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李贄-분서焚書 다시 주남사에게 답하다復周南士

다시 주남사에게 답하다復周南士

그대는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는 한창 나이의 사람입니다. 박옥(璞玉)을 지니고 있으면서 아직 시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입니다. 나같은 사람은 본래 쓸 만한 재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쓰이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어찌 구름이나 학과 함께 어울리는 은자(隱者)의 부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매우 부끄러울 뿐입니다.

세상에서 재능있는 사람을 얻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재난’(才難)1이란 말이 있는 것입니다. 걸맞는 재능은 없으면서 헛되이 명성만 있다면 마치 은중군(殷中軍)이 죽마고우 관계라는 이유로 대사마(大司馬)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스스로 왕(王)․사(謝)의 관계와 견주려고 했던 것과 같습니다. 이는 스스로를 헤아리지 못한 것인데, 나에게는 이런 것이 없습니다.

나는 단지 일찌감치 스스로 역량을 헤아려보았기 때문에 의연하게 물러났습니다. 또한 성격이 억세어 원만하지도 못하고, 천성이 남들과 떨어져서 조용히 있는 것을 병적으로 밝힙니다. 이런 성격으로 무리지어 어울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가까이 가보아야 의지할 곳 없이 겉돌 뿐이므로, 자기에게 맞는 곳을 찾은 것일 뿐입니다. 그대처럼 재능이 큰 사람은, 마침 밝은 세상을 맞이하였으니, 보관하고 쌓아 두어 떄를 기다리고, 때가 되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예로부터 있었지요. 큰 재능이 있었으나 세상에 쓰이지 않았던 사람 말입니다. 세상은 그를 쓰지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그 스스로 써줄 것을 바라지도 않고, 세상에서 물러나 재능없는 사람과 동등하게 지내면서, 재능없는 사람이 의심하게 하거나 재능있는 사람이 꺼려하게 하지도 않았지요. 이른바 겉모습은 마치 어리석은 듯 보이고 깊이 감추어 텅 빈 것 같은 것[容貌若愚, 深藏若虛]2으로, 노담(老聃)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위수(渭水) 물가의 늙은이3를 보시오. 나이가 팔십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세상의 영달에 관심을 두지 않고 낚싯대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만약 80의 나이에 죽었거나, 혹은 죽지 않았어도 위수에서 사냥하던 서백4을 만나지 못했거나, 혹은 서백을 만났어도 서백이 그를 존경하여 스승으로 삼아 공경하고 봉양하여 원로로 삼지 않았다면, 또한 서백에게 무왕과 같은 아들이 있었으되 무력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부친의 뜻을 잘 이어받지 못했다면, 태공이 비록 백만 가지 도략이 있었다 한들 쓰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른바 그 쓰임을 잘 감추어둔다는 것입니다.

엄자릉(嚴子陵)․진희이(陳希夷)5 같은 사람들은 쓰이고자 하는 것에 급급했습니다. 어떻게든 반드시 쓰이려는 마음이 있었는데, 반드시 쓰일 만한 형세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갖옷을 입고 타고 가던 노새 등에서 떨어지며6 끝내 은사(隱士)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비록 마음을 숨기지는 못했지만 자취는 숨길 수 있었고, 비록 재능이 쓰이지는 못했지만 은사의 재능은 보여주었습니다. 황로(黃老) 이후 그런 사람을 많이 볼 수 있지요!

크게 쓰일 재능을 지니고, 자기 뜻을 굽혀 반드시 쓰임을 추구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시절이 꼭 밝을 필요도 없었고, 도(道)의 크고 작음도 따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세상과 함께 부침하고 때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하여, 쓰임의 여부가 항상 자기에게 달려 있고, 결국 자기를 버리고 쓰이지 않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으니, 관이오7 같은 무리가 그런 사람들이지요. 이는 최고의 경우입니다.

애타게 자기가 쓰이기를 바라면서, 융통성 있게 자기를 굽혀서 그 쓰임에 맞게 하지도 못하고, 자기 한 사람만의 기준을 고수하고, 전대(前代)의 왕의 잣대를 견지하면서 네모난 자루를 둥근 구멍에 넣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어찌 세상에 쓰일 재능 있는 사람이겠습니까? 쓰이기를 바라는 본심을 도리어 헛되이 등질 뿐이지요. 우리 유학자(儒學者)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나같은 경우는 다행히도 세상 돌아가는 것을 훤히 보고 결단을 내려서, 종일토록 등용되길 기다리지 않고 용감히 물러날 줄 아는 도(道)를 얻었지요. 그러므로 공자처럼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초야에 묻혀 나무나 하며 지내고8 진(陳)에서 굶주리고 광(匡)에서 두려움에 떨던 것과 같은 일을 당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이는 행운일 뿐이요, 최고의 계책은 아닙니다.

그대는 지금 태평한 때를 만나, 화씨(和氏)의 구슬을 품에 안고 있으며, 앞서 말한 몇몇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두 익히 알고 있을 것이요, 필시 그 중에 그대의 상황에 부합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다만 대략 말을 하고, 선택을 기다릴 뿐입니다. 그렇지 않고서, 쓰이고자 하면서도 융통성있게 자기를 굽혀서 쓰임에 맞게 하지 못하면, 이것이 바로 유학자들이 결국 천하 후세의 비난거리와 웃음거리가 되는 이유가 됩니다. (권1)

淄博의 管仲纪念馆

1 《논어》 <태백>(泰伯), “인재를 얻기가 어렵나니, 그렇지 않은가?”[才難, 不其然乎]

2 《사기》 <노장신한열전>(老莊申韓列傳) 참조

3 태공망(太公望), 즉 강태공(姜太公)을 말한다.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사냥을 나갔다가 위수에서 낚시질하는 태공망을 만나, 그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데리고 돌아와 최고의 원로로 대우하며 등용했다. 태공은 문왕․무왕을 보좌하여 주나라 천하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4 서백(西伯)은 은(殷)나라 말기 당시의 문왕(文王)의 칭호이다.

