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린黃霖 교수와의 대담

이등연(李騰淵 全南大 中文科 敎授) 정리

황린 교수, 사진 ⓒ 조관희, 2002

1. 동항 인연기

험난한 학문 연마의 길에서 동항(同行)과의 교류는 그 무엇보다, 누구보다 큰 힘이 된다. 더구나 그 동항이 때로는 비판자로서 때로는 격려자로서 지음(知音)의 관심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늘 만나든 멀리 떨어져 있든 외로운 학문의 길에서 늘 그리운 동행(同行)의 사이가 아니랴. 선뜻 지음이란 말을 썼지만, 사실 지음의 관계란 사제(師弟)나 사장(師長) 혹은 동학(同學), 그 어떤 외형적 관계 속에서도 가능하지 못할 것 없으리니, 말소리 없는 가운데서도 서로의 마음 충실히 읽으면 그게 지음 아니고 무엇이랴.

동항 선배 황린(黃霖) 교수를 처음 만난 것은 1993년 가을 북경 향산(香山)에서 개최된 ‘중국 고대소설 국제세미나’에서였다. 당시 중국 고대소설 국제세미나의 양적 질적 수준은 필자 개인의 생각으로는 그 이전이나 이후 지금까지도 다시 예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의미 깊은 학술회의였다. 세계 각지에서 모인 80여 명의 전문 학자들이 때로는 함께 모여, 때로는 조를 나누어 진지하게 논문을 발표하고 토론하는 분위기였다. 그때 필자는 고전소설 이론에 관한 작은 논문 한 편을 ‘소설이론’ 소조에서 발표하게 되었는데, 소설이론 분야에서 많은 작업을 해낸 황린 교수도 당연히 같은 조였고, 그런 인연으로 발표석상과 저녁 자유시간에 전공과 관련된 이런저런 대화가 이어지게 되었다. 사실, 필자가 학위논문을 쓸 때부터 황린 교수의 글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료인지라 숙독해왔기에, 그 긴 작업 기간에 이미 ‘낯이 익을 대로 익은’ 그를 직접 만나 얘기하는 일은 참 ‘맛있는’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황 교수에 대한 첫인상은, 뭐라 할까, 전형적인 ‘독서인’의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것은 꽉 막힌 시골 ‘서생(書生)’의 답답한 모습이 아니라 바깥 물결에 쉽사리 뇌동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자기 학문에 골몰하는 깔끔한 학자의 인상이었다. 서로 바쁜 일정인지라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좋은 학자 만나기가 갈수록 지난하게 느껴지던 중국에서 그 대화들은 퍽 인상 깊지 않을 수 없었다.

황린 교수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역시 국제학술회에서였다. 1996년 7월 다롄(大連)에서 개최된 ‘명청소설 국제학회’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을 때, 현지 방송과의 인터뷰 등 바쁜 그의 일정 속에서도 구면의 동항으로서 근황을 나눌 기회는 있었다. 학회가 끝난 후, 그는 비행기나 기차보다 값이 싼 배를 이용해 상하이로 돌아갈 계획이었는데, 상하이에서 몇 가지 자료를 확인하고 싶었던 필자 역시 그 배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우리는 발 디딜 틈도 없는 여객선 속에서 2박3일이던가 긴 동행을 했고, 무더운 객실에서 속옷 바람으로 앉아 끊임없는 동항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 인연으로 그 다음해 필자가 소속된 전남대 중문과와 황 교수의 푸단대 중문과는 자매결연을 맺고 학문 교류를 진행하게 되었고, 1997년 여름부터 1년간 필자는 상하이 푸단대에서 교환교수 생활을 보냈다.

