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세 도시 기행-중세의 도시로 3

도시의 설계 이론

도시 설계 이론에서 보아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고대 도시에도 여러 가지 독자적인 설계 이론이 있었다는 것은 《묵자(墨子)》나 《주례(周禮)》에서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와타나베 다카시(渡邊卓, 1912~1971)가 말한 바와 같이, 묵가가 전란의 와중에 수비하기 쉬운 도시의 건설을 말하고 있는 데 비해, 유가가 말하고 있는 것은 왕성의 건설 플랜이었다. 특히 유학의 교전(敎典)인 《주례》의 설계 이론은 많은 문제를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나바 도시사다(那波利貞, 1890~1970) 이래로 수도의 도시 플랜의 해석과 연관해 크게 주목을 받아 왔다.

왕성(王城)(다이지스(戴吉士), 《고공기도(考工記圖)》에 수록)

《주례》에서 말하는 것은 당연히 있어야 할 이상적인 왕성의 건설 플랜이었다. 그 이론에 관해 서술한 《주례》 동관(冬官) 「고공기(考工記)」에서 말하는 당연히 있어야 할 도성의 플랜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한 변이 3리인 정방형일 것. 그 각 변에 똑같은 간격으로 각각 3개의 문을 설치할 것. 그리고 그 각각에 대응하는 문에 세 갈래 길이 이어지도록 가로(街路)를 만들 것. 내부는 전체를 삼등분하여 정중앙에 왕성이 있고, 남면하여 왼쪽 곧 동쪽에 종묘를 두고, 오른쪽 곧 서쪽에 사직을 둘 것. 궁성의 뒤에는 저자(市)를 두고, 좌우에는 주민의 거주지를 둘 것.

《주례》 그 자체가 태생이나 전래에 관해 의문스러운 점이 많다. 하지만 유가가 한 무제의 유학 채용을 분수령으로 근 2천년 동안 중국에서 지배적인 학문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무시해서는 안 된다. 전한(前漢)의 무제(武帝) 이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래로 천하를 지배하는 제국의 도시 설계의 이론을 살피는 텍스트로서 한결같이 읽혀져 왔다.

하지만 이 ‘그렇게 있어야 한다’고 약속된 일을 온전히 지켰던 수도는 없었다. 어딘가 비슷하거나, 어딘가 비슷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연구와 관련한 것을 괴롭혀 왔다. 우리가 이제까지 알고 있던 현실의 도시와 설계이론을 얼마나 들어맞게 해석하고 있는지, 많은 논란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지금 이 문제에 깊이 들어가는 것은 삼가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 설계이론이 단순히 당연히 있어야 할 이상적인 도시의 형태만이 아니라 구조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궁전의 위치나 종묘와 사직의 위치, 또는 사람들의 거주지와 시장까지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 이론도 도시 내부를 균질하게 지배하려고 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된다. 이상적인 왕조를 유지하기 위한 이론으로, 그에 걸맞은 도시 구조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것을 완벽하게 따른 제국의 수도는 없었다. 구조나 형태에서는 그 나름의 이론을 갖고 있으면서도 시대에 따라 특색이 있었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시대는 변하고 세상도 변해 간다. 복잡해지는 시대에 접어들면, 그와 같이 단순한 도시 플랜의 이론으로는 당연히 감당할 수 없다.

창안(長安)

이를테면 당대(唐代)의 창안, 화려함으로 잘 알려진 제국의 수도는 언뜻 봐도 알 수 있듯이 《주례》의 규정에서 크게 벗어난다. 가로가 길고 궁성과 황성은 북쪽에 치우쳐 있다. 이 점에서 이미 정방형으로 정중앙에 궁성을 두어야 한다는 이론과 크게 다르다.

그밖에도 다른 곳은 많다. 문의 숫자도 시장의 위치도 다르다. 하지만 어엿한 중국의 수도였다. 하늘에 대응해 지상의 중심에 건설한 제국의 수도였던 것이다. 따라서 당이라는 시대에 당연히 있어야 할 도시로서 설계된 도시와 그 플랜으로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그러면 그 구조는 어떠했을까? 정연한 구조는 균일한 형태였던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렇게 보는 것은 잘못이다. 궁전 주변과 환경이 정돈된 곳은 유력한 황족과 귀족, 고급관료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왕조뿐 아니라 도시의 지배자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창안도 그 나름의 구조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창안성 복원도(長安城復元圖)(《중국고대건축사(中國古代建築史)》에 수록)

잘 알려진 대로 창안은 수(隋) 왕조의 다싱청(大興城)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처음에는 정연하게 설계되었다. 그 옛 모습은 복원상상도에 잘 남아 있다. 하지만 지도와 사료를 꼼꼼하게 읽으면, 설계 당초의 기초 플랜에 상당히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동쪽에 궁전이 세워지고, 동쪽의 춘밍먼(春明門) 옆에는 구획을 변형시켜 싱칭궁(興慶宮)을 세웠다. 이것은 원래의 플랜에 없던 것들이다. 왕조의 지배자였던 그들 황족과 귀족은 왕조가 “그렇게 있어야 한다”는 생각대로 설계되었던 창안을 자신들이 살기 좋게 변화시켰던 것이다. 그 결과 우리가 상상하고, 이야기에 적혀 있는 것과 같은 화려한 창안이 탄생되어 왔던 것이다.

세오 다츠히코(妹尾達彦)는 당대의 소설을 통해 그와 같은 도시 구조를 해석하고 실태를 보여주었다. 이에 의하면 제국의 이상과 구원(久遠)을 빌며 배치되고 운영되었을 본래의 구조와 형태는 소실되었다.

