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세 도시 기행-중세의 도시로 2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중국의 도시 내부의 자잘한 수치를 헤아리는 것도 어렵지만, 그것뿐만이 아니다. 도시를 주재하는 것이 누구인가라는 것도 알아내기 어렵다.

중국의 도시에서 주재자는 관료였다. 관료들은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의 대리인으로서 수도에서 지방으로 파견된다. 그들은 수(隋) 이래로는 선거(選擧), 송(宋) 이래로는 과거라 불렸던 선발 시스템을 바탕으로 조직된 관료제 하에 부임해 정치를 행한다. 도시는 그들의 부임지로서 존재한다.

중국의 도시가 성으로서도 존재했다는 것은 이미 말했던 대로다. 둘레에 성벽을 두르고, 그 안에는 관청이 있다. 도시는 지배의 거점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도시가 한 줌의 관료들에 의해서만 지배된 게 아니라는 것 역시 주지의 사실이다. 관료에 버금가는 것으로서 군대가 있고, 서리라 불렸던 관청의 하급 관리들도 있다. 그밖에도 도시에 사는 지주나 상인, 노동자도 있고, 부랑자도 있다. 유복한 이도 있는가 하면,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에 급급한 이도 있어 실로 잡다한 이들로 가득했다. 통상적으로 그들이 도시의 활력을 책임진다. 그리고 그들은 지명에 이름을 남긴다. [물론] 그들 모두가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던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일대에서만 알려져 있는 이도 많다.

그들의 힘이 의외로 컸던 것은 졘캉부(建康府)의 여행에서 스치샹(侍其巷)에 관해서 시사한 대로다. 도시나 지역에 대해 힘이 없던 이들은 지명에 이름을 남기지 않는다.

하지만 현재의 사료나 연구 상태로 말하자면, 이를테면 도시의 경제력이나 도시를 좌지우지했던 세력 등을 헤아리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서술했던 것처럼, 도시의 행정 구역을 충분히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행정 구역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은 사료가 그 점을 의식해 편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시 인구뿐 아니라 도시의 관리직이나 도시 자체에 드러난 세액도 파악할 수가 없다.

이것은 대단히 기묘한 사실을 우리에게 시사해준다. 엄연한 성벽을 갖춘 도시가 존재하면서도 제도적으로는 도시가 존재하지 않은 것이 된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현재의 도시론을 염두에 둔 우리의 일방적인 오류인지도 모른다. 공들여 찾아 나서면 우리들도 이해할 수 있는 제도가 적기는 하지만,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시의 성문을 열고 닫는 담당자나 불조심을 담당한 이, 경찰의 임무를 맡은 사람 등, 여러 가지 직종이 도시 또는 성문 내의 전문적인 직종으로 흔적을 남긴다. 물론 명확하게 그것과 판별할 수 있는 것도 있다. 당대에 한정된 거주구인 ‘방(坊)’의 문을 열고 닫는 것 등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도시적이라고 인정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직장이 교외에 걸쳐 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도시를 도시로 파악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엄연하게 도시가 존재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고정 관념으로 받아들여 중국 도시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탐구할 필요가 있다.

도시의 형태

조금 장황하다고 생각될지도 모르지만, 중국 도시를 고찰하는 방법에 관해 서술했다. 다음으로는 중세 도시의 원형과 형태를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도시구조다. 중국의 도시는 복잡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중국 그 자체에 유래한다. 북쪽의 황토 고원과 남쪽의 습지가 그것이다. 사막이 있는가 하면 산악지대도 있다. 변경에는 이민족과 대치하고 있는 도시도 있고, 풍부한 물산의 혜택으로 쾌적하게 살고 있는 도시도 있다. 중국에는 여러 형태의 도시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탐구하고자 하는 송대도 마찬가지다.

남아 있는 사료로 보면, 성내에는 당시에 이미 구조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문학과 교육을 담당한 지구(地區)가 있는가 하면, 상업 지구도 있었다. 이러한 도시 가운데서 역할 분담이 일어난 것은 당 왕조 때부터라는 사실을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하고 있다. 송대에 보이는 도시의 구조 분화는 이미 전대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도시라는 것이 성립 단계부터 내부에 구조적인 차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시의 내부가 모두 균질했던 것은 아니다. 도시가 비록 단순한 구조였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다른 부분이 모아져서 성립되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도시는 ‘쪽매 붙임 세공(寄木細工)’, 즉 여러 조각의 나무를 모아서 하나의 조상(彫像)을 만드는 목조(木彫) 기법의 다면체였다.

이것은 고대사회에도 마찬가지다. 도시라고 하는 것이 통상적으로 시대를 상징한다고 생각한다면, 고대 도시 역시도 원시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고대 도시에서도 귀족이 사는 지역과 서민이 사는 지역의 분화가 사실로 인정되고, 약간의 공장 같은 것이 집중되어 있는 곳도 인정되고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특별히 유별난 것은 아니다.

고대건 중세건 근대건 도시에서 거주지 분리나 기능의 차이가 받아들여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런 구조나 도시 기능의 존재 방식이 시대에 따라 그런 특색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그렇지 않은 지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자면 도시는 모든 것이 집중되어 그 밖의 다양한 변화가 일어나는 곳이다.