황린 교수, 사진 ⓒ 조관희, 2002

상하이에서의 1년 동안, 황린 교수와는 한 달에 두 세번 정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고, 특히 97년 10월 후난성(湖南省) 장쟈졔(張家界)에서 열린 ‘중국 근대문학학회’와 98년 6월 푸저우(福州)에 있는 푸젠(福建)사범대 중문과 초청 강연회에 동행, 여러 날 함께 숙식하면서 자유롭고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특히, 푸젠사범대 초청 강연회를 마친 뒤에는 이 대학 치위쿤(齊裕焜) 교수의 안배로 우리 두 사람은 우이산(武夷山)에서 이틀을 보내게 되었다. 장쟈지에(張家界)나 우이산(武夷山)은 그 산수가 중국 전역에서도 손꼽히는 명승지인데, 그러한 산과 강을 우리 두 사람은 함께 거닐며 개인의 성장에서부터 학문적 관심에 이르기까지 깊고 다양한 대화와 토론을 주고받았던 기억이 늘 새롭다. 이제 황 교수와 나눈 개인사와 학문적 관심을 몇 가지 소개함으로써 우리 소설학회 회원과의 교류에 작은 안내를 맡고자 한다.

2. 황린 교수의 학문 세계와 소설 연구

1942년 상하이 쟈딩현(嘉定縣)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황린 교수는 10살 무렵부터 고금 소설에 빠져들었다 한다. 황 교수가 얼마나 소설에 심취했는지 재미있는 얘기 하나가 있다. 그가 11살 때 중학교 시험을 보러 갔을 때 그만 교문 앞에서 팔고 있는 ‘이야기 책’에 빠져 입학시험 시작 종소리도 듣지 못한 채 정신없이 구경했다 한다. 시험이 반이나 진행된 후에야 주위가 너무 조용해 정신을 차렸지만 이미 상황은 끝났고, 할 수 없이 다른 신흥 중학에 들어가야 했다. 입학하고 나서도 그는 여전히 『삼국지』나 『수호전』에 빠져 몸 아프다는 핑계로 결석계를 내거나 저녁 소등 뒤 이불 속에서 손전등 불빛으로 통속 소설을 탐독하곤 했다. 후에 그는 1964년 우수한 성적으로 푸단대를 졸업하고 저명한 비평사 학자 주둥룬(朱東潤) 선생의 연구생으로 들어가 주위에서 유명할 정도로 오로지 독서에 매진했고, 중국문학비평사의 큰 흐름 가운데 하나인 푸단대 비평사 학맥을 잇게 된다.(지금은 비평사 분야의 지도자이자 대학원 소장 즉 주임을 맡고 있다.) 이처럼 비평사 분야의 정통 흐름을 이어나가면서도 그가 소설 연구에 따로 착수한 것은 소년 시절 소설 혹애(酷愛) 과정을 두고 볼 때 우연만은 아닌 셈이다.

황린 교수는 대인 관계에서는 겸손하고 포용적이지만 그 치학 태도에서는 어떤 구속도 용납하지 않는 매서운 추구 정신을 지닌 학자로 평가된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특히 원래 전공인 중국문학비평사에서 대체적으로 전통적 견해의 답습이 이어지는 경향이 우세함에도 불구하고, 결코 이에 머물지 아니하고 나름대로의 분야를 힘들여 개척한 데서 여실히 드러난다. 예컨대, 그가 대학원을 졸업할 때는 문화대혁명이 한창 기승을 부릴 때였지만, 그는 이런 사회적 대동란 속에서도 묵묵히 고전문학, 특히 고전소설 연구에 몰입했다. 그 결과, 문혁 직후인 1979년, 고전소설 중에서도 그 ‘음란성’ 때문에 대부분 학자들이 접근하기 꺼려했던 『금병매』에 관해 일련의 엄밀한 학술적 고증을, 새로운 시각을 속속 제시해 당시 학계에 상당한 논의를 일으켰다.(그의 관점과 연구 성과는 이후 출간된 『금병매고론(金甁梅考論)』․『금병매만화(金甁梅漫話)』․『금병매대사전(金甁梅大辭典)』․『금병매자료휘편(金甁梅資料彙編)』․『일본연구금병매논문집(日本硏究金甁梅論文集)』 등에 결집되어 있다.) 또한, 그 동안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고대소설비평에 관한 원시 자료를 꼼꼼하게 발굴하고, 체계 있게 정리하면서 세밀한 주석과 적절한 해설을 진행했다.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 1982년과 1985년에 차례로 출간된 『중국역대소설논저선(中國歷代小說論著選)』(상․하 2권, 韓同文과 공저이며, 주지하는 바와 같이 지금 우리 중국소설학회 일부 회원들이 번역중이다)이었다. 이 책은 특히 ‘그 선주(選注)의 안목과 공력, 사가(史家) 식견의 엄밀함’으로 역시 당시 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이 분야 연구자들의 필독서로 지목되었다. 이 자료집을 바탕으로 그는 이어 『고소설론개관(古小說論槪觀)』이라는 이론사를 출간하기도 했다.

