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세 도시 기행-중세의 여행 2

졘캉부(建康府)의 경관

일기는 졘캉부, 곧 현재의 남경에 이르는 길부터 기록하고 있다. 양쯔강에서 하도(河道)를 따라가며 졘캉부에 가까워지자 작은 촌락과 장원이 보였다. 이윽고 나타난 성문은 충광먼(寵光門)이었다. 성 위에는 오른쪽으로 상신팅(賞心亭)과 바이루팅(白鷺亭)이 보였고, 왼쪽에 보이는 것은 얼수이팅(二水亭)이었다. 루유는 상신팅이 다른 두 개의 정자에 가려 왕년의 장관을 잃었다고 탄식했다.

졘캉성도(《경정졘캉지(景定建康志)》수록) 서남 샤수이먼(下水門) 쪽에 상신(賞心), 바이루(白鷺) 두 개의 정자가 있다. 게다가 룽시먼(龍西門) 쪽 자자이먼(柵寨門) 근처는 하천을 침점(侵占)하는 형태로 민가가 있다.

성으로 들어서 배를 정박하니, 그곳은 남송의 유수한 큰 도회지였다. 배를 정박한 친화이팅(秦淮亭)은 졘캉부에 고대 이래로 있어 왔던 친화이허(秦淮河)에 임해 있었다. 친화이허야말로 졘캉부의 남부에 있으면서 예부터 환락의 장소로 알려졌던 곳이다.

일찍이 500년 뒤에 이 땅에서 왕이 될 사람이 나올 것이라는 예언을 들은 진시황이 그 땅에 깃든 왕의 기를 뽑아내기 위해 굴착한 것이 친화이허라는 전설이 있었다. 때로 전란의 장이 되기도 했던 이 하천도 지리가 좋았던 탓에 번화가가 되어 활기를 띠어 왔던 것이다. 명청시대에는 많은 거룻배나 제등선(提燈船)을 띄우고 문인들이 환락에 몸을 맡겼던 장소였다. 화려한 환락, 그 한 가운데 피어난 여러 가지 꽃들과 그에 대한 이야기는 《판교잡기(板橋雜記)》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 그의 배도 그곳에 정박했다.

그러나 활기를 띠었다고만 말할 수 없는 기록도 있다. 친화이허 내 도성 서쪽의 자자이먼(柵寨門) 일대는 유력자가 차지해 꽃밭을 만들어 그것 때문에 경우에 따라 수해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 밖에도 강변을 매립해 집 등을 지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친화이허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런 일은 얼마나 많았던 것일까? 현세의 젊은이 쉬안찬(宣贊)에 의지했던 백사(白蛇)의 요녀 이야기로 《시후삼탑기(西湖三塔記)》가 있다. 우에다 아키나리(上田秋成)의 《우게츠이야기(雨月物語)》 가운데 「뱀 여인의 음욕(淫慾)(蛇性の淫)」의 원본으로 이름이 높은 이야기이다. 어쩌면 린안(臨安)이라는 번화가에서 운위되었을 이야기에서 주목할 만한 대목이 있을 지도 모른다. 요물과 만났던 아들, 쉬안찬에게 그 어미가 말했다.

“아들아, 이 집이 린안의 융진먼(湧金門) 도랑이 흘러나오는 입구를 막고 있는 것 같은 곳에 있기 때문에 탈이 난 게로구나. 아무래도 이사를 가도록 하자.”

이것만 봐도 서민의 집은 비록 수문 근처라 할지라도 침점(侵占)해 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가에 비어 있는 땅이 있으면 오두막집을 짓거나, 밭을 개간하기도 했다. 진정 토지의 침점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하도(河道) 역시 행정당국이 세세하게 감독하지 않으면 이와 같이 멋대로 사적인 용도로 사용했다. 비록 하천 전체가 변하진 않더라도 폭이 좁아져 곧 폐쇄해 버렸음을 이런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친화이허의 경관 역시 번화가는 휘황찬란했지만 조금만 외곽으로 벗어나면 작은 집들과 밭이 있는 상태였을 것이다. 나 역시도 양저우(揚州)를 여행했을 때 일찍이 성내를 동서로 나누고 있는 운하가 음울하게 고여 있는 것에 더 한층 감개를 품었던 적도 있다.

졘캉부(建康府)에서

그 뒤로 체재하는 며칠 동안 루유는 여러 곳을 다녔다.

이제 루유의 행동 양태를 대신해 졘캉부의 지도를 싣는다. 루유가 걸었던 도시는 이런 지도를 읽게 되면 아주 분명해진다. 이런 행동의 기록을 분석하면 도시에서의 경관이나 사람들의 행동 양태를 생생하게 알 수 있게 된다.

