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李贄-분서焚書 유헌장에게 답하다答劉憲長

유헌장에게 답하다答劉憲長

공자(孔子) 이후 공자를 배운 사람들은 사도(師道)를 자임하곤 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루라도 남의 제자가 된 적이 없이, 종신토록 남의 스승 노릇을 하면서, 그것이 바로 공자의 가법(家法)이며 그렇지 않으면 공자처럼 될 수 없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일단 남의 스승이 되면, 오직 내가 남을 가르치는 것만 있을 뿐, 나를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모릅니다.

공자 이전에 어찌 성인이 없었겠습니까? 요컨대 그들은 모두 밝은 시절을 만나서 지위를 얻고 뜻을 행할 수 있었습니다. 불우했던 때가 있었다면, 태공(太公)이 80세 되기 전이나 부열(傅說)이 담장을 쌓기 전같은 경우입니다. 만약 태공이 문왕(文王)을 만나지 못하고 부열이 고종(高宗)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저 태공은 위수(渭水) 가의 늙은이로, 부열은 동굴의 죄수의 무리로 일생을 마쳤을 것입니다.1 누가 그들의 능력을 알아주었겠습니까? 그리고 그들도 또한 남이 알아주는 것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 후 공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스승과 제자란 것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공자가 스승이 되는 것을 즐겨서 그런 것이 아니라, 상황에 의하여 어쩔 수 없었을 뿐입니다. 마치 관문을 지키던 영윤(令尹)이 노자와 마주쳤을 때 문을 굳게 닫아걸고 막아 세워 관문에서 내보내지 않자, 부득이하게 ‘5천언(五千言)의 책’2을 전수한 것과 같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노자는 결국 서방으로 떠나서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지만, 공자는 세상에 맞추면서 넓은 지역을 두루 다녀서, 그를 찾는 학생들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게다가 총명함을 타고난 안자(顔子)와 함께 변론을 벌일 수 있었습니다. 동서남북으로 주유하는 것에서 이미 이렇다 할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여 흥이 없어지고, 게다가 현명한 제자가 있어서 마음속 대화를 나누며 회포를 풀기에 충분하여, 마침내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이루어졌습니다만, 이 역시 우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안자가 죽자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마침내 없어져서, 비록 제자란 명칭은 있었지만 진정한 제자의 모습은 더 이상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아우는 항상 그런 무리들을 비웃었습니다. 그러므로 죽을 때까지 남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고, 하루라도 남의 사부(師父)가 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멀리서 아이를 보내 와서 출가하게 해달라고 하시는데, 삭발하는 것은 아직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좀 더 상황을 살피고 시기를 따져서, 과연 정말 원하는 마음이 있는지 알아본 연후에 삭발을 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설사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무방합니다. 사람의 일이란 이렇게도 저렇게도 임의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어떻게 해야겠다고 단정을 내리고 꼭 그대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通州 李贄墓, 출처 公社网

대개 살고 죽는 것은 큰 일이라서 철석같은 심장이 되지 않으면 가벼이 결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과연 정말로 생사를 두려워한다면 재가하든 출가하든 다를 것이 없습니다. 관을 높이 쓰고 넓은 띠를 매고 있는 육신(肉身) 보살이 지금 세상에 얼마나 많이 있는데, 왜 꼭 집을 버리고 삭발을 해야 성불하겠습니까?

이 아우같은 경우는 재주도 없고 바탕이 아둔한데다가 성격도 괴퍅하고 나태하여, 사람들을 만나고 어울리는 것에 싫증이 났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출가하는 것을 핑계로 도피한 것입니다. 무슨 진실을 구명하기 위하여 이렇게 출가한 것이 아닙니다. 순박하고 성실한 바탕에 활짝 꽃이 핀다면, 그것이 재래보살(再來菩薩)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만약 굳이 공을 세우고 명성을 드날리는 것을 완수한 다음에 손발을 정돈하려 한다면 늦습니다. 지금 다른 사람을 따져볼 것도 없이 현재 서천(西川)에 있는 우산(友山)3을 보십시오. 그가 어찌 관리가 되는 것과 부처가 되는 것을 각각 다른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깨달으면 바로 부처가 되는 것이요, 깨닫지 못하면 눈 앞에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헛되이 이론만 일삼으면 안될 뿐입니다.(권1)

1 태공(太公)에 대해서는 <주남사에게 답하다>[復周南士] 주석 참조. 부열(傅說) 이야기는 《서경》 <열명상>(說命上)과 《사기》 <은본기>(殷本紀)에 실려 있다. 부열은 상(商) 나라 때 지혜와 덕망이 가장 뛰어난 인물 중의 하나였다. 부암(傅巖, 일설에는 傅險)이라는 곳의 바위 동굴 속에서 은거하며, 도로 공사나 성벽 축성의 노역에 동원된 죄수로 살았다. 고종(高宗)이 자신을 보좌할 인재를 애타게 찾던 중, 꿈에서 그 사람을 만났으며, 깨어난 뒤 꿈에서 본 얼굴을 그대로 그리게 하여 천하에서 찾아보게 하였더니, 바로 부암에서 도로 공사와 성벽 축성의 노역에 동원되어 일하던 부열이었다. 고종은 그를 최측근 참모로 등용하여, 치세를 이루었다.

2 《노자》(또는 《道德經》, 《德道經》)의 별칭.

3 <주우산에게 답하다>[答周友山] 참조.

卷一 書答 答劉憲長

自孔子後,學孔子者便以師道自任,未曾一日為人弟子,便去終身為人之師,以為此乃孔子家法,不如是不成孔子也。不知一為人師,便只有我教人,無人肯來教我矣。且孔子而前,豈無聖人,要皆遭際明時,得位行志。其不遇者,如太公八十已前,傅說版築之先,使不遇文王、高宗,終身渭濱老臾,岩穴胥靡之徒而已,夫誰知之。此蓋亦不求人知也,直至孔子而始有師生之名,非孔子樂為人之師也,亦以逼迫不過。如關令尹之遇老子,攔住當關,不肯放出,不得已而後授以五千言文字耳。公老子畢竟西游,不知去向。惟孔子隨順世間,周游既廣,及門漸多,又得天生聰明顏子與之辯論。東西遨游既無好興,有賢弟子亦足暢懷,遂成師弟名目,亦偶然也。然顏子沒而好學遂亡,則雖有弟子之名,亦無有弟子之實矣。

弟每笑此等輩,是以情願終身為人弟子,不肯一日為人師父。茲承遠使童子前來出家,弟謂剃發朱易,且令觀政數時,果發願心,然後落發未晚。縱不落發,亦自不妨,在彼在此,可以任意,不必立定跟腳也。蓋生死事大,非辦鐵石心腸,未易輕造。如果真怕生死,在家出家等,無有異。目令巍冠博帶、多少肉身菩薩在于世上,何有棄家去發,然後成佛事乎?

如弟不才,資質魯鈍,又性僻懶,倦于應酬,故托此以逃,非為真實究竟當如是也。如丈樸實英發,非再來菩薩而何?若果必待功成名遂,乃去整頓手腳,晚矣。今不必論他人,即今友山見在西川,他何曾以做官做佛為兩事哉?得則頓同諸佛,不理會則當面錯過,但不宜以空談為事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