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중국어 번역 요령 24가지 2

9. 대화는 배우가 된 느낌으로 캐릭터와 상황에 몰입해 번역한다.

소설 번역의 재미나면서도 어려운 점은 등장인물마다 성격에 맞는 어조를 설정하고 유지해주는 것이다. 대화가 많은 청소년 소설이나 웹소설을 만나면 이 문제는 더 번역가를 괴롭힌다. 주고받는 대화를 번역할 때마다 마치 자신이 연극배우가 된 것처럼 번역한 글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상황 문맥에 맞는지, 너무 문어적이지는 않은지 반복적으로 점검한다.

下午放学,贾里撇掉鲁智胜独自去药店转了一圈,然后奔回家候在那儿,妹妹贾梅一推开门,他就迎着门大喊:”快!一寸光陰一寸金。”妹妹睁大眼,反而笑了:”干什么?你傻掉了?“
방과 후 자리는 루즈성을 따돌리고 혼자 약국에 들른 뒤 집으로 달려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어 여동생 자메이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자리는 대뜸 고함을 질렀다.
“①빨리! 시간이 금이야.’
자메이는 눈을 크게 뜨고 오히려 웃으며 말했다.
“②뭐해? 너 바보야?”

역시 수강생이 숙제로 제출한 위 번역문에서 나는 ①과 ②가 의미는 맞지만 실제 대화 상황을 떠올리면 입에 잘 붙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①의 대안으로 ”서둘러, 시간은 금이라고!“를, ②의 대안으로는 ”왜 그래, 뭐 잘못 먹었어?“를 제시했다. 대화 번역은 상대적으로 외시 의미보다는 함축 의미가 훨씬 더 중요하므로 대화 상황에 맞게 함축 의미를 더 부각시키는 쪽으로 과감히 의역을 하도록 하자.

10. 긴 원문은 끊어 번역하되, 접속사는 아끼자.

표의문자적 특성으로 인해 중국어 텍스트는 한국어 텍스트보다 정보량이 많다. 따라서 번역을 하고 나면 글자 수가 거의 1.5~2배로 늘어난다. 그러니 중국어 한 문장을 어쩔 수 없이 한국어 두세 문장으로 끊어 번역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억지로 안 끊고 만연체로 만드는 것은 어리석은 선택이다. 우리 독자들의 독서 호흡은 갈수록 단문을 더 선호한다.

人们重新跳到地上,我记得有人不停地进去,好象过不多久全农场的人又都集合到我们宿舍门前。我记不清了是因为我马上进入谵妄状态,神志不清,但我敢肯 定还没有休克。
동료들이 다시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내 기억에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안으로 들어오고 얼마 후 전 농장의 사람들이 우리 숙소 앞에 모여든 것 같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건 내가 곧 착란 상태에 빠져 의식이 혼미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히 단정하건대 쇼크는 아니었다.

위의 예문에서 나는 중국어 두 문장을 네 문장으로 끊어 번역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접속사는 ‘하지만’ 1개밖에 쓰지 않았고 그것도 원문에 있는 ‘但’과 호응하는 것이므로 사실상 새로 만든 것은 아닌 셈이다.

중국어를 끊어 번역할 때 내가 가장 유의하는 것은, 늘어난 한국어 문장들을 의미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 배열하되, 가능한 한 중간에 새로 접속사를 만들어 넣지 않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접속사도 일종의 군더더기다. 효율적인 글일수록 접속사 없이 유려한 흐름을 유지한다.

11. 연속되는 용언구의 연결어미는 반복을 피한다.

3개 이상의 용언구가 한 문장을 이룰 때 각 용언구의 연결어미는 기본적으로 반복을 피해야 읽기가 자연스럽다. 수강생의 번역문을 예로 들어보자.

喀秋莎也很开心,除了吃到好吃的饺子之外,她把沙发丢给了我,自己睡进了女主人温暖的被窝。
카츄사도 신이 나 맛있는 만두를 먹어치우①고 내게 소파를 내주②고 자기는 여주인의 이불속에 들어가 잠을 잤다.

