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소설古今小說-오보안이 가정을 희생하여 친구를 살려내다吳保安棄家贖友 1

오보안이 가정을 희생하여 친구를 살려내다吳保安棄家贖友

옛사람의 사귐은 마음을 보고,
지금 사람의 사귐은 체면을 본다네.
마음으로 맺으니 생사마저도 함께 하고,
체면을 따지니 곤궁함조차도 같이 하지 못하네.
거리엔 도움이 될 자를 찾는 숱한 저 발걸음들,
밤낮없이 줄을 대려는 저 사람들.
서로 이야기할 땐 처자라도 내줄 듯 비분강개하고,
술 한 잔 걸치면 모두 친형제라도 된 듯.
허나 작은 이익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우정인데,
인생의 난관을 어찌 함께 헤쳐 나가리.
그대들은 죽음마저도 같이하였던 양각애와 좌백도1) 의 우정을 아는가,
만고에 길이 전하는 그 숭고한 우정을.

위 작품은 친구 사귐에 대한 노래란 뜻의 「결교행結交行」이란 유명한 사이다. 염량세태를 비판하면서 우정의 소중함을 잘 읊고 있다. 평소 술이라도 같이 마실 때는 호형호제하다가 무슨 이해관계라도 생기면 안면을 싹 바꾸는 것이 세상의 인심이다. 술친구가 아무리 많아도 막상 힘든 일이 생기면 주위에 아무도 남지 않는 게 태반이고 아침에는 친구였다가 해 질 녘에는 원수로 바뀌고 술을 같이 마시다가도 바로 화살을 재어 겨누는 게 세태라. 도연명이 친구를 끊겠다고 한 것이나2) 혜숙야가 친구 사귐을 그만두겠다고 한 것이나3) 유효표가 사귐을 그만두어야할 친구의 종류를 밝힌 「광절교론廣絶交論」을 지은 것이나4) 모두 야박한 세상인심을 욕하고 분통을 터트린 것이라. 오늘 내가 두 사람 이야기를 하려네. 이 두 사람은 일면식도 없었으나 서로 의기투합하여 서로 환난을 함께 하고 생사마저도 함께 하였으니 정말 마음으로 친구를 사귄 표본이라고 할 것이다.

친구를 믿고 모자를 털고 기다리던 공우貢禹,5)
자기를 알아주는 자를 위해 죽음의 칼을 움켜쥐었던 형경荊卿.6)

말하자면, 당나라 개원연간에 재상인 대국공代國公 곽진郭震은 자가 원진元振이며 하북 무양武陽사람이다. 한편 곽중상郭仲翔이란 자가 있었으니 그자는 바로 곽진의 조카로 문무를 겸비하였으나 성격이 호탕하며 자질구레한 규범에 얽매이기를 싫어하여 그를 천거하는 자들이 아무도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나이가 들었음에도 아무것도 성취한 것이 없는 걸 보고서는 걱정이 들어 편지를 한 통 써서 주고는 서울로 가서 큰아버지 곽진을 뵙고서 자리를 부탁해보라 하였다. 곽진은 중상을 보고서는 이렇게 일렀다.

“대장부라면 모름지기 과거에서 장원급제를 하여 청운의 뜻을 이루거나 아니면 반초班超7)나 부개자傅介子8)처럼 변방을 다스려 공을 세우고 부귀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지 친척을 사다리 삼아 올라가 본들 그게 어디까지 높이 멀리 올라갈 수 있겠느냐?”

곽중상은 그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며 맞장구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마침 남쪽에서 조정에 보고가 올라왔는데 동굴에서 사는 족속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었다. 원래 측천황후가 통치할 무렵에는 남만 무리들을 달래기 위하여 이곳 9계溪 18동洞 지역에 매년 위로금을 전해주고 3년에 한 번꼴로 대대적인 위로금을 전해주곤 하였다. 그러나 현종玄宗황제(712-756재위)가 즉위한 다음부터는 이 제도를 없애버렸다. 이 때문에 남만의 무리들이 반란을 일으키고는 중원을 향하여 칼끝을 겨누었다. 이에 조정은 이몽李蒙을 요주姚州도독으로 임명하고 병사를 이끌고 가서 난을 평정하도록 하였다. 이몽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출정하려다 특별히 재상 곽진을 찾아뵙고 인사를 올렸다. 곽진이 이몽에게 당부하였다.

“옛날 제갈공명이 남만을 칠 때 칠종칠금한 것은 무력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들을 복속시키고자 함이었소이다. 장군은 이번 평정 작업을 신중하게 처리하셔서 일을 성공리에 마무리하시기를 바라오. 내 조카인 곽중상이 나름 재주가 있으니 이번 출정에 데리고 가셔서 한 번 써보시고 만약 그가 공을 세우거들랑 나중에 미관말직이라도 하나 챙겨주시기 바라오.”

