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한시-이청조李淸照 청평락 · 어릴 땐 해마다 눈 속에서 淸平樂 · 年年雪裏

청평락 · 어릴 땐 해마다 눈 속에서 淸平樂 · 年年雪裏/송宋 이청조李淸照

年年雪裏 어릴 땐 해마다 눈 속에서
常插梅花醉 늘 매화를 머리에 꽂고 취하였지
挼盡梅花無好意 중년엔 매화를 만지작거려도 기쁘지 않고
贏得滿衣清淚 옷자락 가득 맑은 눈물만 흘렸지

今年海角天涯 올해는 바다 모퉁이 하늘 끝에서
蕭蕭兩鬢生華 쓸쓸히 두 귀밑에 흰 머리는 나고
看取晚來風勢 저물녘 바람 부는 기세 보아하니
故應難看梅花 내일 매화를 보기도 어려울 거야

청평락(淸平樂)은 당나라 때 교방악에서 유래한 것으로 송나라 때 하나의 사패(詞牌)로 정착되었다. 쌍조 8구 46자이며, 전단은 측성 운자 4개를 각 구마다 달고 하단은 평성 운자 3개를 3구를 제외하고 단다. 청평락 뒤에 부제를 이 사의 첫 구로 붙인 것은 사 제목을 적는 관행이다. 같은 곡조로 지은 사가 많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이 사는 이청조(李清照, 1084~1155)가 만년에 매화를 통하여 자신의 일생을 돌아본 작품이다. 사의 서술 방식이 앞 단은 회고조이고 뒤의 단은 현재의 상황을 서술하였는데 자세하게 말하지 않고 가장 특징적인 것을 스케치하듯이 지난 일을 서술하였다. 백묘법(白描法)을 쓴 것이다. 사를 이끌어가는 핵심어는 매화이다. 그런데 여기서 매화는 실제의 매화이기도 하면서 시인의 인생을 인상적으로 비유하는 일종의 그림자와도 같은 존재이다.

1단의 앞 2구는 결혼한 초기에 겨울 매화를 머리에 꽂으며 놀던 가장 행복했던 시기의 작품이고 뒤의 2구는 남편이 죽은 뒤의 슬픈 나날들을 회고하였다. 2단의 앞 두 구는 지금 처한 노년의 상황을 노래하였고 마지막 2구는 올해도 매화를 보지 못할 것 같은 상황을 노래하여 우울하고 적막한 자신의 현재를 말하고 있다.

이청조의 아버지 이격비(李格非)는 <낙양가람기>를 쓴 문장가인데 다량의 장서를 소장하고 있었다. 이청조는 제남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 벼슬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서울 개봉으로 와서 살았다. 집에 서화가 풍부하고 또 유복하였기 때문에 교육환경이 아주 좋았다. 1101년 18살에 당시 태학생이던 조명성(趙明誠)과 결혼하였다. 남편도 서화와 고동을 모으는 취미가 있어 두 사람은 서화와 골동품을 모으고 정리하고 해제 쓰는 일을 일과로 삼았다. 만약 세상이 평화로웠다면 우리는 이청조와 조명성을 서화 수장가로 기억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1127년 이청조가 44세 때 금나라가 변경을 함락하고 북송 황제를 잡아가는 초유의 일이 발생하였다. 정강지변(靖康之變)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렇게 부르는 것은 당시 연호가 정강이기 때문인데 흠종(欽宗)은 1년밖에 통치를 못한 것이다. 그런데 흠종의 아버지 즉 휘종(徽宗)은 조길(曺佶)이라는 본명으로도 유명한데 매우 그림을 잘 그리고 필체도 아주 독특한 인물이었다. 고려의 공민왕도 그림을 잘 그렸는데 두 사람은 모두 나라가 망한 시점에 왕을 하다 보니 사람들이 서화에 탐닉해서 나라를 망쳤다고 하지만 서화가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다. 후대인이 결과를 아는 상태에서 이전의 일을 분석해 짜맞추어서 그렇지 당시에는 사실 미래를 알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그런 논리라면 고려 명종이나 연산군 때 왜 나라가 망하지 않는가?

