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루몽》과 해석 방법론-《홍루몽》의 텍스트 지위와 해석 문제 2

제3장 《홍루몽》의 텍스트 지위와 해석 문제
– 관통론, 유기설, 우열론, 구조학, 탐일학(探佚學)

2. 텍스트의 ‘관통’과 ‘내재 구조’, 그리고 ‘유기설(有機說)’

《홍루몽》의 텍스트가 완전한지, 앞뒤가 관통되는 것인지 여부에 관한 문제 안에는 여러 가지 중요한 문학 개념이 관련되어 해석 활동을 좌우한다.

1) 뒤쪽 40회 ‘속작설(續作說)’의 제기

120회 정고본(程高本)의 안정적인 지위는 1921년에 후스가〈《홍루몽》 고증〉(개정판)을 발표한 후 위협을 받았다. 후스는 네 가지 방증을 나열하며 ‘고악 속작설’을 지지했다. 하지만 이 방증들은 결국 모두 외재적인 것으로서, 그것이 성립하는지 여부는 모두 ‘고악은 속작자가 아니다.’라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을 뿐, 《홍루몽》 텍스트의 해석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사실 후스 본인은 내적 증거를 더욱 중시했다. 그는 네 가지 방증을 나열한 뒤에 이렇게 보충했다.

하지만 이런 증거들이 당연히 중요하긴 하지만, 어쨌든 내용 연구를 통해서 뒤쪽 40회와 앞쪽 80회가 절대 한 사람이 쓴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만 못하다.

이것은 후스가 방증보다 내적 증거를 더 중시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위핑보가 제시한 두 가지 증거(가보옥의 출가와 사상운의 결말)를 인용하면서, 다시 자신의 다섯 가지 증거를 덧붙여 ‘조응(照應)’의 문제를 논증했다.

1. 가보옥의 출가는 제1회에서 스스로 진술한 말과 합치되지 않는다.
2. 사상운의 결말은 “기린 장식을 빌려 백년해로의 복선을 깔아두다[因麒麟伏白首雙星]”라는 제목과 호응하지 않는다.
3. 소홍(小紅)에 대해서는 결말이 전혀 제시되지 않았다.
4. 향릉(香菱)의 결말 역시 “결코 조설근의 본래 의도가 아니다.”
5. 왕희봉의 결말은 “이령삼인목(二令三人木)”과 아무 관계가 없다.
6. 승려가 가보옥에게 옥을 가져다 준 장면은 문장이 졸렬하여 역겨움을 느끼게 한다.
7.가보옥이 갑자기 팔고문(八股文)을 짓고, 거인(擧人) 시험에 응시하려 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여기서 여섯 번째를 제외한 나머지 항목들은 모두 내용상 ‘조응’의 문제를 얘기한 것이다. “전혀 호응하지 않는” 이유는 주로 속작자가 ‘작자의 본래 의도’를 잃어 버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후스가 〈고증〉을 발표한 이래 ‘텍스트 권위’의 문제(concept of textual authority)가 《홍루몽》 연구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실링스베리(Peter Shillingsburg)는 《컴퓨터 시대의 학술 편집(Scholarly Editing in the Computer Age)》에서 이렇게 제시했다.

‘권위 있는 텍스트’를 얘기하려면 텍스트를 통제하는 권위의 소재를 파악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깊이 탐구할 문제이다. 《홍루몽》 연구에서 이 문제의 중요성은 소홀히 취급할 수 없으며, 판본과 이문(異文)의 문제 역시 해석 문제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어서 따로 떼어내기 어렵다.

2) 위핑보의 ‘관통론’과 텍스트 지위

후스가 〈고증〉에서 제기한 증거는 지금 보면 조잡하고, 그가 거론한 방증들에 대해서도 학자들로부터 의문이 제기되었지만, 당시에는 큰 영향을 미쳐서 신홍학 연구자들은 후스의 견해를 의심 없이 믿었다. 예를 들어서 위핑보는 이렇게 말했다.

《홍루몽》의 원작은 80회뿐으로서 이는 조설근이 쓴 것이고, 뒤쪽 40회는 고악이 이어 쓴 것이다. 이것은 이미 확정된 판단이라서 흔들릴 수 없다. 독자들은 그저 후스 선생의 〈홍루몽》 고증〉을 한 번 보면 바로 확연히 이해할 것이다.

