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둬鄭振鐸-아비도스와 이집트 제1왕조의 무덤阿比多斯及埃及第一朝的陵墓

아비도스와 이집트 제1왕조의 무덤

아비도스(Abydos)는 이집트의 성스러운 도시였다. 이집트인들은 누구나 생전에 한 번은 그곳에 가보기를 바랐고 죽은 뒤에라도 꼭 가고 싶어 했다. 만약 여건이 허락지 않으면 죽은 뒤 비석이라도 그 성지에 세우려 했으며 비석 살 돈이 없는 사람은 깨진 사기 조각이라도 그곳에 던져 놓으려 했다. 사실 아비도스에는 오시리스(Osiris)의 무덤이 있었다. 오시리스는 사자(死者)의 신이어서 그의 무덤 근처에 묻히면 복을 얻는다는 믿음이 있었다. 만약 그런 행운을 얻지 못하면 그 신의 돌계단 위에 비석을 세우거나 최소한 사기 조각을 성지에 보내도 그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이집트 역사의 가장 초기에 부귀한 사람들은 모두 아비도스에 묏자리를 얻으려 했다. 혹시 국왕의 묘에 함께 묻혀야 해도 꼭 그 성지에 비석을 세우려 했다. 중왕국(Middle Kingdom) 시대에도 이 풍속은 변하지 않아서 누구나 아비도스에 비석을 세우길 원했다. 이 비석들은 현재 여러 박물관에 많은 수량이 보관되어 있다. 그러나 평민들은 성지에 그릇 조각을 보낼 형편밖에 안 돼서 오랜 세월을 거치며 아비도스는 황량한 사기 더미로 변했다. 각기 다른 시기의 각종 사기 조각이 모두 존재한다.

이집트 역사에서 아비도스는 그리 중요한 곳이 아니었지만 종교와 문화 영역에서는 중요한 유적으로 공인받아 왔다. 그래서 많은 이집트학자들이 일찍부터 그 성지를 발굴하면 고대 이집트의 종교와 문화와 관련해 큰 수확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아비도스의 발굴 작업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이집트 발굴의 위대한 선구자 오귀스트 마리에트(Auguste Mariette)가 단행했다. 1859년, 그는 세티(Sety) 1세의 왕묘(정교한 부조가 많았다) 발굴을 마무리했고 람세스(Ramses) 2세의 왕묘도 발굴하면서 위대한 오시리스의 신전에서도 일부 작업을 진행했지만 그리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코마스 술탄(Komas Sultan)이라는 구릉을 언급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오시리스의 무덤은 여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게 분명하다. 아마도 언젠가 지금은 알려지지 않은 성스러운 묘의 입구가 발견될 것이다.“

그의 예언은 여러 해 뒤에 실현되었다. 1911년부터 1914년에 네빌(Naville)이 플린더즈 페트리(Flinders Petrie) 교수와 머레이(Murray) 여사의 작업을 이어받아 45피트 길이의 경사로 바닥에서 길이 1백 피트, 너비 60피트의 거대한 방을 발견했다. 2열의 방주(方柱)에 의해 세 부분으로 나뉜 그곳은 좀 더 작은 방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곳의 조각과 고대 기록에 근거해 네빌은 그곳이 유명한 오시리스의 무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발견한 것은 실제로 오시리스 신전의 가장 신성한 곳이었다.

오시리스의 성지 외에 아비도스에서 주목할 만한 건축물은 세티 1세의 왕묘와 그곳의 놀랄 만한 부조였다. 벽 위에 새겨진 그 부조는 흥미로운 점이 많았다. 고왕국(Old Kongdom) 시대의 거대 부조처럼 힘차고 신선하지는 않았지만 국왕의 형상과 오시리스가 옥좌에 앉은 존엄한 태도는 찬양받을 만했다. 또한 세티 왕묘 부근에는 그의 아들 람세스의 묘에서 나온 유물이 적잖이 흩어져 있었다. 과거에는 웅대했을 게 분명한 건축물이 지금은 곳곳이 허물어진 상태였다. 어떤 부조는 예전 국왕 시대의 것과 맞먹었지만 어떤 것은 볼품이 없었다.

아비도스의 건축물은 웅대하고 흥미로웠지만 이제 그 중요성은 거기에 있지 않고 이미 잊힌 제1왕조와 제2왕조 왕묘들의 발견에 있었다. 그 왕묘들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숭배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래서 더 신비의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것들의 수장품이 발견되면서 전설인 줄만 알았던 이집트 시대가 밖으로 드러났고 그 오래된 문화도 억측의 소산이 아님이 확실해졌다. 다시 말해 나일강 유역 문화의 오랜 역사와 빛나는 전통이 실제로 확인된 것이다.