각설하고, 전란의 와중에서도 두 사람은 그동안 모은 서화를 15대의 수레에 싣고 남으로 피란을 떠났다. 건강(建康)까지 배로 이동하고 다시 강녕부(康寧府)로 이동하였다. 1129년 8월에 남편이 여기서 죽는다. 이후에 이청조는 그 서화를 이끌고 1131년 소흥(紹興)으로 이동하였는데 여기서 도둑을 만나 태반의 서화를 잃게 된다. 다음 해에 당시 수도인 항주로 이동하여 그 곳에서 11년을 더 살다가 72세로 작고한다.

매화가 필 무렵이면 술을 한 잔 마시고 눈 속에 핀 매화를 찾으러 다니고 또 그 가지를 꺾어 머리에 꽂고 남편과 서로 마주 보고 웃던 시절! 앞 2구는 바로 시인이 가장 행복했던 처녀 시절과 신혼 시절을 말한 것이다.

나진(挼盡)은 손으로 만지작거려서 매화가 다 망가진 것을 말한다. 무호의(無好意)는 좋은 마음이 없다는 말이다. 영득(贏得)은 원하지 않는 어떤 것만 남았다는 말이다.

습관적으로 눈이 내리고 매화가 피는 시절이 오면 시인은 매화를 따서 추억에 젖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심코 만지작거리며 아빠와 놀던 어릴 때, 남편과 지내던 단란할 때를 추억해도 기분은 좋아지지 않고 온통 슬픔으로 가득해서 옷자락 가득 눈물을 뿌렸다고 한다. 이런 진술로 미루어 남편이 세상을 떠난 46세 이후의 상황의 노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는 그가 소흥과 항주로 떠돌며 애지중지하던 서화도 다 잃어버리고 남편도 없이 유랑하던 시절이니 어찌 호의(好意)가 생겨날 리가 있겠는가? 세월호 사건으로 아이를 가슴에 묻은 어머니들이 봄이 와서 꽃을 본들 호의가 생겨나겠는가? 긴 세월을 매화를 매개로 하여 이렇게 4줄에 담아낸 것이 놀랍기만 하다. 이청조의 재주와 그 문필력에 깊은 탄복을 한다.

사람은 언제나 현재에 사는 법이다. 그래서 시인은 뒤의 단에서는 현재를 노래하였다. 해각(海角), 바다 한 모퉁이는 바로 항주를 말한 것이다. 바다의 시점에서 보면 뿔처럼 육지로 들어가 있으니 참으로 교묘한 표현이다. 천애(天涯)는 하늘가라는 뜻으로 세상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지역이나 상황을 말한다. 자신의 마음의 고향이 개봉이기에 이런 표현을 한 것이다. 자신의 우거지 항주는 개봉에서 천애에 떨어져 있다. 또 부모와 남편도 다 작고하고 없으니 천애의 심정이 더욱 절절하다. 세월은 무정하여 그 유랑의 상처를 치유할 겨를도 없이 이제 늙음이 찾아와 두 귀밑에 서리를 뿌려 놓았다. 오늘 옛날 생각을 하면서 문득 추억 속의 매화를 떠올려보았다. 그런데 바람이 무척 거세다. 분명 내일 매화는 다 떨어지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저녁에 바람이 거세어 매화를 보기 어려울 것이라는 말은 단순히 매화만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이 사는 스케치하듯 인생을 묘사하였지만 의미심장하며 사람의 심장을 녹이는 데가 있다. 이런 사를 완약사(婉弱詞)라 하는데 이런 사의 대가가 바로 이청조이다. 오늘 무척 추워 밖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만약 추위에도 마음이 있다면 이청조의 이 작품을 들고 나가면 그의 가슴도 분명 녹을 것이다.

北宋 巨然 《雪景图》 台北故宫博物院藏

365일 한시 3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