻城周柳塘、新邑吳少虞,只此二公為特出,則公之取善亦太狹矣,何以能明明德于關下也?

我非不知敬順公之為美也,以“齊人莫如我敬王”也。亦非不知順公則公必愛我,公既愛我則合縣士民俱禮敬我,吳少虞亦必敬我,官吏師生人等俱來敬我,何等好過日子,何等快活。公以眾人俱來敬我,終不如公一人獨知敬我;公一人敬我,終不如公之自敬也。

籲!公果能自敬,則余何說乎!自敬伊何?戒謹不睹,恐懼不聞,毋自欺,求自傲,慎其獨。孔聖人之自傲者蓋如此。若不能自敬,而能敬人,來之有也。所謂本亂而求未之治,無是理也。故曰“壹是皆以修身為本”。此正脈也,此至易至簡之學,守約施博之道,故曰“君子之守,修其身而天下平”,又曰“人人親其親,長其長而天下平”,又曰“上老老而民興孝”,更不言如何去平天下,但只道修身二字而已。孔門之教,如此而已,吾不知何處更有不容已之說也。

公勿以修身為易,明明德為不難,恐人便不肯用工夫也。實實欲明明德者,工夫正好艱難,在埋頭二三十年,尚未得到手,如何可說無工夫也?龍溪先生年至九十,自二十歲為學,又得明師,所探討者盡天下書,所求正者盡四方人,到未年方得實詣,可謂無工夫乎?公但用自己工夫,勿愁人無工夫用也。有志者自然來共學,無志者雖與之談何益!近溪先生從幼聞道,一第十年乃官,至今七十二歲,猶曆涉江湖各處訪人,豈專為傳法計歟!蓋亦有不容已者。此其一生好名,近來稍知藏名之法,曆江右、兩浙、姑蘇以至秣陵,無一道學不去參訪,雖弟于之求師,未有若彼之切者,可謂致了良知,更無工夫乎?然則公第用起工夫耳,儒家書盡足參詳,不必別觀釋典也。解釋文字,終難契入;執定己見,終難空空;耘人之田,終荒家穰。願公元以芻蕘陶漁之見而棄忽之也。古人甚好察此言耳。

名乃錮身之鎖,聞近老一路無一人相知信者。柳塘初在家時,讀其書便十分相信,到南昌則七分,至建昌又減二分,則得五分耳。及乎到南京,雖求一分相信,亦無有矣。柳塘之徒曾子,雖有一二分相信,大概亦多驚訝。焦弱侯自謂聰明特達,方子及亦以豪傑自負,皆棄置大法師不理會之矣。乃知真具只眼者舉世絕少,而坐令近老受遁世不見知之妙用也。至矣,近老之善藏其用也。曾子回,對我言曰:“近老無知者,唯先生一人知之。”籲!我若不知近老,則近老有何用乎!惟我一人知之足矣,何用多知乎!多知即不中用,猶是近名之累,曷足貴歟!故曰“知我者希,則我貴矣”。吾不甘近老之太尊貴也。近老于生,豈同調乎,正爾似公舉動耳。乃生深信之,何也?五台與生稍相似,公又謂五台公心熱,仆心太冷。

籲!何其相馬于牝牡驪黃之間也!

展轉千百言,略不識忌諱,又家貧無代書者,執筆草草,絕不成句;又不敢縱筆作大字,恐重取怒于公。書完,遂封上。極知當重病數十日矣,蓋賤體尚未甚平,此勞遂難當。公得公一二相信,即刻死填溝壑,亦甚甘願,公思仆此等何心也?仆佛學也,豈欲與公爭名乎,抑爭官乎?皆無之矣。公倘不信仆,試以仆此意質之五台,以為何如?以五台公所信也。若以五台亦佛學,試以問之近溪老何如?

公又云“前者《二鳥賦》原為子禮而發,不為公也”。夫《二鳥賦》若專為子禮而發,是何待子禮之厚,而視不肖之薄也!生非護惜人也,但能攻發吾之過惡,便是吾之師。吾求公施大爐錘久矣。物不經鍛煉,終難成器;人不得切琢,終不成人。吾來求友,非求名也;吾來求道,非求聲稱也。公其勿重為我蓋覆可焉!我不喜吾之無過而喜吾過之在人,我不患吾之有過而患吾過之不顯。此佛說也,非魔說也;此確論也,非戲論也。公試虛其心以觀之,何如?

每思公之所以執迷不返者,其病在多欲。古人無他巧妙,直以寡欲為養心之功,誠有味也,公今既宗孔于矣,又欲兼通諸聖之長:又欲清,又欲任,又欲和。既于聖人之所以繼往開來者,無日夜而不發揮,又于世人之所以光前裕後者,無時刻而不系念。又以世人之念為俗念,又欲時時蓋覆,只單顯出繼往開來不容已本心以示于人。分明貪高位厚祿之足以尊顯也,三品二品之足以褒寵父祖二親也,此公之真不容已處也,是正念也。卻回護之曰:“我為堯、舜君民而出也,吾以先知先覺自任而出也。”是又欲蓋覆此欲也,非公不容已之真本心也。且此又是伊尹志,非孔子志也。孔、孟之志,公豈不聞之乎!孔孟之志曰:“故將大有為之君,必有所不召之臣,欲有謀焉則就之,其尊德樂道不如是,不足與有力也,”是以魯謬公無人乎于思之側、則不能安子思。孔、孟之家法,其自重如此,其重道也又如此。公法仲尼者,何獨于此而不法,而必以法伊尹為也!豈以此非孔聖人之真不容已處乎?吾謂孔、孟當此時若徒隨行逐隊,施進旅退,以戀崇階,則甯終身空室陋巷窮餓而不悔矣。此顏子之善學孔子處也。

不特是也。分明撼克明好超脫不肯注意生孫,卻回護之曰:“吾家子侄好超脫,不以嗣續為念。”乃又錯怪李卓老曰:“因他超脫,不以嗣續為重,故兒效之耳。”籲籲!生子生孫何事也,乃亦效人乎!且超脫又不當生子乎!即兒好超脫,故未有孫,而公不超脫者也,何故不見多男子乎?我連生四子俱不育,老來無力,故以命自安,實未嘗超脫也。公何誣我之甚乎!