나는 ②의 ‘고’를 ‘고서’로 바꿔보라고 조언했다. 이처럼 긴 문장은 ‘~고’, ‘~며’, ‘~서’ 등의 연결어미를 적절히 번갈아가며 써야 입에 잘 붙는다.
하지만 작가가 의도적으로 같은 구조의 용언구를 반복할 때는 예외이다. 아래 예문에서처럼 작가의 의도를 존중해 동일한 연결어미를 쓰고 구와 구를 쉼표로 연결한다. 이때 공통적으로 시제 선어말 어미가 있으면 마지막 연결어미 앞에만 붙여도 무방하다.

我和美智子曾经单薄的相爱过,在寒夜的隧道,在冬日的午后,在她言说过的大阪秋天里,仿佛像一团哈气,一粒暖阳,一尾摇曳的上方舞折扇。
나와 미치코는 언젠가 희미한 사랑을 나누었다. 추운 밤 터널에서, 겨울날의 오후에, 그리고 그녀가 말해준 오사카의 가을에 그 사랑은 입김 같고, 따뜻한 태양 같고, 하늘거리는 카미가타마이 춤의 부채 같았다.

12. 원서가 평서문인데도 갑자기 독자를 호명하면 그냥 무시하라.

객관적인 어조의 대중 인문서를 번역하다 보면 평서문인데도 갑자기 저자가 ‘당신'(你), 즉 독자를 호명하여 의견을 묻거나 자기 말에 대한 동의를 구하는 식으로 분위기를 전환할 때가 있다. 아래 예문처럼 말이다.

当《中国时报》全文刊登被審判者的答辩时,台湾人大吃一惊。在国民党连篇累的宣传中,很多人真的以為他们不过是暴徒。但倘若你读到這些辩护词,会发现他们是一群为台湾命运思考及牺牲的人,他们把潜藏在人们心里的模糊感受,以如此清晰与直接的方式表达出来。
《중국시보》(中國時報)에 피고인들의 답변 전체가 게재되었을 때 타이완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국민당의 편파적인 선전으로 인해 사람들은 대부분 그들이 폭도인 줄 알았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그 변론의 글을 읽었다면 그들이 타이완의 운명을 걱정하고 자신을 희생한 이들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감춰져 있던 모호한 느낌을 그렇게 분명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표출했을 뿐이었다.

중국 저자들은 의외로 이런 식의 글쓰기 방식을 애용한다. 독자들에게 주의를 환기하고 공감을 끌어내려는 의도일 텐데 한국어 역자로서 나는 이런 부분에 부딪칠 때마다 매우 낯설고 성가시다. 엄밀한 논설문이나 설명문에 불쑥 강연문이 끼어드는 느낌이어서 도저히 글자 그대로 번역할 수가 없다. 그래서 원문과 다르게 계속 객관적인 어조를 유지한다. 예컨대 위의 밑줄 친 부분 같으면 “그런데 그들의 변론을 읽어보니 뜻밖에도 그들은 타이완의 운명을 걱정하고 자신을 희생한 이들이었던 것이다.”라고 옮길 것이다. 원문을 무시하는 셈이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 독자들에게는 이질적인 글쓰기 방식이기 때문이다.

사실 중국에는 아예 강연체로 쓰여진 책도 많다. 『이중톈 중국사』가 그 대표적인 예인데 저자가 마치 청중을 앞에 두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계속 독자에게 말을 건다. 이런 특수성을 존중해 나는 맨 처음 출판사와 의논하여 역시 강연체로 번역을 했고 어조도 당연히 존댓말을 택했다. 하지만 한 권을 다 번역한 뒤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는데 바로 “한 권 내내 존댓말이 계속되니 느낌이 부담스럽습니다.”라는 회신이 왔다. 결국 출판사 측에서 다시 일일이 말투를 바꿔야만 했다.

13. 정치·사회 용어는 우리 입장에서 번역한다.

아래 예문은 중국의 독립 언론인 쉬즈위안(許知遠)의 저서 『저항자』의 한 대목이다.