‘고악 속작설’은 즉시 《홍루몽》 전체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에 영향을 미쳤다. 앞쪽 80회와 뒤쪽 40회의 작자가 다르다면 120회 《홍루몽》의 ‘의의’가 관통하는지 여부가 신홍학 연구자들이 주목할 만한 과제가 되기 때문이다. 후스의 작업이 주로 ‘작자가 누구냐?’라는 문제를 논증하면서 외적 증거를 찾아 모으는 것이었다면 위핑보의 작업은 주로 내적 증거를 찾아 모으는 것이었다. 위핑보 자신의 고백을 보자.

80회의 《홍루몽》만 있다는 걸 인정한다면 우리는 수없이 많은 터무니없는 생각들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지금도 이렇다 할 무슨 중대한 의견이 없다. 반드시 이 책에서 많은 증거를 찾아야만 비로소 토론할 만한 가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말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위핑보는 우선 “(《홍루몽》이) 앞뒤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前後兩橛]”는 개념을 계속 마음에 담고 있다가 나중에야 《홍루몽》에서 증거를 찾으려 한 것이지, 갖가지 문제점들을 발견한 뒤에 비로소 뒤쪽 40회를 의심한 것이 아니었다. 위핑보와 청나라 때 평론가들 사이의 차이는 기본적으로 ‘120회가 하나의 총체’라고 여기는 것과 ‘앞뒤 두 부분’ 되어 있다고 여기는 데에서 비롯된다. 사실 위핑보는 일부러 앞쪽 80회와 뒤쪽 40회를 ‘분가(分家)’시켜서 ‘앞뒤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는 관점으로 ‘120회가 하나의 총체’라는 개념을 대체한 것이다. 그가 〈뒤쪽 40회에 대한 비평[後四十回底批評]〉에서 아주 분명하게 말했듯이, 뒤쪽 40회를 비판하는 목적은 독자들의 사상적 습관을 타파하려는 데에 있었다. 120회본이 유행한 이래 독자들의 마음속에는 줄곧 이것이 하나의 총체이고 한 사람에 손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앞쪽 80회와 뒤쪽 40회 사이의 모순점을 긁어모았는데, 그 목적은 후스의 ‘고악 속작설’을 공고히 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뒤쪽 40회가 다른 사람의 글이라는 것을 믿게 하려는 데에 있었다.

이렇게 보면 뒤쪽 40회에 대한 위핑보의 비판에는 순환논증의 혐의가 없지 않다. 즉 먼저 뒤쪽 40회가 속작이라고 전제한 다음 텍스트에서 증거를 찾아 ‘속작설’을 더욱 강화하려 함으로써 해석적 순환(hermeneutical circle)에 빠져 버린 것이다.

전제가 다르면 해석도 다르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서 위핑보는 가보옥이 팔고문을 지으려 하고 나중에 거인에 급제한 것은 앞쪽 80회의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왕희렴은 ‘앞뒤가 두 부분’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가보옥은 팔고문을 천하게 여겨 싫어했지만 공명(功名)을 이루려는 뜻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빌려 사다리[梯階]로 삼았던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향릉의 결말에 대해서 위핑보는 첫째, 제80회에서 향릉이 안팎으로 감당할 수 없는 좌절을 겪어서 의사를 부르고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었다고 했으니, 이는 그녀가 뒷부분에서 죽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둘째, 태허환경(太虛幻境)의 책에 암시된 바에 따르면 향릉은 하금계(夏金桂)의 손에 죽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므로 그는 “대관원(大觀園)에 있는 모든 이들의 결말을 고악은 대부분 앞쪽 80회에 들어 있는 말에 의거하여 보충했다. 다만 향릉의 이야기는 가장 잘못 보충함으로써 작자의 뜻과 완전히 상반되게 만들어 버렸다.”고 했다. 그러나 청나라 때의 평론가들은 향릉이 더 일찍 죽지 않은 것이 앞부분 문장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예를 들어서 홍추번(洪秋蕃)은 제120회에서 향릉의 결말에 대해 평하면서, “(《홍루몽》이) 영련(英蓮)의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영련의 이야기로 마무리했다”고 했다. 진기태(陳其泰: 1800~1864) 역시 “향릉에서 시작해서 향릉에서 끝났다”고 했다. 하금계가 오히려 향릉의 손에 죽은 것에 대해서 홍추번은, “하금계는 향릉을 독살하려다가 마침 자기가 독을 마시고 말았다. 옳지 않은 짓을 많이 저지르면 반드시 스스로 죽음에 이르게 되니, 이것으로 정(鄭)나라 장공(莊公)의 말을 증명할 만하다.”라고 평했다. 또 진기태는 이렇게 평했다.