곽진은 바로 곽중상을 불러내어 이몽에게 인사를 시켰다. 이몽이 곽중상을 만나보니 재주가 비범한데다 당대의 재상 곽진이 특별히 부탁까지 하였으니 어찌 감히 거절할 수가 있겠는가? 이몽은 즉시 곽중상을 행군판관行軍判官에 임명하였다. 곽중상은 큰 아버지인 곽진에게 하직인사를 올리고 이몽을 따라 길을 떠났다.

군사 행렬이 검남劍南에 이르렀을 때 곽중상은 지금 동천東川 수주遂州 방의위方義尉를 맡고 있으며 동향인 오보안, 자는 영고永固라 하는 자가 인편에 보내온 편지를 받게 되었다. 사실 곽중상은 오보안과 일면식도 없었지만 오보안이 지위는 낮아도 의기가 넘치고 학식이 빼어난 자라는 소문만큼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곽중상은 즉시 봉투를 열어 그 편지를 꺼내어 읽어 보았다.

불초한 소인 오보안은 다행히도 귀하와 동향이었으나 여태껏 인사 한 번 제대로 못 드리고 그저 귀하의 덕을 사모하고 있기만 하였나이다. 귀하는 재주가 비상하니 이몽장군을 모시고 난을 평정하는 일 역시 수일 내에 성공을 거두리라고 확신합니다. 저는 나름 학식을 수년간 닦아왔다고 자부하나 이렇게 고향과는 천리만리 떨어진 곳에서 미관말직을 맡고 있을 따름입니다. 하나 그 미관말직마저 이제 임기가 다 찼지만 이부의 보직 임명 기준이 녹록치 않아 다른 보직을 받을 수 있을지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귀하는 나라를 걱정하는 의기가 가득하시고 후덕한 맘씨를 지닌 분이라 들었습니다. 지금 대군을 이끌고 난을 평정하러 길을 떠나는 중이니 바야흐로 널리 사람이 필요한 때일 듯합니다. 저와의 동향의 정을 생각하셔서 보잘 것 없는 자리라도 하나 마련해주셔서 제가 작은 공이나마 세울 수 있도록 하여주신다면 귀하의 그 태산 같은 은혜를 어찌 감히 잊겠나이까?

곽중상은 그 편지를 읽고 나서 한참이나 탄식하였다.

“이 사람은 나랑 일면식도 없지만 자신에게 위급한 일이 닥쳤을 때 나를 믿고 이렇게 도움을 요청하니 이는 내 속을 깊이 아는 처사라. 대장부가 상대방의 급한 처지를 알고서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이 역시 부끄러운 일이 아니랴?”

곽중상은 이몽에게 오보안의 재주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그를 데려와 같이 일하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이몽이 허락하고서 바로 방의위 오보안을 관기管記에 임명한다는 문서를 준비하여 차인을 시켜 수주로 발송하였다. 문서를 발송하고 나자마자 정탐병이 보고하기를 남만 병사들이 창궐하여 중원 남부 지방까지 공략해 들어오고 있다 하였다. 이몽은 명령을 내려 병사들에게 밤낮을 가리지 말고 달려가도록 하였다. 병사들이 요주에 이르러 마침 그 지역에서 노략질하는 남만 병사들을 만나 그들이 미처 대비하지 못한 틈을 타서 일시에 공격하여 그들을 사방으로 흩트리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몽은 자신 군대의 위용을 믿고 서 남만 병사들을 쫓아 50리 길을 짓쳐 들어갔다. 날이 저물어 병사들이 진을 치고 머물려 할 때 곽중상은 이몽에게 이렇게 간하였다.

“남만 병사들은 탐욕스럽고 꼼수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장군께서 그들을 크게 무찔러 장군의 명성이 이미 하늘을 찌르고 있으니 이제 군사를 돌리서도 좋을 것 같습니다. 대신 사람을 파견하여 다시 한 번 장군의 위엄을 각인시키시고 그들로 하여금 중원의 말씀에 귀 기울이도록 하여, 본진이 적진 깊숙이 들어가 예기치 못한 변고에 빠져들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듣고서 이몽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남만 병사들은 이제 바야흐로 기세가 떨어졌는데 이 틈을 타서 저놈들의 소굴을 소탕하지 않고 언제 한단 말인가. 그대는 아무 말 말고 내가 어떻게 적들을 처리하는지 지켜보기나 하라.”

다음 날 진을 거두고 다시 행군을 시작하였다. 며칠을 행군하여 드디어 중원과 남만의 경계 지역에 다다랐다. 사방에 높은 봉우리들이 삐죽삐죽 솟아나 있고 초목이 봉우리와 계곡을 모조리 덮고 있어 도대체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숲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이몽은 와락 겁이나 명령을 내려 일단 평탄한 곳을 찾아 진을 치라고 하였다.