곧 첨단의 활동이 행해지는 장소, 시대를 반영하는 동시에 시대를 초월한 현상이 보여지는 장소, 이것이 도시인 것이다. 따라서 그런 현상에 미혹되지 않고 도시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린즈臨淄

이를테면, 전국시대 제의 수도인 린즈(臨淄)를 예로 들어보자. 전국시대의 제나라는 지금의 산둥(山東) 쪽에 있어, 어염(魚鹽)의 이점을 바탕으로 번창한 나라였다. 강대한 나라의 수도는 번창하게 마련이다. 린즈 역시 크게 번창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춘추시대의 도시는 큰 것도 1천 호를 넘기는 것이 많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도시의 발전과 확대라는 의미에서 보자면, 여전히 원시적인 시대였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전국시대가 되면, 1만 호 이상의 도시가 출현하기 시작한다. 사회 경제의 발전이 그 이유였지만, 천하가 차츰 통일을 향해 나아갔기에 대국이 출현하게 된 것 역시 또 하나의 요인이었다. 대국의 출현과 함께 거대한 도시도 나타났던 것이다. 연(燕)의 샤두(下都), 조(趙)의 한단(邯鄲)은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린즈는 그 가운데서도 유별나게 큰 도시였다.

권모술수가 난무했던 당시의 정치 정세를 기록한 책으로 유명한 󰡔전국책󰡕이 있다. 시대를 통일로 이끌어가려고 획책했던 대국. 그 안에서 자신의 재능과 지식을 무기로 활약했던 책략가들. 진정 흥미로운 책이지만, 그 가운데 당시 도시의 모습이 나오고 있다.

날로 강대해져 가는 것이 서방의 진(秦)이었다. 그 진나라에 나머지 육국, 곧 조(趙), 연(燕), 위(魏), 한(韓), 제(齊), 초(楚)가 합종하여 대적해야 한다고 제나라에 합종책을 유세했던 것이 쑤친(蘇秦)이다. 진즉이 진의 강성은 막을 수 없고, 그것과 협력해 안심입명(安心立命)을 도모해야 한다는 연형책을 유세했던 이가 장이(張儀)다. 󰡔전국책󰡕은 이 두 사람의 활약으로 점철되어 있다.

린즈 제국 고성 첩탐 실측도(臨淄齊國故城鉆探實測圖)
<문물(文物)> 1972~5. 전국시대의 도시에서도 구조의 분화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제나라 왕에게 합종책을 유세한 쑤친은 린즈의 부강과 번영을 술회했다. 따라서 약간의 과장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다고 하더라도 린즈의 부강한 모습은 놀랄 만한 것이 있다.

쑤친은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성내의 호구 수는 7만 호이다. 매호의 성년 남자는 세 사람이기에 21만 명의 성년 남자가 있다.” 이것으로 추정해, 여기에 노인과 여성, 아이를 더하면 최저 50만 명이 넘어버린다. 당시의 도시 인구로서는 놀랄 만큼 거대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송대 또는 현대에 버금가는 대도시인 것이다. 중국 도시의 비정상적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이것뿐이 아니다. 거리에는 수레와 사람이 빽빽하게 들어차 정체가 일어났다. 사람이 팔을 뻗으면 소매가 장막처럼 한 줄로 이어지고, 땀을 흘리면 비처럼 흩날리는 듯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치 섣달 그믐날의 시장과 같은 풍경이다. 과장이 있기는 해도 당시 성황을 이루고 있던 모습이 엿보이지 않는가?

거기다가 도시 설비가 정비되었다. 복원 상상도를 보면 궁전에 집중된 고급 주택가도 있는가 하면, 공장지대도 있다. 쭉 뻗은 가로가 눈에 띄는가 하면, 수로는 하수구 역할을 다하고 있었던 것 같다. 메소포타미아의 우르, 인도의 모헨조다로 등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뛰어난 도시 설비가 갖추어져 있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도시는 학문의 중심지였다. 제의 선왕(宣王) 때 지먼(稷門)이라는 성문 옆에 각국에서 초빙된 학자, 사상가를 모여 살게 하고 커다란 아카데미를 창설했다고 한다. 대체로 기원전 357년부터 284년 경까지 70년 동안 ‘직하(稷下)의 학’이 번창했다. 그들의 거주지역은 고급 주택가를 형성했는데, 자유로운 학문 토론으로 날이 새고 저물었던 이들 가운데에는 멍쯔(孟子)나 쉰쯔(荀子) 등의 모습도 보였다고 한다.

어쨌거나 원시적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고대 도시라고 해도 번화가나 고급 주택가,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한 문화와 교육 지구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덧없는 세계는 흙이 되어버려, 발굴 현장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없는 것이 많다. 그러나 전혀 알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복원 상상도를 봐주었으면 한다. 이제까지 서술해 왔던 것처럼 공장 유적과 궁전 유적을 확인할 수 있다. 고대에는 고대 나름의 도시의 구조와 기능의 분화가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