이 회(제103회: 역자)는 향릉 이야기에 속하는 것으로서 나중을 위해 암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가화(賈化)가 진비(甄費)를 만나게 함으로써 멀리 제1회와 호응하게 하고 마지막 회의 이야기를 위해 미리 복선을 깔아 두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향릉 이야기[香菱傳]’가 앞쪽의 글과 통일을 이루지 않는다고는 전혀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이런 묘사 수법이 앞뒤의 호응을 이루고 있으니 구조와 줄거리 측면에서 모두 정리(情理)에 들어맞는다고 생각했다.

이런 예들은 전적으로 청나라 때의 평론가들과 위핑보의 독법이 모두 그들의 사전 가정(presupposition)에 영향을 받았으며, 텍스트의 의미가 결코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줄 수 있다. 청나라 때 평론가들의 해석 역시 그들의 사전 가정을 통해 텍스트를 이해하면서, 아울러 앞뒤 줄거리를 소통시키고 그 뜻을 정함으로써 자신들의 주장을 자연스럽게 합리화한 것이었다.

청나라 때 평론가들과 위핑보의 독법에 나타난 차이는 우리로 하여금 ‘텍스트의 객관적 지위’라는 문제에 대해 다시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신홍학 연구자들의 뒤쪽 40회에 대한 공격을 통해 보면 《홍루몽》 뒤쪽 40회의 텍스트 지위는 사실상 외재 요소에 의해 결정되었다. 여기서 이른바 외재 요소란 저작권을 둘로 나눈다는 개념(원작자/속작자)을 가리킨다. 이 개념의 영향은 ‘관통론’에서 구현되었다. 위핑보가 보기에 텍스트는 원작자의 통제 아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갖가지 선이 있는데, 현존하는 뒤쪽 40회는 그것을 계승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래 텍스트가 앞뒤를 관통하며 호응하는지 여부는 《홍루몽》의 이야기 자체에서 결정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위핑보는 《홍루몽변》(1923년 출판)을 쓸 때 자서전설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관통론’의 논거 역시 내적 증거와 외적 증거로 나누었다. 이른바 ‘외적 증거’라는 것은 텍스트 이외의 역사적 사실에 의거하여 판단의 기준을 정하는 것으로서, 바꿔 말하자면 자서전설을 뒤쪽 40회에 확대 적용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 조씨 가문의 운세로 뒤쪽 40회에 묘사된 가씨 가문의 처지(대국[大局])를 헤아리고, 둘째, 조설근의 만년 상황으로 가보옥의 결말(개인)을 헤아리는 것이다. 이른바 ‘내적 증거’란 앞쪽 80회를 읽으면서 얻은 ‘조설근의 본래 의도’로 뒤쪽 40회를 헤아리되 조씨 가문의 역사적 사실(외적 증거)에 의지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이제 각기 하나씩 예를 들어서 ‘관통론’과 외적 증거, 내적 증거의 관계를 설명하겠다.

제80회 이후에 가보옥이 출가한 일이 있었는지 여부에 관해서 위핑보는 1921년에 구졔깡(顧頡剛: 1893~1980)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처음에 위핑보는 작품 안의 문장에서 출발하여 “가보옥이 장차 출가할 것이라고 분명히 언급하는 문장이 없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 자신도 앞쪽 80회에서 가보옥이 장차 출가할 것임을 드러내는 정보가 최소한 네 군데에서 발견된다는 점을 이미 주목했다. 하지만 그는 그것들이 모두 “가보옥이 반드시 승려가 되려 한다는 것은 아니”라거나 “어리석게 지적할 필요 없다,” “가보옥과는 무관하다”는 등의 말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면서 가보옥의 출가에 대해 어떻게든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본래 그의 이론에서 그가 거론한 네 가지 이야기는 모두 작품의 전후를 ‘관통’하는 내적 증거가 담긴 것들이었지만, 여기에서는 모두 가볍게 무시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 자신은 조설근이 나중에 그저 가난한 처지가 되었을 뿐 결코 출가는 하지 않았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위핑보의 글을 보면 그는 분명히 ‘외적 증거’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어쨌든 가보옥이 작자 자신을 비유한 것임을 인정한다면 조설근이 책을 쓰는 모습을 가지고 작품 속에서 가보옥이 마땅히 맞이해야 할 결말을 어림짐작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그는 내적 증거를 갖고 있기는 했지만, 외적 증거를 중시하는 자서전설의 영향 때문에 가보옥이 출가한 일에 대해 지대한 회의를 품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구졔깡이 또 두 가지 내적 증거를 찾아내자 위핑보도 비로소 관점을 바꾸었다. 구졔깡이 거론한 ‘증거’는 진비(甄費, 진사은[甄士隱])과 지통사(智通寺)의 노승을 가보옥의 장래 모습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증거’는 사실 가보옥의 결말과 필연적인 관계가 전혀 없지만, 위핑보는 결국 “가보옥의 출가를 논하는 식견이 아주 높다”고 찬양했는데, 그 원인을 따져 보면 외적 증거가 부족한 것과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다. 우핑보의 다음 말은 충분히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조설근이 출가한 적이 없다고 해서 가보옥도 그러리라고 함부로 단정할 수 없다. 게다가 조설근의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거의 아는 게 없기 때문에 《석두기》를 반쯤 써 놓고 작자가 출가했는지 병으로 죽었는지 어림짐작할 도리가 없다. 우리는 가보옥의 출가를 부인할 필요 없이……