사실 이러한 소설 연구 외에 황린 교수의 학문성과는 그의 원래 전공인 중국문학비평사 분야에서 한층 자주 거론되는데, 근래 출간된 『근대문학비평사(近代文學批評史)』가 그 대표적 성과라 할 수 있다. 이 비평사는 애초 공저의 형식으로 출간되었지만(王運熙․顧易生 주편 『中國文學批評史․下冊』, 上海古籍出版社:1985) 후에 이를 독자적으로 서술해 『근대문학비평사(近代文學批評史)』(上海古籍出版社:1993)로 출간했고, 최근에는 『중국문학비평통사(中國文學批評通史)․근대권』(上海古籍出版社:1996)으로 묶여 나오기도 했다. 황린 교수의 『근대문학비평사』의 가장 큰 특징은 기존의 대부분 문학비평사가 시문(詩․文)을 정통으로 삼은 전통적 문학관을 고려해 시․문 비평사 중심으로 서술하는 게 통례였던 반면(일부 비평사에서 소설․희곡 비평사를 언급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극히 제한적이었다), 전서에 걸쳐 근대 소설이론가와 이론 내용을 시․문 비평과 대등하게 다루었다는 점에서 그의 독특한 시각이 잘 드러난다는 데 있다.

황린 교수와 오츠카 히데다카 교수, 사진 ⓒ 조관희, 1996

3. 황린 교수와의 몇 가지 대화

이등연 : 상하이에 와서 황 교수와 생활하는 동안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황 교수께서도 아시는 바와 같이 한국의 ‘중국소설학회’는 중국의 소설연구자를 소개하는 일련의 기획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기회에 인사 한 말씀하시죠.

황 린 : 이 교수와의 교류도 그러했듯이 ‘한국중국소설학회’의 여러 회원, 특히 최용철․오순방․박재연․함은선…… 교수와는 몇 차례 학회에서 만난 적이 있고, 그런 과정을 통해 한국에서의 중국 소설연구 열기를 늘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더 깊은 교류가 지속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다만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 진행된 연구 경향이나 성과를 학술발표회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는 있지만, 구체적인 파악은 여전히 힘든 편입니다. 특히, 중국과 일본 쪽과의 교류가 상당히 활발하게 진행되는 데 비해 한국과는 아직 구체적 교류라고 하기엔 미흡한 것 같습니다. 물론 이렇게 인적 만남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긴 하지만, 구체적인 학문적 교류 말입니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한국에 있는 중국 고전소설 관계 자료를 좀 더 소상히 파악하고 싶지만, 쉽지 않군요. 그런 의미에서 박재연 선생의 노력은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등연 : 건강 때문에 고생하시고 계신데……

황 린 : 원래 몸이 건강한 편은 아니었는데, 얼마 전 병원에서 약을 잘못 처방하는 바람에 간과 위에 큰 손상을 입었습니다. 장기간 입원해야 했고, 지금은 상당히 호전된 편이지만 아직도 연구와 집필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이등연 : 술이나 담배도 안하시는데 생각지도 못한 데서 어려움을 만났으니, 참 안타깝군요.