이제 그 발굴의 경과를 잠시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본래 아비도스의 왕묘들은 아름답지도 거대하지도 않아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부족했다. 아비도스에 간 사람들의 눈길을 끈 것도 성지와 그 근처의 후기 왕묘들뿐이었다. 1890년 전까지 사람들은 피라미드를 짓기 이전의 이집트 왕들에 대해서는 고작 이름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실질적인 이집트 역사는 제4왕조의 피라미드 건설자들에서 시작되었고 그 위의 제3왕조는 모두 불확실하다고 간주되었다. 그런데 1890년 이후의 30여 년 간 그 개념은 완전히 바뀌었다. 사람들은 제4왕조 이전 세 왕조의 왕들이 결코 상상 속 인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대군을 거느리고 모래알 같던 남북의 여러 소국을 통일했고 그들의 국가는 이미 발달된 예술과 문화를 자랑했다. 그 발굴의 주요 지역은 아비도스에 있었지만 바카다(Vaqada), 엘 암라(El-Amrah), 베가 에드 데르(Vega-ed-Der) 등지와도 연관되었다.

1895년, 에밀 아멜리노(Émile Amélineau)가 아비도스에서 발굴 작업을 개시했고 1899년 이후에는 페트리 교수가, 그리고 네빌, 홀(Hall), 피트(Peet) 등이 또 1914년까지 그 뒤를 이었다.

제1왕조부터 제3왕조까지의 왕묘들은 오시리스 신전 남쪽에 유적이 있어서 산들과 거리가 더 가까웠다. 왕묘들은 모두 산자락에 있어서 평지보다 다소 높았으며 매우 황량하고 고즈넉했다. 1895년부터 1896년까지 아멜리노는 일군의 고묘들을 발견했는데 시신이 잠든 듯 모로 누운 채 무릎을 앞가슴까지 구부리고 있었다. 그 고묘들에서 원시적인 형태의 도기와 돌병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리고 1896년부터 1897년 사이에 아멜리노는 또 대형 묘를 발견했고 그 안에서는 금속 물건 등이 나왔다. 그는 이 묘가 그전에 발견한 것보다 더 오래되었다고 믿었다. 그의 가장 중요한 발견은 3번째 작업에서 발굴된 어느 국왕의 묘였다. 아멜리노는 그 국왕의 이름을 켄트(Khent)라고 읽었고 그가 바로 오시리스 켄티 아멘티(Osiris-Khenti-Amenti)로서 과거에 현세에서 이집트인들을 실제로 통치한 인물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즉시 자기가 이미 ‘오시리스의 무덤’을 발견했다고 표명했다. 이어 1898년, 그는 해골 한 구를 찾았는데 그 두개골은 당연히 그 죽음의 신의 것이라 생각했고 얼마 후 발견된 청석 침상에는 ‘오시리스의 침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의 발견은 여러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나중에 학자들의 단정을 거쳐 그것은 신의 무덤이 아니라 제1왕조나 제2왕조의 어느 국왕의 묘임이 밝혀졌다. 이집트의 신왕국 사람들도 아멜리노처럼 그것이 진짜 신의 묘라고 오해를 했었다. 아멜리노는 결국 실망해서 발굴 작업을 중지했다. 사실 그의 작업은 체계적이지 못해서 훼손된 유물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1899년, 페트리 교수가 그의 뒤를 이어 발굴을 재개했으며 비교적 성과도 얻고 작업도 더 체계적이었다. 왕묘들은 보통 지하실이었고 30피트에서 50피트 높이에 면적도 상당했다. 묘실은 벽돌로 지어져 있었다. 제1왕조 덴(Den)왕의 묘는 실내 바닥이 단단한 청석이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아는 한도 내에서 고대 이집트 건축가가 그 재료를 사용한 최초의 예였다. 그리고 제2왕조 카세켐위(Khasekhemui)왕의 거대한 묘는 중실(中室)이 석회석으로 지어졌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알려진, 인류 역사상 최초의 토목 공정이었다. 중실 안은 의심의 여지 없이 죽은 국왕의 유해가 안치된 장소였으며 그가 사용했던 그릇, 장식품, 물병 등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것들 중에는 단단한 돌로 만든 것도 있었고 금속으로 만든 것도 있었다. 그 이른 시기에 이집트 장인들은 이미 놀랄 만한 기술을 발휘했다. 중실 사방은 모두 작은 방이었고 음식이나 술이 담긴 큰 병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집트인들은 나일강의 진흙과 지푸라기를 섞어 병 입구를 막고 왕의 이름이나 술을 만든 포도농장의 이름을 찍어 죽은 왕이 지하에서 먹고 마실 수 있도록 예비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뚜껑에 찍은 국왕의 이름이 6천 년 뒤 이집트학자들의 역사 자료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 찍은 자국들은 이집트 사료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다.