이 결론은 외적 증거가 부족했기 때문에 주로 내적 증거에 의지해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위핑보의 ‘관통론’이 외적 증거를 중시하면서도 내적 증거를 지나치게 중시한 정황은 남김없이 드러났다.

또 다른 예는 뒤쪽 40회에 가씨 집안이 재산 몰수를 당하는 일이 있어야 하는지 여부이다. 이 문제는 구졔깡이 제시했다. 처음에 구졔깡은 여덟 개의 내적 증거를 나열하며 “가씨 집안이 궁핍해진 것은 재산 몰수 때문이 아니었음을 가리키는 증거가 아주 많음”을 논증했다(1921년 5월 17일 위핑보에게 보낸 편지.) 위 핑보는 재산 몰수 사건이 있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듯하다. 6월 10일에 구졔깡이 ‘옛날의 진본’에 대해 논의할 때에도 “‘재산 몰수’ 사건이 원작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작품에서 ‘쇠락’에 대한 예언은 사실 너무 많다”고 했다. 나중에 그는 자신들이 왜 재산 몰수 사건이 없었다고 생각했는지에 대해 다시 검토하여 두 가지 결론을 얻어냈다. 첫째, 이 책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데, 조씨 가문에는 재산을 몰수당한 사실이 없다(우리가 알고 있는 그 시점에서는). 둘째, 책에는 응당 재산 몰수를 당해야 한다고 분명히 밝힌 문장이 없다. 이것은 그들의 관통론이 완전히 외적 증거를 토대로 구축되었음을 증명한다. 재산 몰수에 간한 역사적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면 그들은 앞쪽 80회에서 재산 몰수에 대해 예시(豫示)한 단서들을 본체만체 할 것이다. 심지어 구졔깡이 “쇠락에 대한 예언은 사실 너무 많다”고 인정했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재산 몰수라는 측면에서는 생각을 진행하지 않았다. 나중에 위핑보는 〈고악 속작의 근거[高鶚續書底依據]〉에서 다시 세 가지를 보충함으로써 모두 열두 개의 재산 몰수를 예언하는 내적 증거가 제시되었다. 그래서 위핑보도 어쩔 수 없이 “이 책에서 보면 확실히 장차 재산 몰수와 같은 일에 대한 예언이 있으며 또한 번거롭게 자세히 추측할 필요가 없다는 느낌이 아주 명확히 든다.”고 인정해야 했다. 이로 보건대 그들의 마음속에서 관통론은 내적 증거보다는 외적 증거에 더 많이 의지하고 있었으며, 그들에게 텍스트의 구속력은 역사적 사실(조씨 가문의 역사)을 따라잡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 위핑보가 조씨 가문의 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사상운이나 왕희봉, 가교저 등 책의 등장인물들의 결말이 어떠했는지를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어림짐작’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이 때문에 그는 앞뒤 관통의 문제를 논의할 때 다시 텍스트를 근거로 삼아야 했다. 그는 자신의 곤경에 대해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80회 이후는 모두 캄캄한 긴 밤이지만 내가 그 사이에서 길을 판별해 나가면 자연히 발길을 비출 등불 하나를 빌릴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작자의 신세는 이렇게 적어서 결코 길을 인도하는 데에 필요한 만큼 충분하지 않으니, 이 점이 내게 또 하나의 곤란함을 추가한다. 지금 억지로나마 등불로 삼을 수 있는 것은 그저 원작 80회뿐이다. 책의 처음과 끝이 항상 호응하기 때문이 앞쪽의 내용을 통해서 뒤쪽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80회에 남겨진 결말이 암시하는 것 또한 아주 적지는 않다고 할 수 있다.