궁정과 궁전은 창안의 동쪽, 그것도 동북부에 치우쳐 있었고, 서민의 거주구는 서부에 집중되어 있었다. 서부는 서방에서 온 여행객들이 많은 곳이었다. 그 때문에 그들이 믿었던 종교의 사원도 집중되어 있었다. 궁전과 관청이 있는 동부에는 귀족과 고급 관료의 집들이 집중되었다. 서민의 거주지역에 인접한 것은 밭과 황무지였다. 이에 비해 귀족들의 거주구 근처에는 궁전과 정원이 있었다. 구조와 형태의 변혁은 제국의 수도 본래의 의미를 파괴하였지만, 완성된 새로운 형태는 귀족들에 유리한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했던 대로 도시의 생활을 즐겼던 것이다.

새로운 변화로

하지만 송대 이후의 서민의 대두와 그에 따른 서민 문화의 발전은 그런 사정을 허락하지 않았다. 당송의 교체로 전통적인 귀족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또 그런 지배의 이완은 성내의 규제를 완화했기에 이제껏 한정되었던 상업지구도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타났다. 그렇게 도시는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도시는 그때 그때 지배자에 봉사했던 것이다.

그런 변화와 특색의 결과는 이를테면, 지명의 변화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명은 도시의 표지였기에, 여기에 시대와 지역의 성격이 드러났다. 마치 일본의 쵸카마치(城下町)에는 쵸카마치의 지명이 있어, 고대 헤이안쿄(平安京)나 가마쿠라(鎌倉) 등[과 같은 도시]와는 지명의 계통을 달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당대에는 도시의 지명도 귀족의 시대에 걸맞게 왕조 풍의 우아한 이름이었다. 창안 성내 110개의 방(坊) 이름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 ‘충런팡(崇仁坊)’, ‘타이핑팡(太平坊)’, ‘융쟈팡(永嘉坊)’등등 경사스러운 이름으로 가득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궁전의 이름, 가로의 이름도 휘황찬란했다. 궁전의 이름이 다밍궁(大明宮), 창안을 동서로 나누는 메인 스트리트의 이름이 톈졔(天街) 또는 주췌졔(朱雀街)였다. 문의 이름도 마찬가지였다. ‘진광먼(金光門)’, ‘춘밍먼(春明門)’ 등 제국의 수도의 번영을 기원하는 것이었다. 도시는 경사스러운 이름으로 가득했다. 창안은 빛이 넘치는 도시이고, 상서로운 조짐이 가득한 곳이었다. 제국의 번영을 바라고 기원하는 기대를 담았던 지배자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지 않은가?

그런 배려는 물론 도시의 구조나 시스템에도 담겨 있었다. 거대한 중층의 건축물인 천자의 궁전은 북쪽에 있었다. 천자는 거기에서 백성들에게 군림했다. 그 주위를 에워싼 관료와 귀족들의 저택도 그런 경관을 보완한다. 성안을 종횡으로 달리는 가로도 황성의 주위는 한 블록 정도 더 넓었다. 도시의 중앙을 관통하는 톈졔(天街), 곧 주췌졔(朱雀街)는 특히 넓고 서민의 통행을 제한하였으며, 회나무가 가로를 장식했다. 그 주위에 있는 방(坊)은 도시의 경사스러운 ‘기(氣)’가 빠져나가지 않게 남북에는 문을 만들어놓지 않았다. 그리고 성안의 북쪽에는 《역(易)》의 건(乾)괘에 준하는 언덕(丘)도 있었다. 언덕(丘)은 [건괘의 모양처럼] ☰☰의 모습을 취해 류포(六坡)라 불렸다. 도시는 모두 황제나 귀족들이 염원하는 상서로운 조짐으로 넘쳐나고 가득 찼던 것이다.

그러나 송대에 들어서자 변화가 일어난다. 도시 자체가 정치적, 군사적인 도시라기보다는 상업적 도시로서의 성격이 강해져 거주민인 서민의 힘과 비율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런 변화가 성안의 도처에 나타났다. 특히 성안의 명칭과 지명이 그것을 나타낸다. [바야흐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던 서민은 강요된 이름과 지명 등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곳에 큰 점포와 유명인의 집이 있으면, 그것을 그 땅과 지역의 이름에 사용했던 것이다. 졘캉부(建康府)의 스치샹(侍其巷)이 좋은 예이다.

그밖에도 많은 예를 들 수 있다. 이를테면, 과거를 일등으로 합격한 사람이 살고 있는 ‘좡위안팡(狀元坊)’이 있다. 장원이라는 것은 과거를 일등의 성적으로 통과한 것이다. 판러우(潘樓)라는 큰 술집이 있어, 판러우졔(潘樓街)라는 거리도 있었다. 카이펑의 성문조차 속칭으로 읽어버렸다. 실로 모든 면에서 서민의 진출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토지의 기능과 형태를 보여주는 지명도 등장했다. 이를테면 즈런졔(職人街)나 상런졔(商人街) 등이다. 일본에서도 많이 보이는 봉건사회의 신분제를 나타내는 지명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런 변화가 순차적으로 하나의 도시에서 정확하게 파악되었던 것은 아니다. 힘을 잃은 도시는 방치되어 기록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토록 번창했던 화려한 도시 창안조차도 당(唐)이 붕괴하자 일거에 인구 수만의 도시로 전락했다. 그리고 황폐해졌다.

도시가 붕괴하고 있는 상황은 파악하기 어렵지만, 다른 도시들로부터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얼마든지 있다. 좀 더 도시가 붕괴해 가는 상황을 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