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눠唐諾-부, 명예, 권력에 관한 단순한 사색我有關聲譽、權勢和財富的簡單思索:행복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幸福以自身爲目的

행복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幸福以自身爲目的

노년의 보르헤스는 말하길, 문학 창작은 인간세상의 불행을 행복한 시로 변화시키며 행복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고 했다.

이 말은 본래 자명한 기본 이치에 가까웠지만 갈수록 권고와 깨우침처럼 돼가고 있다.

행복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말은 대체로 행복이야말로 궁극적이면서도 진정으로 인간 자신에게 귀속되는 것으로서 이미 완성되어 더이상 우리 밖에 있지 않은 일종의 ‘아름다운 상태’임을 뜻한다. 무릇 부, 명예, 권력은 모두 그것이 아니거나 그것을 포함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행복은 다른 것으로 변하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될 필요가 없다. 정반대로 다른 것이 (자연스러우면서도 현명하게) 행복으로 변하고 행복에 도움이 되는 어떤 것이 돼야만 한다. 마치 구름이 비가 되어 대지에 내리는 것처럼.

만약 우리가 보르헤스의 말에서 깨달음을 얻는다면 행복을 대체할 수 있을 듯해도 우리 몸에 직접 ‘흡수’되지는 않는, 비구름처럼 생긴 것들에 머무르고 집착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아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결코 물질적인 것만이 아님을 떠올릴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날 우리가 고민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물질의 종류와 수량과 품질과 관련해서는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천국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인류 역사상 가장 천국에 가까운 지점에 이르렀다(물론 아직까지 연옥과 지옥인 곳도 존재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는 인류 역사상 미증유의 보편적인 고민과 불안과 허무를 안고 있는 것에 대해, 그리고 자주 우리 시대가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살아가기 힘든 시대라고 느끼는 것에 대해 해명해야만 한다.

보르헤스는 시가 사람들이 불행을 극복하게 도와주고 또 그들이 행복해지는 데 꼭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오늘날 이런 말은 다소 웃기고 케케묵은 소리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맞는 말이다. 단지 그러기가 어려워졌을 따름이다. 이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훨씬 분명해진다. 인간은 불행을 막지 못하는데, 예컨대 고대 그리스인은 불행이 변덕스러운 천상의 신들에게서 비롯되므로 인간은 그저 시시때때로 닥치는 불행을 참고 견딜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혹시 가능하다면 불행에서 어떤 가치를 끌어내 쓸모있는 삶의 재료로 삼는 것이 최선이며 그것이 바로 불행에 대한 시의 ‘처리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한술 더 떠, “신들이 인간세상에서 갖가지 불행을 초래하는 것은 시인에게 읊을 만한 것을 마련해주기 위해서다.”라고까지 말했다. 이것은 당연히 비아냥거리는 말이 아니다. 불행에 처한 이들이 분발하여 발견해낸 이치이다.

알프레드 테니슨도 “못 견뎌낼 슬픔 따위는 없다. 슬픔을 이야기 속에 두거나, 혹은 슬픔에 관한 이야기를 간절히 풀어낸다면.”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불행이 삶의 재료가 되면 모두가 다 일치하지는 않는 의미와 그 형체들이 생긴다. 사람은, 특히 일을 하는 사람은 그 재료를 지극히 자연스럽게 인식하고 그 부담과 피해 그리고 불결함과 번거로움을 상당히 많이 감당해낼 수 있다. 그것은 심지어 사람이 스스로 찾고, 발견하고, 수집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그럼으로써 자아는 점차 타자에 이르고 세계로 진입한다). 그것은 ‘쓸모있는’ 것이고 가치를 낳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데서 얻기 힘든 갖가지 이해와 의미를 생성하기도 하며 슬픔은 단지 필요한 대가이거나 심지어 독특하고 심오한 오솔길이 되어 일상의 날들에서는 다다를 수 없는 어떤 지점, 즉 머나먼 곳이나 몸속 깊은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그저 단순히 고통을 당하는 게 아닌 것이다. 불행은, 특히 일이 끝나고 완성품이 나타나는 순간에는 이미 감싸여 날카로운 모서리는 사라지고 묵직한 느낌만 남은 일련의 추억들일 뿐이다. 홍일弘一 법사(1880~1942, 속명은 리수퉁李叔同이며 톈진의 거상 가문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 후 돌아와 음악, 미술 교사로 일하다가 1918년 항저우 영은사靈隱寺에서 출가해 엄격한 고행승으로 여생을 보냈다. 음악, 연극, 서예, 회화에 모두 능했던 중국 현대화 초기의 선구적 예술가로서 불교 이론의 대가이기도 했다)가 임종 전에 남긴 ‘비환교집悲歡交集’(온갖 슬픔과 기쁨의 교차), 이 유명한 4글자야말로 행복에 대한 묘사로서 가장 합당하다.

시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준다는 보르헤스의 말은 주로 시를 읽고 읊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지 시를 쓰는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시를 읊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은 고통을 대가로 거의 동일한 효과와 위로를 얻는다.

우리가 보르헤스의 말을 진부하게 느끼는 것은 단지 불행에 대응하는 그 오래된 예술을 보편적으로 망각한 나머지 더 이상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신뢰하지도, 또 쓰지도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보르헤스가 「공범」(시인은 대자연의 불행한 공범이다)이라고 이름 지은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나는 우주와 굴욕과 환락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다
나는 나를 해치는 모든 것을 위해 변명해야 한다
나의 행운과 불행은 전혀 중요치 않다
나는 시인이다”

사람들은 갈수록 행복을 오직 물질에만 걸고 있다. 이것은 그 나름대로 일리가 있지만 확실히 충분치 않다.

Jorge Luis Borges in 1921. Jbmurray/Wiki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