위핑보가 처음과 끝의 ‘호응[照應]’을 추구한 목적은 당연히 뒤쪽 40회가 ‘조설근의 원래 의도’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헤아리기 위해서였다. 이 문제는 또 ‘구조학’과 ‘잃어버린 것을 찾는[探佚]’의 문제를 유발한다.

林黛玉과 薛寶釵

3) 《홍루몽》의 ‘내재 구조’와 ‘유기설(有機說)’

위핑보의 ‘관통론’은 내적 증거와 외적 증거를 아울러 채용했지만, 그 역시 외적 증거가 믿을 만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위잉스(余英時: 1930~ )에 이르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초점을 작품 자체로 옮긴다. 위잉스는 자신의 연구 방법을 이렇게 설명했다.

고증은 자료를 필요로 하고, 자료는 원시적일수록 믿을 만하다. 그렇다면 《홍루몽》 텍스트보다 더 원시적이고 더 믿을 만한 자료가 어디 있는가? 하물며 우리는 또 이른바 ‘비연재 비평’을 많이 보유하고 있으니 고증의 2차 자료로 삼을 수 있지 않은가? 나의 〈《홍루몽》의 두 세계〉와 〈지금은 돌아볼 길이 없다[眼前無路想回頭]〉는 성과가 다른 이들에게 흡족한지 여부와 상관없이 사실은 그 또한 고증을 한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내가 종사하는 것은 여전히 인지적(認知的) 작업이지 주관적 평론이 아니다. 다른 점이라면 내가 사용하는 것은 고증학에서 이른바 ‘본래의 증거[本證]’ 또는 ‘내적 증거’라고 부르는 것이지 일반적인 자서전파 연구자들이 믿고 있는 ‘방증’이나 ‘외적 증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내가 취한 길은 서양의 ‘구조적 분석’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

그가 ‘방증’이나 ‘외적 증거’를 취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그는 근본적으로 《홍루몽》을 역사 문헌으로 처리하는 데에 반대하고 그것이 소설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특히 그 안에 포함된 이상성과 허구성을 중시한다. 둘째, 새로운 자료의 출현에는 고도의 우연성이 존재하며 또한 극히 제한적이다. 일단 새로운 자료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으면 모든 연구는 정지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으니, 이것은 신홍학 자서전설(위잉스는 그것을 ‘고증파’라고 부른다)의 내부적 위기이다. 이 점은 위핑보의 상황에 비춰 보면 더욱 허튼 주장이 아니다. 다만 외적 증거에 의존하지 말자는 위잉스의 이런 건의는 소극적 방법일 뿐이다. 그의 목적은 비평의 주의력을 작품에 집중하는 데에 있다.

위잉스가 ‘역사식의 연구’(‘방증’을 중시하는)를 비판한 것은 사실 르네 웰렉(René Wellek: 1903~ )과 오스틴 워렌(Austin Warren)이 《문학 이론》에서 얘기한 외연적 연구(the extrinsic approach)이다. 역사를 경시하고 문학을 중시하는 위잉스의 경향은 표면적으로 보면 신비평(New Criticism)의 방법과 매우 유사하다. 또한 신비평에서도 유기론(organism)에 대해 즐겨 이야기하듯이 위잉스도 유기성을 언급한다. 하지만 신비평은 ‘작자의 의도’를 배척하는 데에 비해 위잉스는 ‘작자의 의도’를 해석의 목표로 간주한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전범’을 제시하려는 위잉스의 임무에 대해 분석해 보자.

위잉스는 《홍루몽》 연구의 혁명을 통해 새로운 전범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전범은 《홍루몽》 연구의 중심을 그 작품의 창작 의도와 내재 구조 사이의 유기적 관계에 두는 것이다. 이런 ‘유기적 관계’의 구체적인 정황은 무엇인가? 위잉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풀이한다.