한편 그 시대에 이집트 문명은 이 정도로 발전하긴 했지만 아직 야만적인 풍속이 남아 있어서 국왕이 생전에 사랑한 후궁들을 죽여 순장을 했다. 중왕국 시대에 가서야 진흙 인형으로 산 사람을 대체했다. 그런데 그 오래된 왕묘들은 도굴꾼들에게 이미 파괴되어 주인들의 유해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학자들은 그들의 진면목을 영영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제르(Zer)왕의 묘(오시리스의 무덤이라 여겨졌던)에서 순장된 후궁의 팔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바짝 마른 뼈에 아름다운 팔찌가 4점 걸려 있었다.

제3왕조의 왕들까지는 제4왕조 이후의 왕들처럼 자신들의 묘를 거대하게 지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직 자신들의 묘를 바위산처럼 조성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가 제3왕조 중엽에 그런 생각이 점점 뚜렷해졌고 제4왕조에 와서 마침내 왕묘가 어마어마한 피라미드가 되었다.

아비도스의 옛 왕묘들은 놀랄 만한 대발견은 아니었지만 기원전 4천 년 이상의 이집트 옛 왕들이 실제로 존재했음을 입증했다. 그 시대는 결코 문화가 없지 않았다. 그들의 문화는 이미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아멜리노의 발굴 작업은 바로 이것을 밝힌 데에 진실한 가치가 있다.

《近百年古城古墓發掘史》 1928년

阿比多斯及埃及第一朝的陵墓

  阿比多斯(Abydos)是埃及的圣城,每个埃及人都想能在生前去朝见一次,或至少在死后也希望能够一至的,或环境不能允许,则至少死后也要立一块石在这个圣地。穷人不能立碑,则至少要抛一块碎瓶片在这圣地。原来在阿比多斯有奥赛烈司(Osiris)的墓;奥赛烈司是地府的大神,人如能葬在他墓边则可得福;如果没有福气葬在附近,则建立一块石在这个大神的石阶上,或至少送一片陶器至圣地,也可得他的恩惠。

  所以在埃及史的最早期,富贵的人都要在阿比多斯得一坟地。如果贵人必须伴国王的墓而葬,则他也要建一个石碑在这个圣地上的。在中世(MiddleKingdom)风俗还是如此,要人都要在阿比多斯建立一个石碑。这些石碑如今在各博物院中,可以找到不少。但平民们却止能有送一片陶器至圣地之力,所以经过许多时代,阿比多斯竟成荒芜不堪的瓦砾堆,各期各种的陶器都有。

  在埃及史上,阿比多斯虽不重要,在宗教和文化上,阿比多斯却公认为一个重要的古址。所以许多埃及学者,早就计算到发掘这个圣地,以期对于古埃及的宗教与文化有丰富的收获。

  圣城的发掘工作,和别的地方一样,乃由于伟大的发掘埃及的先驱者马烈特(AugusteMariette)的工作。一八五九年,他清理锡提第一世(SetyI)的庙宇(以精美的浮雕著多),他还发掘拉美斯(Ramses)第二世的庙宇,在伟大的奥赛烈司庙内,也进行着一部分工作,却没有得到多大的成绩。然而马烈特却说到一个荒丘,名为科阿萨尔坦(KomasSultan)的,道:“无疑的奥赛烈司的墓,必在此不远。大约什么时候,总可以发见今所未知的至圣墓的进口。”他的话到许多年后,方才实现。在一九一年至一九四年,那维尔(Naville)继续皮特里(FlindersPetrie)教授和墨累(Murray)女士的工作,在四十五呎的斜道之底,发见一间大室,一百呎长,六十呎阔,以两行的方柱,分为三部分,由此室更至一较小之室,由它的雕刻上以及根据古代的记载,那维尔知道此即为著名的奥赛烈司的墓。那维尔所发见的实为奥赛烈司庙的最神圣的地方。

  除了对于奥赛烈司圣地的注意之外,阿比多斯存在的建筑,乃为锡提第一世的庙宇和它的可惊诧的浮雕。墙上的浮雕有许多是最有趣味的;他们没有“古代”(OldKingdom)的大浮雕的有力与新鲜,然而国王的形象和奥赛烈司坐在神座上的尊严态度,是极可赞美的。在锡提庙的左近,散布着不少他的儿子拉美斯庙的遗物。从前一定是一所很弘伟的建筑,如今却随地倾圮了。有的浮雕,可以比得上前王时代的,有的却粗率。