5 엄자릉(嚴子陵)은 후한(後漢) 때 엄광(嚴光)을 말한다. 자가 자릉(子陵)이다. 줄여서 엄릉(嚴陵)이라고도 한다. 젊었을 때, 후한을 일으킨 광무제(光武帝) 즉 유수(劉秀)와 함께 수학했다. 유수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엄광(嚴光)은 성명(姓名)을 바꾸고 은거했다. 유수, 즉 광무제가 사람을 보내 수소문하여 데리고 오게 해서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임명했는데, 받아들이지 않고 물러나 부춘산(富春山)에 은거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가 은거하여 발자취를 남긴 산과 냇물 낚시하던 자리 등을 각각 엄릉산(嚴陵山)․엄릉뢰(嚴陵瀨)․엄릉조대(嚴陵釣臺) 등으로 불렀다. 진희이(陳希夷)는 진단(陳摶)으로, 호는 부요자(扶搖子), 자는 도남(圖南)이다. 당대 말기 과거 시험에 낙방하여 실의와 고민 끝에 은거의 길을 선택했다. 이후 오대(五代) 송대(宋代)에 걸쳐 살았다. 《역경》을 깊이 연구하여, 상수학(象數學)의 시초를 세웠고, 송명 이학(理學)의 근원을 열었다고 한다. 그는 비록 산림에 은거했지만, 세상일에 관심이 많아서, 제왕의 정치에 조언을 많이 했다고 한다.

6 앞의 주석에 나왔던 진단(陳摶)의 고사에 나오는 말이다. 진단은 당말․오대․송대를 걸쳐서 살았는데, 비록 은거의 길을 선택했지만 항상 천하의 혼란을 염려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새를 타고 화음(華陰, 현재의 陝西省에 속함)을 지나던 중 송 태조 조광윤(趙匡胤)이 천하를 평정하고 제위에 올랐다는 소문을 듣고서, 기쁨에 겨워서 노새의 등에서 떨어졌다. 행인들이 이를 이상하게 여기자 진단은 “드디어 천하가 안정을 찾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이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7 관이오(管夷吾)는 관중(管仲)을 말한다. 춘추시대 제(齊)나라 환공(桓公)을 보좌하여 패업(霸業)을 이루게 했다. 관중이 환공에게 등용되기 전에는 환공의 정적(政敵)을 보좌하여, 싸움에서 환공에게 활을 쏘아 죽일 뻔한 경우도 있었지만, 포숙아(鮑叔牙)의 추천으로 재상이 될 수 있었다.

8 《장자》 <양왕>(讓王)에 “공선생[夫子]은 노나라에서 재차 쫓겨났었고, 위나라에서 자취를 감춘 적이 있고, 송나라에서 나무를 벤 적이 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卷一 書答 複周南士

公壯年雄才,抱璞未試者也。如仆本無才可用,故自不宜于用,豈誠與云與鶴相類者哉!感愧甚矣!

夫世間惟才不易得,故曰“才難”。若無其才而虛有其名,如殷中軍以竹馬之好,欲與大司馬抗衡,以自附于王、謝,是為不自忖度,則仆無是矣。仆惟早自揣量,故毅然告退。

又性剛不能委蛇,性疏稍好靜僻,以此日就鹿豕,群無賴,蓋適所宜。如公大才,際明世,正宜藏蓄待時,為時出力也。古有之矣:有大才而不見用于世者。世既不能用,而亦不求用,退而與無才者等,不使無才者疑,有才者忌。所謂容貌若愚,深藏若虛,老聃是也。今觀渭濱之叟,年八十矣,猶把釣持竿不顧也。使八十而死,或不死而不遇西伯獵于渭,縱遇西伯而西伯不尊以為師,敬養之以為老,有子若發不武,不能善承父志,太公雖百萬韜略,不用也。此皆所謂善藏其用者也。若夫嚴于陵、陳希夷,汲汲欲用之矣,而有必用之心,無必用之形,故被裘墮驢,終名隱士。雖不遁心,而能遁跡;雖不見用才,亦見隱才矣。黃、老而下,可多見耶!又若有大用之才,而能委曲以求其必用,時不必明良,道不論泰否,與世浮沉,因時升降,而用常在我,卒亦舍我不用而不可得,則管夷吾輩是也。此其最高矣乎!

若乃切切焉以求用,又不能委曲以濟其用,操一己之繩墨,持前王之規矩,以方柄欲入圓鑿,此豈用世才哉!徒負卻切切欲用本心矣。吾儒是也。幸而見幾明決,不俟終日,得勇退之道焉。然削譏木,餓陳畏匡,其得免者亦幸耳,非勝算也。公今親遭明時,抱和壁,如前數子,皆所熟厭,當必有契詣者,仆特崖略之以俟擇耳。不然,欲用而不能委曲以濟其用,此儒之所以卒為天下後世非笑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