새로운 전범에서는 작자의 본래 의도가 기본적으로 소설의 내재 구조 안에 숨겨져 있다고 가정하고, 특히 양자 사이의 유기성을 강조한다. 이른바 유기성이란 작자의 의도를 반드시 작품 전체를 관통하여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 〈지금은 돌아볼 길이 없다〉에서는 이렇게 썼다.

새로운 ‘전범’(통속소설의 내재 구조를 통해 《홍루몽》의 창작 의도를 연구하는 것을 가리키며, 나의 ‘두 개의 세계’에 대한 논의를 포괄함)은……

바꿔 말하면 새로운 전범의 연구 목적은 ‘창작 의도’이고, 구체적인 방법은 텍스트의 ‘내재 구조’를 통해 탐구한다는 것이다. 위잉스의 이런 개념은 서양의 판본학자 탠설(Thomas Tanselle: 1934~ )의 견해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일치한다. 탄슬레는 〈작가의 최종 의도라는 문제(The Problem of Final Authorial Intention)〉라는 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그러면 작자가 의도한 의미는 어떻게 찾을 수 있는가? 그 질문에 대답하려면 불가피하게 작자의 의도에 관한 가장 믿을 만한 문헌 증거인 작품 자체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이른바 텍스트의 ‘내재 구조’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위잉스가 제시한 가설은 다음과 같다.

소설, 특히 《홍루몽》처럼 정성을 기울여 창작한 소설은 자연히 전체적인 구상과 전반적인 배치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우리가 작자의 창작 의도(creative intention)을 얘기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그것을 얘기하려면 작품 전체의 내재 구조를 통해서 얘기할 수밖에 없다. 내가 〈《홍루몽》의 두 세계〉에서 했던 작업이 바로 이런 분석이다.

여기서 하나의 실례를 들어 위잉스의 유기설을 설명해 보자. 위잉스는 〈《홍루몽》의 두 세계〉에서 제17회의 가보옥과 가정이 대관원으로 들어가 각 경관(景觀)과 건물에 대련(對聯)과 편액(扁額)을 짓는 장면에 대한 서술의 이면에는 적어도 두 가지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고 주장한다. 그 가운데 두 번째 의미(대관원이 바로 이상세계라는 것)는 바로 ‘유기설’에 힘입은 것이다. 그는 “대관원이 가보옥과 여러 자매들의 유토피아이자 정결한 땅이라면 대관원 안의 정자와 누각, 건물 같은 것들에 대해 자기들 스스로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관원 안에는 건축물이 너무 많아서 그날 가보옥은 모든 것들에 대해 대련과 편액을 짓지 못했다. 그러다가 76회에 이르러서 비로소 당시 편액을 지었던 상황에 대해 완전하게 보충한다. 즉 대관원 안의 각처에 대해 가보옥이 이름을 짓지 못한 부분들은 모두 여러 자매들, 특히 임대옥에 의해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위잉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제76회와 제17회 사이에는 60회나 떨어져 있으니, 조설근이 이미 완성한 원고에서 보자면 거의 작약의 남은 향기 같고, 앞뒤가 호응하는 것이 마치 상산(常山)의 뱀과 같다. 《홍루몽》을 창작할 때 작자가 항상 전체 국면을 가슴에 담고 있었음이 무척 분명히 드러난다.

위잉스의 생각은 대략 이러하다. 즉 가보옥과 여러 자매들이 편액을 짓는 일을 도맡아 한 데에는 이상세계가 외부 사람에 의해 오염되는 것을 용인하지 않으려는 작자의 의도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도를 반드시 작품 전체를 관통하여 찾아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른바 ‘유기성’이라는 것이다.

텍스트의 유기성에 관한 이런 견해는 위잉스가 주장한 새로운 전범에서 중심적인 이념이다. 그는 유기성 개념은 전통적인 문인들에게도 있었으니, 그들의 글에서 “상산의 뱀처럼 머리와 꼬리가 서로 호응한다.”는 등의 말을 한 것이 그런 예라고 했다. (앞서 인용했던 장신지의 글은 위잉스의 말이 허언이 아님을 증명한다.) 그러나 후스 이래 신홍학 연구자들 가운데는 이것을 발휘한 사람이 아주 드물다.