황 린 : 건강 때문에 평소 술 불가, 담배 불가, 차 불가 ‘3불’ 정책을 펴왔지만…….

이등연 : 어디선가 황 교수께서 “학문할 때 첫째 담(膽)은 크되 마음은 세밀하게, 둘째 발은 부지런히 손은 재빠르게, 전자는 정신, 후자는 방도이다”라 하신 말씀을 읽었습니다. 대학원 시절이나 일본 방문 시기에도 도서관 관리원과 출퇴근을 같이 할 정도로, 심지어 일본에서는 관리원이 자진해서 정시 퇴근 시간을 서너 시간 연장할 정도였다는 주위 사람들의 얘기를 본 적이 있는데……

황 린 : 쑥스러운 화제군요. 학자가 도서관에 붙어 있는 건 너무 당연한 일 아닌가요. 저 뿐만 아니라 우리 세대 대부분 학자가 그렇게 도서관에 앉아 있었지요. 요즘 젊은 학자들의 경우 그런 우둔한 접근보다는 학문적 유행에 너무 민감한 편인 게 좀 걱정될 때가 있습니다. 제가 그 동안 주로 한 작업이 발굴되지 못한 비평 자료, 특히 소설이론 자료를 정리하는 일이었는데, 솔직히 그건 매우 쉽지 않은 일이었고, 긴 시간이 필요한 외로운 작업이었습니다.

황린 교수와 박재연 교수, 사진 ⓒ 조관희, 2002

이등연 :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 교수의 학문을 두고 ‘새로움을 향한 과감한 도전’으로 평가하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황 린 : 제가 늘 생각하는, 뭐라 할까, 살아가는 자세를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됨은 소탈하고 성실하게, 치학은 새로운 창의를 추구한다.(爲人尙朴實, 治學求新異)” 새로운 세계를 추구함은 인간의 보편적 천성이며 사회 진보의 표지일진대, 분투노력 해야지요. 논문을 쓸 때 ‘자기만의 관점(我)’이야말로 정말 중요한 요소라 봅니다. 남이 다들하고 있는 게 아닌, 자기가 새롭게 본 것 말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근거도 없이 새로움만 내세우는 걸 능사로 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말이죠.

이등연 : 학문적 권위자의 관점에 대한 비판 문제에서도 자주 거론되더군요. 신화적 경전으로 평가되어온 노신의 『중국소설사략』의 일부 시각에 대한 과감한 비판에서나, 시내암의 관적 문제에 관해 스승인 장페이헝(章培恒) 선생의 관점을 비판한 일 등은 평소 조용하신 황 교수와 잘 연결이 안 되는데…….

황 린 : 학문적 세계에서 근거 있는 비판을 하는 학생을 스승은 달리 생각지 않으시는 것이지요.

이등연 : 지금 구체적으로 하고 계신 작업은?

황 린 : 몇 분과 공동 작업으로 중국문학사를 엮는데, ‘명대’ 부분을 맡아 거의 탈고했고, 지난 한 세기 동안 이루어진 주요 논저를 바탕으로 ‘중국 소설․희곡연구사’를 쓰고 있습니다.

이등연 : 끝으로 한국의 소설연구자에게 한 말씀을.

황 린 : 앞서도 얘기했지만 중국 학계와 한국의 소설연구학계의 교류는 이제 시작이라 할 수 있고, 앞으로 구체적인 학문적인 교류가 더 심화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의 중국소설연구 학계의 진지한 태도는 익히 알고 있고, 앞으로도 좋은 교류가 이어지리라 생각합니다.