  阿比多斯的建筑,虽弘丽而有趣,然到现在,他的重要却不在此,而在已被忘记的第一朝和第二朝诸王的墓的发见;这些墓经过许多年代,成为崇拜的目的,因此,更为隐晦而无人知道。然而到了今日,他们的宝藏却被发现,使我们向来以为传说中的非真实的埃及时代,一旦呈露出来;其文化之古远,非从前的悬想所可推测;即在此古远的文化上,已足见出其光华灿烂之概况,使我们实见尼罗河流域的文化是如何的古远而光明。如今且略述发掘的经过。在阿比多斯的诸王墓,既不美好,又不弘伟,不足引人注意;而到阿比多斯的人所注意的,仅为圣地及在其旁的后期诸庙而已。在一八九○年之前,我们对于建筑金字塔者的以前的埃及王,仅知其名而已;实际上的埃及史,乃开始于第四代的建筑金字塔者;其上的三代,皆视为若有若无。一八九○年后三十余年来,这个观念,却完全变更了;我们知道第四朝前之三朝的诸王,并不是想像的,幻梦的,乃是实有其人的;他们领率大兵,统一散沙似的南北诸小国;他们的国家,艺术文化都已是很发达的了。这个发掘的主地在阿比多斯,但也关连着发卡达(Vaqada),厄尔阿谟拉(El-Amrah)和发加厄得(Vega-ed-Der)诸地。

  一八九五年,阿麦力诺(Amé1ineau)开始在阿比多斯工作着,皮特里教授在一八九九年以后继之而从事于发掘,又有那维尔,荷尔(Hall)和皮特(Peet)诸人继其后,直至一九一四年为止。

  第一朝至第三朝的诸王墓,故址在奥赛烈司古庙之南,较古庙更近于诸山。诸墓皆在山边,比平地微高,极为荒凉寂静。一八九五年至一八九六年阿麦力诺发见一群古墓,尸身睡眠式的侧躺着,膝头弯至胸前。在这些古墓中,发见原始的石瓶陶器等等。一八九六年至一八九七年,阿麦力诺又发见一所大墓,内有金属物等等,他相信这墓比第一次所发见的更古。他的最重要的发见,乃是第三次工作时掘出的一个国王墓;这个国王,他读其名为垦特(Khent)。阿麦力诺觉得这个国王一定是奥赛烈司垦替阿门替(Osiris-Khenti-Amenti),他一定是曾真实的在世上统治过埃及人的,因此,他便声言:他已经发见了“奥赛烈司墓”了。一八九八年,他找到了一个骷髅,这个头颅当然是那个死神的;不久,又发见一个青石的床,他便名之为“奥赛烈司的床”。他的发见,引起世人纷纷反对的议论;后来,经学者断定,知此非神的墓,乃是第一朝或第二朝的一个国王的墓;新帝国的埃及人,也和我们的发掘者一样,误以他为神的真墓了。阿麦力诺很失望的放弃他的工作,其实他的工作颇无秩序,大约被毁失的古物必不少。一八九九年,皮里特教授继他而复从事发掘。所得的较有成绩,工作更有系统。他们的墓往往是一个地下室,三十呎至五十呎高,阔亦相当。墓室以砖砌成。第一朝的登(Den)王墓,室内之地板为坚硬的青石,这是我们所知的埃及建筑家使用这种材料的最早者。第二朝的卡塞痕缪(Khasekhemui)的大墓,其中室全是石灰石的(石块)所建,这是人类史上所知的第一次土木工程。在中室之内,无疑的是已死国王的安身之所,室内堆了许多他所用的器具、饰品、钵、瓶,或为金属造的,或为坚石造的;在这早期,埃及工人已显出很可惊的技巧。中室四周都是小室,储藏着许多大瓶,中存食物或酒,用尼罗河的泥土和稻草混合来封闭瓶口,盖上王名,或酒的来处的葡萄园名,以备已死国王的地下之需。国王的臣属万想不到他们将国王之名印在瓶口上,乃竟留作六千年后埃及学者研究他们的历史的材料!这些印记在埃及史料上是很重要的资料。在这时代,埃及文明虽已进步至此,却仍不脱野蛮的风俗,将国王生前所喜爱的后宫杀来殉葬。到了“中世”之后,才用泥人来代替生人。但这些古王墓中,为劫墓贼所摧残,竟不能有主人翁的真实尸体存在着;所以我们在这些墓中,永不能见如见后来诸王的真面目。然而在则(Zer)王墓(即奥赛烈司墓)中,却发见了一只殉葬宫人的手臂,干骨上尚带着四个美丽的臂镯。

  第三朝以上的诸王,并没有如第四代以后诸王的欲将他们的墓建筑得高大弘伟。他们心中尚没有将他们的墓成为一座石山的观念。然而后来,在第三朝之中,这种思想便渐渐的现出曙光。第四代后,遂将王墓形成了世界巨观的金字塔。

  在这些古王之墓,虽没有动人惊诧的大发见,然而最大的发见则为:埃及古王,在纪元前四千年以上的,并不是虚无的,那时代也并不是没有文化的,他们的文化已经是很高的了。这便是阿麦力诺发掘的真实价值的所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