위잉스가 유기설을 주장한 데에는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 첫째, 연구 방향상의 의의로서, 각 학파의 ‘역사식 연구’를 유기설로 대체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역사식 연구’는 《홍루몽》 이외의 역사 자료를 중시하는 것이다.) 유기설의 건립은 연구의 방향을 밖으로 치달리던 이전과는 달리 안(즉 텍스트 내부)으로 수렴하도록 전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개념은 그 당시 서양 학자가 주장한 것과 일치하는데, 밀러(Lucien Miller, 米樂山)의 《홍루몽에서 허구의 가면: 신화, 모방, 그리고 페르소나》가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자료 측면의 의의이다. 위잉스는 유기설이 ‘자료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새로운 전범이 강조하는 유기설은 자료의 문제에서 마침 고증파의 위기를 해결해 줄 수 있다. 80회의 《홍루몽》과 무수한 지연재 비평은 최소한 《홍루몽》 연구자들로 하여금 상당 기간 동안 자료의 결핍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준다.”는 것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홍루몽》의 앞쪽 80회와 뒤쪽 40회가 똑같이 텍스트이지만 위잉스는 지금까지 뒤쪽 40회의 ‘유기성’과 ‘내재 구조’를 언급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의 ‘유기설’은 대개 앞쪽 80회에만 한정된 것이지 뒤쪽 40회까지 포함하지는 않는다. 위잉스의 작업과 위핑보의 작업은 상호 보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위핑보가 뒤쪽 40회와 앞쪽 80회의 내용이 관통될 수 없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탐구한 데에 비해 위잉스는 앞쪽 80회의 ‘유기적 구조’를 잘 보여준다. 위잉스가 저우루창처럼 뒤쪽 40회를 떼어내 휴지통에 버리지는 않지만, 그의 실제 연구는 이미 ‘텍스트’에 대한 그의 취향(80회본인지 120회본인지)을 반영하고 있다. ‘유기성’ 개념의 영향 때문에 그는 뒤쪽 40회를 전혀 믿지 못했는데, 적어도 세 부분에서 이런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위잉스는 새로운 ‘전범’의 연구(그는 이 방향을 극력 주장했는데)는 “넓은 의미의 문학 비평에 속하는 것”인데, 문학의 관점에서 《홍루몽》을 연구한 것은 왕궈웨이가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깊이” 수행했다고 했다. 이것은 왕궈웨이를 동지로 끌어들인 것이지만, 그는 오히려 왕궈웨이가 “‘자서전설’의 세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논의를 할 때 80회 이후의 내용을 잡다하게 채용한 부분이 많았다.”고 비판했다. 이로 보건대 위잉스는 앞쪽 80회와 뒤쪽 40회를 일체로 여기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둘째, 그의 실제 분석 역시 유기설의 따라 《홍루몽》을 이해하는 주로 단서가 뒤쪽 40회에 이르면 중단되어 버린다는 것을 뚜렷이 보여준다. 예를 들어서 그는 두 세계를 논하면서 ‘청탁(淸濁)’을 구분한다.

그(작자)는 가장 정결한 것도 사실은 더러운 곳 속에서 나온 것임을 잊지 말라고 한다. 또한 작품 전체를 완성했거나 완전히 보존되어 전해졌다면 우리는 가장 정결한 것도 결국에는 가장 더러운 곳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정고본(程高本)의 뒤쪽 40회는 위잉스가 말하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 실마리를 절대 구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는 아마 가장 중요한 점일 텐데, 그가 뒤쪽 40회에 대한 신홍학 연구자들의 성과를 무척 중시했다는 것이다. 신홍학 연구자들은 《홍루몽》의 앞쪽 80회와 뒤쪽 40회가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고증했다. (이것은 외연적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위잉스는 이것이 《홍루몽》의 내재 구조를 분석하는 데에 극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새로운 ‘전범’의 연구 결과도 앞뒤 두 부분 사이에 중대한 내재적 모순이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는 “이 부분에서 ‘자서전설’의 작업은 그다지 깊이 들어가지 못해서 새로운 ‘전범’이 힘을 발휘할 여지가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고 하면서 ‘고증파의 자서전설’은 “완전이 원료로 창작을 대체”한다고 비판했지만, 그 학파 학자들이 뒤쪽 40회에 대해 연구한 결과는 존중했다.