이때 남만인 하나를 만나 길을 물으려니 사방에서 갑자기 징소리 북소리가 요란하게 나더니 남만 병사들이 물밀듯이 쳐들어온다. 성이 몽蒙이요, 이름이 세노라細奴邏인 남만 추장이 나무로 만든 활과 시누대로 만든 화살을 매고서 사방으로 화살을 쏘아대는데 백발백중이라. 여러 부족의 병사들을 모두 이끌고 숲을 뚫고 봉우리를 넘어 달려드는데 마치 새가 하늘을 날아오고 날랜 짐승이 들판을 질주하듯이 힘 하나도 들이지 않고 달려왔다. 당나라 병사들은 마치 함정에 빠진 듯, 행군하면서 모든 힘 다 써버린 듯하니 어찌 제대로 적을 격퇴시킬 수 있으리! 이몽 장군이 아무리 용빼는 재주가 있다고 한들 이렇듯 생소하고 열악한 환경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으려니 휘하의 장병들이 모두 죽어나는 것을 보고서는 그저 탄식만 할 뿐이었다.

“곽중상의 조언을 듣지 않았더니 이렇게 저 짐승만도 못한 것들에게 모욕을 당하는구나.”

그는 신발에 붙여놓은 단검을 빼내어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당나라 병사들은 남만 땅에서 몰살당하였다. 후세 사람이 이를 읊은 시가 있도다.

마원馬援이 세운 기둥은 세월을 이기고 서 있고,
제갈량의 깃대는 구계九溪에 우뚝 솟아 있구나.
하나 저 당나라 병사들은 어쩌자고 저리 몰살을 당하였나,
이장군을 기용한 게 잘못이었던가.
더불어 이몽장군이 곽중상의 조언을 듣지 아니하여 패전을 자초한 것이라는 시도 전해온다.
이장군을 기용한 것이 잘못이 아니라,
대군을 이끌고 험악한 적진에 깊이 들어간 것이 잘못이라네.
곽중상의 충언을 듣고 회군을 하였더라면,
저 남만 군사들이 어찌 감히 당나라 군사를 공격하였으리.

이 전투에서 곽중상은 포로로 잡혔다. 세노라는 곽중상의 기상과 재주가 비범한 것을 보고서는 심문하여 그가 곽진의 조카임을 알아내었고 아울러 곽중상을 오라烏羅 휘하의 부하로 임명하였다. 본디 남만 족속들은 무슨 원대한 계획이 있어서 중국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재물을 탐하여 공격한 것이었다. 사로잡은 중국 사람들 역시 각 추장들끼리 나눠가졌다.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추장은 많이 차지하고, 작은 공을 세운 추장은 적게 차지하였다. 추장들은 분배받은 중국 사람이 학식이 있나없나를 따지지 아니하고 모두다 노예처럼 취급하여 나무하기, 풀베기, 말먹이기, 양치기 같은 일을 시켰다. 중국 사람을 많이 소유한 추장은 다른 추장에게 팔아 넘기기도 하였다. 그러니 잡혀온 중국 사람들 열에 아홉은 차라리 죽기를 바라는 것이라. 하지만 남만 사람들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지라 죽는 것마저도 제 맘대로 할 수 없어 갖은 고초를 묵묵히 견디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이번 전투에서 남만인들에게 포로로 잡힌 중국인들이 특히 많았다. 남만의 지도자들은 포로들을 일일이 심문하여 지위가 있고 돈이 좀 있는 자들을 철저히 가려내어 중국에 소식을 전하여 속전을 바치기를 강요하여 큰돈을 만들곤 하였다. 포로로 잡힌 중국인 가운데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 자들이 어디 한 사람이라도 있겠는가? 포로로 잡힌 사람들은 남만 추장의 이런 제안을 받으면 부귀빈천을 가리지 아니하고 즉시 고향으로 편지를 띄워 속전을 요청하곤 하였다. 편지를 받은 가족이 도저히 속전을 마련하지 못할 형편이면 어쩔 수 없을 것이나 그래도 일가친척 가운데 돈푼이라도 마련할 수 있다면 어찌 그냥 두고만 보겠는가? 저 무자비하고 탐욕스런 남만 추장들은 의지가지없고 가난한 중국인들에게도 비단 30필을 요구할 정도니 행세깨나 하는 중국인들에게는 얼마를 요구할지는 불문가지였다. 오라는 곽중상이 곽진의 조카라는 것을 알고서는 그의 속전으로 무려 비단 천 필을 요구하였다. 곽중상은 추장의 제안을 듣고서 이렇게 생각하였다.