我在绿岛监狱中参观时,碰到了大陆游客,這些台湾政治犯的遭遇会给他们带来怎样的触动?
뤼다오(綠島)의 감옥을 참관할 때 나는 우연히 중국에서 온 여행객들과 마주쳤다. 타이완 정치범들의 그 유적을 보고 그들은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원문의 단어인 ‘대륙’을 나는 ‘중국’이라고 번역했다. 왜 그랬을까? 쉬즈위안은 중국인이고 또 중국은 타이완을 독립 국가가 아닌, 중국의 일부라고 간주하고 있다. 그래서 같은 텍스트에서 대륙과 타이완은 나란히 등장할 수 있지만 중국과 타이완은 그럴 수 없다. 후자는 곧 중국과 타이완이 동등한 두 국가임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한국인이며 보통 한국인의 머릿속에서 중국과 타이완은 ‘동등한 두 국가’이다. 그래서 ‘대륙’을 ‘중국’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사실 중국 정치·사회 분야 도서를 번역할 때 역자는 수도 없이 이와 유사한 문제와 부딪친다.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은 한국전쟁이라고 번역해야 하고 ‘조선’은 북한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중국 저자가 중국인의 입장에서 고르고 쓴 용어를 우리의 입장에서 우리 식으로 변경한다. 그러면 단지 용어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책의 서문, 나아가 한 챕터가 통째로 중국 공산당의 일방적인 입장에서 편파적으로 써졌고 그것이 우리 독자의 눈에 띄었을 때 불쾌감을 일으킬 게 분명하다면? 아직 그런 책을 만나보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나 같으면 내 선에서 순화(?)시켜보려 노력하다가, 정 안 되면 출판사와 논의해 적절한 대처 방안을 찾을 것이다.

14. 역주를 달지 말지는 독자의 지적 수준을 감안해 결정한다.

어느 학자에게 학술서 번역을 의뢰한 적이 있었다. 중국 고대의 철학, 문학, 음악, 미술, 건축 등 학문과 예술 제 분야의 특징을 총망라해 소개한, 대단히 난이도 높은 도서였다. 그런데 그 학자는 원고를 읽어보더니 대뜸 내게 말했다.

”번역하면 원고지 4천 5백 매 정도 될 것 같은데요.“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제 계산으로는 3천 매 정도밖에 안 될 것 같은데요.“
”아, 본문 번역은 3천 매이지만 역주를 1500매 정도 달아야 할 듯합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선생님, 이 책은 대중서가 아닙니다. 타깃 독자가 학자와 대학원생이에요. 그러니 역주를 다셔도 본문의 10% 이하 분량으로 맞춰 주십시오.”

역주는 대상 독자의 지적 수준을 감안해 달아야 한다. 학자들의 참고용으로 출판할 학술서에 일반 독자를 고려해 역주를 단다면 그 양이 얼마나 많아질 것인가. 게다가 역주의 양이 본문의 절반에 달한다면 아무리 그 역주가 자세하고 친절해도 일반 독자는 질려서 그 책에 손도 대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리고 소설은 아주 불가피한 경우, 즉 특정 정보를 모르면 아예 읽기가 곤란한 경우가 아니면 가능한 한 역주를 안 다는 게 좋다. 어쨌든 역주가 중간에 끼어들면 원활한 독서에 지장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번역가가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어떤 책을 번역하기 전에 그 자신이 그 책의 맥락과 배경에 관해 독자와 동등하거나 더 높은 수준의 이해도를 갖고 있지 않으면 사실 어디에 역주를 달아야 할지도 파악하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1960년대 타이완 국민당의 공포정치에 관한 원문을 한 20대 수강생이 아래와 같이 번역하고 괄호 안에 역주를 삽입한 적이 있었다.

“스밍더(施明德)는 사회적으로 만연한 공포와 국민당 정권의 끝날 줄 모르는 ‘반공대륙’(反攻大陸. 타이완의 대륙 수복 구호를 말함)’의 선전 속에서 소년기를 맞았다.”

위의 역주가 적절한지 아닌지에 대해 나도 고민이 컸다. 국공내전의 결과로 타이완으로 도망친 국민당 정권은 오랜 계엄 정치 내내 다시 중국 대륙을 공격해 되찾겠다는 불가능한 정치 캠페인을 벌였다. 만약 위 번역문의 독자가 타이완과 중국의 역사적 관계를 알고 있다면 굳이 저 역주를 넣을 필요 없이 ‘반공대륙’을 ‘대륙 수복’이라고만 바꿔줘도 될 것이다. 최종적으로 나는 그렇게 고치기를 권했다. 왜냐하면 저 번역문을 포함하는 번역서는 중화권의 여러 민주화 운동가를 소개하는 인문서로서 주요 타깃 독자가 40대 이상의 교양인이기 때문이었다. 그 젊은 수강생은 유감스럽게도 독자를 너무 얕보았다. 만약 내가 독자로서 저 역주를 보았다면 무시당한 것 같아 무척 불쾌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