호응론과 유기설의 관점에서 《홍루몽》을 연구하면 앞쪽 80회에 들어 있는 수많은 실마리들을 뒤쪽 40회에 관통시킬 방법이 없다. 이 때문에 위핑보와 위잉스의 저작에서는 앞쪽 80회와 뒤쪽 40회의 지위가 동등하지 못하고 후자의 텍스트 지위가 전자에 비해 훨씬 떨어진다. 이런 경향은 사실 위핑보와 저우루창의 연구 경향과도 일맥상통한다. 앞쪽 80회를 중시하는 가장 구체적인 예는 위핑보와 왕시스(王惜時)가 교정(校訂)한 《홍루몽 80회 교본(校本)》인데, 여기서 뒤쪽 40회는 부록으로 전락해 있다. 저우루창은 정고본 뒤쪽 40회에 대해 더욱 깊은 혐오감을 드러낸다. 나중에 뒤쪽 40회에 대한 평가는 또 조설근이 쓴 80회 이후의 원고 잃어버린 부분을 찾는[探佚] 작업과 관련되게 된다.

위핑보와 위잉스의 결론을 받아들여 ‘텍스트’(게다가 주로 앞쪽 80회)를 연구 범위로 삼고 작자의 ‘창작 의도’를 연구 목표로 삼는다면, 우리는 결코 텍스트의 선택을 완성할 수 없다. 사실 우리가 직면한 것은 아주 많은 필사본들이며, 또한 앞쪽 80회가 원작자의 ‘전체적 구상과 전반적인 배치’(위잉스의 표현대로)를 이미 구현했는지 여부는 여전히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사실상 위잉스가 가장 중시한 앞쪽 80회는 현존하는 필사본에서도 아주 많은 부분의 문장이 빠져 있어서 불완전한 상태이다. 파커(Hershel Parker)는 《불완전한 텍스트와 어구(語句)의 상(象)》에서 이렇게 일깨웠다.

그러나 여러 경우에 ‘텍스트 자체’는 그 안에 담긴 작자의 의도를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텍스트를 포함하지 않고 있다.

80회가 다 갖추어진 판본에 대해서도 논자들은 또 작자의 원고가 아니어서 완전히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척서본[戚序本]의 경우처럼.)

다음으로 현존하는 각종 필사본들을 검토해 보면 앞쪽 80회에 아주 많은 이문(異文)들이 들어 있으며, 그 가운데는 앞뒤가 연결되지 않거나 어울리지 않는 부분도 적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위핑보는 두 가지 예를 든 적이 있다. 첫째, 경진본과 기묘본에 따르면 왕희봉에게는 가대저(賈大姐)와 가교저(賈巧姐) 두 명의 딸이 있었다(제27회 및 제29회). 하지만 제41회에서는 또 가대저의 이름이 유 노파[劉姥姥]에 의해 가교저로 바뀌게 된다고 서술하고 있다. 유정본(有正本, 유정본의 저본은 척장본[戚張本]이어서 위핑보는 아예 이것을 ‘척본[戚本]’이라고 불렀음)에서는 제27회와 제29회에서 가교저를 삭제해 버렸는데, 그렇게 고치고 나자 문맥이 통하지 않는 병폐가 생겼다. 둘째, 가보옥의 나이는 가원춘(賈元春)에 비해 몇 살이 적으가? 제2회의 설명과 제18회의 사실 사이에는 충돌이 있다. 어떤 판본에서는 이 부분을 고쳤지만 그러다 보니 다른 부분과 모순이 생기게 되었다. 그렇다면 ‘호응’이나 ‘관통’, ‘유기성’을 얘기할 때는 어떤 판본을 선택해야 하는가?

오늘날 필사본에 대한 연구는 이미 현존하는 앞쪽 80회 필사본 가운데 작자의 원래 원고를 그대로 보전한 것은 하나도 없음을 증명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앞쪽 80회를 주요 연구 대상으로 채택하려면 여전히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비교적 원본에 가깝고 작자의 창작 의도를 구현한 것은 어느 판본인가? 앞쪽 80회의 텍스트 상황을 분명히 정리하지 않으면 작자의 의도를 찾아 낼 방법이 없다. 탠설이 《텍스트 비평과 학술적 편집》에서 지적했듯이, 작자의 본래 의도를 중시하는 평론가들은 종종 텍스트가 이미 작자의 의도를 구현하고 있다고 가정하면서 텍스트 자체의 권위(the authority of the text itself)를 소홀히 취급한다. 잘못된 텍스트(corrupted text)를 바탕으로 한 논의도 당연히 하나하나 사리에 맞을 수는 있지만, 이런 기초 위에서 ‘작자의 의도’를 얘기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 때문에 우리가 중시하는 것이 작자의 의미(authorial meaning)이든 텍스트의 의미(textual meaning)이든 간에 앞쪽 80회의 텍스트에 차이가 있는 현상에 대해 깔끔하게 정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