그는 왁자지껄한, 이른바 메인 스트리트를 걷고 있었다.

미지의 도시를 여행할 때는 누구라도 우선 메인 스트리트를 걷는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해하기 쉽고 안전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왁자지껄하고 여러 가지 설비가 있기 때문이다. 미지의 도시를 여행하는 사람의 행동은 지금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 루유 역시 마찬가지였다. 루유가 찾아갔던 길에도 번화가가 있었다. 여관과 요정이 있고, 사원이 있었다. [루유가] 찾아 다녔던 곳은 어디라 할 것 없이 명승고적이었다.

도시에서의 사람들의 행동 양태는 이와 같이 사소한 실마리에서 잡아낼 수 있다. 그것이 도시의 구조와 경관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여행자가 찾아 나서는 길이나 그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이 찾아 나서는 길이나 기본적으로는 변하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왁자지껄한 곳은 그 도시의 사람들이 빈번하게 다니는 간선 도로이기도 하다. 명승고적도 마찬가지로 그러하다. 그 땅의 유래가 오랜 곳이나 사람들에게 익숙한 곳, 그곳이 명승고적이기 때문이다.

루유가 노닐었던 명소는 예청산(冶城山) 기슭의 톈칭관(天慶觀)과 성문의 서문(西門) 밖에 있는 칭량산(淸凉山) 칭후이쓰(慶慧寺), 중산(鍾山)의 다오린전줴다스탑(道林眞覺大師塔), 반산(半山)에 있는 왕안스(王安石)의 구택, 곧 바오닝찬위안(報寧禪院), 바오닝쓰(保寧寺), 졔탄쓰(戒壇寺)였다. 어느 곳이건 졘캉부를 대표하는 명소였다. 이것이 7월 5일 도착해서 10일에 출발할 때까지의 [루유의] 행적이었다.

여행자가 찾아 나서는 번화가는 동시에 물자가 통하는 길이기도 하다. 곧 경제적으로 번화한 곳인 것이다. 이미 없어진 도시에서의 여러 가지 유통의 형태는 이렇게 해서 헤아려볼 수 있다. 그리하여 도시에서의 경제적 구조 역시 명확해져 간다.

도시에서의 교류

여행자가 사람들과 만나는 경우도 있다. 여행자가 유명한 사람이라면, 상대방이 방문하기도 한다. 적극적으로 교류를 구하고, 그 지역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루유의 일기를 읽으면, 당시 여행자의 모습을 잘 알 수 있다. 그는 행궁(行宮)도 있는 졘캉부에서 정력적으로 행동했다. 지방 행정부의 고급 관료를 만나는 한편, 유명한 문화인과도 면회했다. 루유만큼 유명한 사람이 되면, 어느 시대건 방문하러 오는 사람도 많고, 방문해야 할 사람도 많은 법이다. 루유는 방문하고 방문을 받고 파티에 참석하느라 바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진정(陳情)도 들어왔다. 전쟝(鎭江)에서의 일이다. 금나라가 남하할 때 의용군으로 참가했다 송에 귀순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조처도 없었다. 나이는 쉰하나가 되어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구슬프게 눈물을 흘렸다.

루유는 졘캉부에서 남송 초의 재상 친후이(秦檜)의 손자 친쉰(秦塤)을 만났다. 정적이었던 친후이 때문에 출세가 늦어졌던 루유였지만, 친후이가 죽고 10년이 지나니 그 한이 엷어졌던 것일까?

친쉰은 넓은 저택에 살고 있었지만, 이젠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예전의 식객이 속사정은 궁색하고 곤궁하다고 증언했다. 누차 전당을 잡히기도 했다는 것이 식객의 전언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수입이 10만석이라고 했기 때문에, 여전히 부유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도시는 문화를 키우는 곳이고, 권력이 깃드는 곳이기도 하다.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모여들게 되어 있다. 당시는 지방의 유력자로 도시에 살고 있는 이도 많이 나오고 있었다. 도시에는 관료도 있고, 문화인도 있고, 부유한 상인도 있었다. 그 가운데에는 강남의 차분하고 부유한 생활에 눈을 돌려 퇴직 후의 여생을 보낼 장소로서 임시로 살고 있는 이도 있었다. 도시 주변에서 장원을 갖고 있으면서, 도시 또는 그 주위에서 살고 있는 이도 있었다. 그들이 모여 문화 서클을 만들었던 케이스도 있었다.

도시는 소비 경제의 꽃이었다. 부유하다고 알려진 강남의 도시에서 그런 경향은 더 한 층 강화되었다. 그리하여 강남의 도시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살았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이 지명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