又不特是也。分明憾克明好超脫,不肯注意舉子業,卻回護之曰:“吾家子侄好超脫,不肯著實盡平持內事。”乃又錯怪李卓老曰:“因他超脫,不以功名為重,故害我家兒子。”

籲籲!卓吾自二十九歲做官以至五十三歲乃休,何曾有半點超脫也!克明年年去北京進場,功名何曾輕乎!時運未至,渠亦朱嘗不堅忍以俟,而翁性急,乃歸咎于舉業之不工,是而翁欲心太急也。世間工此者何限,必皆一一中選,一一早中,則李、杜文章不當見遺,而我與公亦不可以僥幸目之矣。

夫所謂超脫者,如淵明之徒,官既懶做,家事又懶治,乃可耳。今公自謂不超脫者固能理家;而克明之超脫者亦未嘗棄家不理也,又何可以超脫憾之也!既能超脫足追陶公,我能為公致賀,不必憾也,此皆多欲之故,故致背戾,故致錯亂,故致昏蔽如此耳。且克明何如人也,筋骨如鐵,而肯效顰學步從人腳跟走乎!即依人便是優人,亦不得謂之克明矣。故使克明即不中舉,即不中進士,即不作大官,亦當為天地間有數奇品,超類絕倫,而可以公眼前蹊徑限之歟?

吳少虞曾對我言曰:“楚倥放肆無忌憚,皆爾教之。”我曰:“安得此無天理之談乎?”

吳曰:“雖然,非爾亦由爾,故放肆方穩妥也。”籲籲!楚倥何曾放肆乎?且彼乃吾師,吾惟知師之而已。渠眼空四海,而又肯隨人腳跟定乎?苟如此,亦不得謂之楚倥矣。大抵吳之一言一動,皆自公來,若出自公意,公亦太乖張矣。縱不具只眼,獨可無眼乎!吾謂公且虛心以聽賤子一言,勿蹉跎誤了一生也。如欲專為光前裕後事,吾知公必不甘,吾知公決兼為繼往開來之事者也。一身而二任,雖孔聖必不能。故鯉死則死矣,顏死則慟焉,妻出更不複再娶,鯉死更不聞再買妾以求複生子。無他,為重道也;為道既重,則其他自不入念矣。公于此亦可遽以超脫病之乎!

然吾觀公,實未嘗有傳道之意,實未嘗有重道之念。自公倡道以來,誰是接公道柄者乎?

他處我不知,新邑是誰繼公之真脈者乎?面從而背違,身教自相與遵守,言教則半句不曾奉行之矣。以故,我絕不欲與此間人相接,他亦自不與我接。何者?我無可趨之勢故耳。籲籲!

為師者忘其奔走承奉而來也,乃直任之而不辭曰,“吾道德之所感召也”;為弟子者亦忘其為趨勢附熱而至也,乃久假而不歸曰,“吾師道也,吾友德也”。籲!以此為學道,即稍稍有志向著,亦不願與之交,況如仆哉!其杜門不出,非簡亢也,非絕人逃世也;若欲逃世,則入山之深矣。麻城去公稍遠,人又頗多,公之言教亦頗未及,故其中亦自有真人稍可相與處耳。雖上智之資未可即得,然個個與語,自然不俗。黃陂祝先生舊曾屢會之于白下,生初謂此人質實可與共學,特氣骨太弱耳。近會方知其能不昧自心,雖非肝膽盡露者,亦可謂能吐肝膽者矣。使其稍加健猛,亦足承載此事,願公加意培植之也。

聞麻城新選邑侯初到,柳塘因之欲議立會,請父母為會主。余謂父母愛民,自有本分事,日夜不得閑空,何必另標門戶,使合縣分黨也?與會者為賢,則不與會者為不肖矣。使人人有不肖之嫌,是我輩起之也。且父母在,誰不願入會乎?既願入會,則入會者必多不肖,既多不肖,則賢者必不肯來;是此會專為會不肖也。豈為會之初意則然哉,其勢不得不至此耳。

況為會何益于父母,徒使小子乘此紛擾縣公。縣公賢則處置自妙,然猶未免分費精神,使之不得專理民事;設使聰明未必過人,則此會即為斷性命之刀斧矣,有仁心者肯為此乎!蓋縣公若果以性命為重,則能自求師尋友,不必我代之勞苦矣。何也?我思我學道時,正是高閣老、楊吏部、高禮部諸公禁忌之時,此時絕無有會,亦絕無有開口說此件者。我時欲此件切,自然尋得朋友,自能會了許多不言之師,安在必立會而後為學乎!此事易曉,乃柳塘亦不知,何也?若謂柳塘之道,舉縣門生無有一個接得者,今欲趁此傳與縣公,則宜自將此道指點縣公,亦不宜將此不得悟入者盡數招集以亂聰聽也,若謂縣公得道,柳塘欲聞,則柳塘自與之商證可矣,且縣公有道,縣公自不容已,自能取人會人,亦不必我代之主赤幟也。反覆思惟,總是名心牽引,不得不顛倒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