“비단 천 필이라면 큰 아버님이 아니고서는 어찌해보지 못할 것인데 과연 내 편지를 누가 큰 아버님에게 전달해준단 말인가?”

곽중상은 갑자기 오보안이 떠올랐다.

“그래, 맞아! 오보안이 바로 나를 알아주는 친구아닌가! 그와 일면식도 없던 때에도 그의 편지 몇 줄을 읽어보고서 바로 그를 이몽장군에게 적극 추천하여 관기로 임명받게 한 적이 있지 않은가? 내가 그를 위하여 신경 써 준 것은 그 역시 잘 알고 있을 터. 그가 만약 부임이 늦어서 이번 전란에서 무사할 수 있었다면 지금쯤이면 요주에 도착하였을 것이니 내가 그에게 장안으로 달려가 나의 편지를 큰 아버지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해야겠구나.”

곽중상은 곧장 오보안에게 보낼 편지를 작성하였다. 편지에는 자신이 지금까지 겪은 고초와 남만의 추장이 돈을 요구하는 정황을 소상하게 적었다.

“만약 오보안 그대가 나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서 이 편지를 나의 큰아버지에게 전해주어 나의 속전이 당도한다면 나는 그래도 살아 돌아갈 수 있을 것이오. 만약 이 편지가 전달되지 않는다면 나는 살아서는 남만의 포로요, 죽어서는 남만의 귀신이 될 것이오. 나는 그대가 나를 그냥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라 믿소.”

곽중상은 말미에 시 한 수를 덧붙이는 것으로 편지를 마무리하였다.

이방에서 노예 노릇하던 기자箕子9),
변국에서 십 수 년을 볼모노릇 하던 소경蘇卿10), 그들도 결국 본국으로 돌아왔으리니.
그대는 의리와 인정이 넘치는 자,
바라노니, 그대 옛 현인처럼 나를 구해내기를.

1) 양각애와 좌백도의 우정에 대해서는 바로 이 책 제 7편 「양각애가 목숨을 바쳐 우정을 지키다羊角哀捨命全交」를 보라.
2) 도연명陶淵明(약 365-427)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친구들과의 교류도 끊고, 세상과의 인연도 끊으리라. 이제 다시 수레를 타고 세상에 나간들 무얼 하리요? 歸去來兮, 請息交以絶遊. 世與我而相遺. 復駕{言兮焉求.”라는 구절이 나온다.
3) 죽림칠현의 한 사람인 혜강嵇康(223-263)이 산도山濤(205-283)가 자신에게 사마司馬씨가 세운 진晉나라에서 벼슬하기를 권하자 「산도(거원巨源은 산도의 별명임)에게 보내는 절교 편지與山巨源絶交書」를 보내어 절교한 사실을 말한다.
4) 유준劉峻(462-521), 별명이 효표孝標이다. 그는 「광절교론廣絶交論」을 지어 당대의 문장가였던 임방任昉의 사후에 그 후손들이 고생하는데도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세태를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5) 공우(B. C. 127-B. C. 44) 한나라 선제宣帝 때, 낭야琅琊(지금의 산동 지방) 출신 사람이다. 왕길王吉과 절친이었으며, 왕길이 벼슬자리에 나가자 그를 임용한 자는 현명한 군주일 것이며, 그는 또 나를 잊지 않고 추천할 것이라 확신하고서 모자를 꺼내어 먼지를 떨어냈다고 하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6) 형가荊軻 연나라 태자 단의 부탁을 받고 칼 한 자루 달랑 들고 진나라 왕을 암살하러 떠났다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된 자이다. 그가 때를 만나지 못한 시절 그를 알아봐준 고점리高漸離나 전광田光 같은 자들 덕분에 연나라 태자를 만날 수도 있었고 그들 때문에 결국 자객의 길을 떠나기도 한 것이다.
7) 반초(32-102), 동한 시대의 뛰어난 장수이자, 외교관. 지금의 신장 위구르 지역을 탐사하고 개척한 공이 크다.
8) 부개자(?-B. C. 65) 서한의 뛰어난 장수이자 외교관. 서역 지역을 침공하는 외적의 우두머리를 목 베는 공을 세웠다.
9) 은나라의 마지막 왕 주紂임금의 숙부로서 주임금의 폭정을 막고자 여러 차례 간언을 하였으나 주임금이 끝내 듣지 아니하자 미친 척 머리를 풀어헤치고 멀리 도망가 남의 노예 노릇하였다고 한다.
10) 본명은 소무蘇武(B. C. 140 – B. C. 60), 별명이 자경子卿이다. 한나라의 사신으로 흉노를 방문하였다가 억류되어 19년이나 고생하였다가 가까스로 귀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