이등연 : 건강 조심하시고, 기회가 있으면 한국에 오셔서 여러 회원들과 직접 대화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부기(附記)”

황린 교수는 1998년 10월부터 1년 동안 일본 도쿄대학학 문학부 중국어․중국문학과에서 고급 방문학자 신분으로 연구하고 있는 중이다. ‘근대’의 설정과 문학사 시기 구분 문제․고전 소설에 관한 고증과 이론의 병행 문제․노신 『중국소설사략』의 관점 문제 등 황 교수와 나눈 여러 가지 대화 내용과 시각 문제를 지면 관계상 자세히 다루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이 글은 그의 저작에 관심 있는 회원들에게 주로 그의 치학 태도를 소개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글쓰는 과정에서 링창(凌昌)의 “「黃霖與中國古代小說硏究」(『復旦學報․社會科學版』, 1989년 제2기)와 완쥔바오(萬君寶)의 「爲人尙朴實, 治學求新異:黃霖先生小傳」(『古典文學知識』, 1992년) 등 두 편의 글을 일부 참고하였다.

[엮은이 주: 이 글은 원래 『중국소설연구회보』 제36집(1998년 11월)에 실린 것을 엮은이가 수정 보완했다.]

[참고] 황린(黃霖, 1942~ ) 교수 소전(小傳)

고대소설 연구가. 상하이(上海) 쟈딩(嘉定) 사람으로 1964년에 푸단대학(復旦大學) 중문과(中文系)를 졸업하고 동년에 연구생 과정(지도교수: 朱東潤)으로 입학하여 중국문학비평사를 공부하고 1967년 7월에 졸업하였다(당시에는 학위제를 실행하지 않았다). 1968년 이후에는 상하이의 중학, 교사홍전학원(敎師紅專學院)에서 가르쳤으며 1978년 이후에는 푸단대학(復旦大學) 중국어언문학연구소에서 문학연구에 종사하였는데 1981년에 강사로 승급하고 중국문학비평사연구실의 부주임을 맡았다. 1985년에는 부교수로 승급하였고 1986년 9월에서 1987년 9월간에는 일본에 건너가 소카대학(創價大學)의 객원연구원을 지냈으며 1993년에는 부교수로 진급하고 부소장을 맡았다. 지금은 푸단(復旦)대학 박사생 지도교수, ‘중국『삼국연의』학회’와 ‘중국『유림외사』협회’ 이사, ‘중국『수호』학회’ 부비서장, ‘중국『금병매』학회’ 부회장, ‘중국근대문학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주로 중국문학비평사, 중국고대소설과 근대문학의 교학과 연구에 종사하고 있는데 주요 저작으로는 『中國歷代小說論著選(上·下)』(韓同文과 공편, 江西人民出版社, 1982~1985; 수정판, 1990), 『「金甁梅」資料匯編』(北京 中華書局, 1985), 『「金甁梅」漫話』(學林出版社, 1985), 『古小說論槪觀』(上海文藝出版社, 1986), 『日本硏究金甁梅論文集』(공역, 齊魯書社, 1986), 『金甁梅考論』(遼寧人民出版社, 1989), 『金甁梅大辭典』(주편, 巴蜀書社, 1991), 『古代小說評點漫話』(공저, 遼寧敎育出版社, 1992), 『中國古代小說大百科全書』(소설이론 부분, 中國大百科全書出版社, 1993), 『近代文學批評史』(上海古籍出版社, 1993), 『中國歷代文論選(상·하)』(近代卷), 『金甁梅詞話注釋』(공저, 香港 夢梅館出版社, 1993), 『中國歷代小說辭典(明代卷)』(주편, 雲南人民出版社, 1993) 등이 있고 주요 논문으로는 「明淸小說中的現實主義問題」(韓同文과 공저, 『學術硏究』 1980년 제11기), 「毛本『三國演義』的若干問題」, 「『金甁梅』成書問題三考」, 「論『水滸』硏究中的“市民說”」, 「中國近代文學批評硏究的幾個問題」(『文學評論』 1994년 제3기), 「『杜騙新書』與晩明世風」(『文學遺産』 1995년 제1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