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李贄-분서焚書 다시 송태수에게 답하다復宋太守

다시 송태수에게 답하다復宋太守

천 명의 성인도 마음은 한결같으며, 진리의 말은 다르지 않습니다. 책에 남은 오래된 말들은 모두 천 명의 성인이 고심 끝에 했던 말로, 후세의 현인(賢人)과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만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서, 말하는 방법에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의 두 가지가 있었는데, 이는 상(上)․하(下) 두 부류의 인물에 대비했던 것입니다.

상사(上士)라면 마땅히 성인의 상어(上語)를 구명해야 합니다. 하사(下士)가 되는 것을 달게 받아들여 그저 세간에서 온전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성인 공자(孔子) 및 상고의 경전을 가슴속에 깊이 새겨 잊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근세의 유식한 명사(名士)의 말 한 마디 한 구절이라도 모두 자기에게 절실한 것이 있으면 진부한 말을 인용하여 비판하면 안됩니다.

또한 증명할 것이 없으면 믿지 않는 풍조가 오래 되어 예전의 진부한 말을 취하여 증명하지 않으면 듣는 사람이 더욱 놀랄까 염려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논설에서 반드시 경전에 의거하고 경전을 인용해왔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부득이해서였을 뿐입니다. 경전에 의거하여 말하면 진부한 말이라고 여기고, 솔직하게 마음속을 드러내면 타당한 근거가 없다고 여기니, 말하는 것이 역시 어렵습니다.

무릇 말이란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일을 실감있고 절실하게 말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옛날의 진부한 말을 취하여 스스로 살피고 따져서, 그것과 부합되길 바라는 것이지, 아무 생각이나 노력없이 그저 옛 사람의 근심을 대신 떠맡으려는 것은 아닙니다. 옛 사람들은 떠났고, 자연히 떠맡을 근심도 없어졌는데도, 근심이 있는 까닭은 옛 사람들의 상승(上乘)의 말에 대해 부합되는 점을 찾지 못하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그 까닭에 밤낮으로 노심초사하고, 친구를 만나면 함께 토론하는 것입니다.

만약 단지 한 시대의 완전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천고의 격언을 모두 받아들여 사용하면 충분할 것이요, 반 마디도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나기만 하면 수정하고 논증하려고 하는 사람은 심지(心志)가 자못 크기 때문에 단지 한 시대에 국한된 인물이 되는 것을 달가와하지 않습니다. 형(兄)이 만약 저의 죄를 용서하고 제 마음을 받아들여 주신다면, 이 아우는 죄책감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부끄러운 줄 모르고 큰소리만 치고 다니면서 자기를 내세우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신다면, 끝내 입을 닫고 묵묵하게 지내겠습니다. 이 또한 쉬운 일이지요.(권1)

李贄墓碑, 출처 北運通州

卷一 書答 複宋太守

千聖同心,至言無二。紙上陳語,皆千聖苦心苦口,為後賢後人。公隨機說法,有大小二乘,以待上下二根。苟是上士,則當究明聖人上語;若甘為下士,只作世間完人,則不但孔聖以及上古經籍為當服膺不失,雖近世有識名士一言一句,皆有切于身心,皆不可以陳語目之也。且無征不信久矣,苟不取陳語以相證,恐聽者益以駭愕。故凡論說,必據經引傳,亦不得已焉耳。今據經則以為陳語,漫出胸臆則以為無當,則言者亦難矣。凡言者,言乎其不得不言者也。為自己本分上事,未見親切,故取陳語以自考驗,庶幾合符,非有閑心事、閑工夫,欲替古人擔憂也。古人往矣,自無優可擔,所以有憂者,謂于古人上乘之談,未見有契合處,是以日夜焦心,見朋友則共討論。若只作一世完人,則千古格言盡足受用,半字無得說矣。所以但相見便相訂征者,以心志頗大,不甘為一世人士也。兄若恕其罪而取其心,則弟猶得免于罪責;如以為大言不慚,貢高矜己,則終將緘默,亦容易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