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한시-유장경劉長卿 눈을 만나 부용산의 어느 집에 묵으며 逢雪宿芙蓉山主人

눈을 만나 부용산의 어느 집에 묵으며 逢雪宿芙蓉山主人/당唐 유장경劉長卿

日暮蒼山遠 날 저물어 검푸른 산은 더욱 멀고
天寒白屋貧 날씨 추워 초가집은 더 썰렁하네
柴門聞犬吠 사립문에서 개 짓는 소리 들리니
風雪夜歸人 눈보라 속 밤에 누군가 돌아오네

이 시는 유장경(劉長卿, 약726~약790)이 대략 775년 50세에 의흥(義興)에 있을 때 지은 시로 추정되고 있다.(儲仲君, 劉長卿詩編年箋注, 中華書局, 1996) 유장경은 성품이 맑고 강직하여 세속적인 것을 멸시하였는데, 5언 시를 특별히 잘 써서 당시 권덕여(權德輿)란 문인이 ‘오언장성(五言長城)’이라 평한 바 있다. 이 시는 유장경의 그런 성품과 함께 정련을 가한 솜씨가 발휘된 시이므로 깊이 음미할 만하다. 제목에서 주인(主人)이라 한 것은 중국에서는 어느 집에 묵는 것을 ‘주인을 정한다.’는 오래된 관습이 반영된 말이다. 우리도 ‘주인장’, ‘쥔네’ 이런 말을 쓰지 않는가?

시에 쓰인 말은 어렵지 않지만 함축이 깊어 여러 해석을 낳은 시이다. 시가 마치 그림 4장을 이어 놓은 것 같다. 앞 두 구는 시인이 투숙하기 전의 상황이고 뒤의 두 구는 투숙한 이후의 상황이다. 날이 저물어가니 산도 어두워가고 길은 더욱 멀게만 느껴진다. 부득이 눈에 보이는 어느 산간의 초가에 투숙하였더니 집은 너무도 가난해 아무것도 없는데 날이 추우니 더욱 썰렁하게만 느껴진다. 밤도 깊고 시인은 잠이 들었다. 돌연, 한밤중에 사립문에서 개가 짓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집의 누군가 이제야 이 눈보라 속에서 귀가하는 것인가?

이런 해석과 달리 마지막 구의 주체를 시인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시인이 날이 저물어 밤이 되어서 이 가난해 집에 투숙하려고 눈보라 속에 찾아오니 사립문의 개가 낯선 사람을 보고 컹컹 짓는다는 것이다. 앞의 해석으로 보면 개가 주인집 사람을 보고 반가워 짓는 것이지만 이 해석으로는 개가 낯선 사람을 경계하여 짓는 것이다. 이 해석은 제목에서 눈을 만났다는 말과는 어울리지만 밤에 개 짓는 소리를 듣는다는 말과는 어긋난다.

두 번째 구에서 이 집이 가난하다는 서술을 하였는데 이런 서술을 하려면 이 집안으로 들어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첫 구에서 날이 저물어 묵어 갈 곳을 찾아야 하는 상황인데 밤이 깊도록 밖에서 헤맸다는 것도 사리에는 닿지 않는다. 그리고 손님이 이 집을 찾아 왔는데 ‘귀(歸)’ 자를 쓴 것도 문리가 어색하다.

앞 두 구에서 눈을 만났다는 말을 명시적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시의 행간에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여 시인의 마음이 급해진 것을 상상할 수 있으니 제목과 어긋나지 않는다. 그리고 뒤의 두 구는 앞 두 구의 말을 이어 받고 있다. 저녁을 밤이, 백옥을 사립문이, 날씨가 차갑다는 말을 풍설이 각각 받고 있다. 그리고 3구는 시간적인 도약이 일어나고 있고 앞에서는 본 것을 중심으로, 뒤에서는 들은 것을 중심으로 묘사한 것이라 시를 이해하면 전혀 어색한 곳이 없다.

이 시의 영향을 받은 중국과 우리나라 사람의 시를 보면 ‘풍설야귀인’의 주체를 시인이 아니라 그 집에 사는 사람으로 대체로 보고 있다. 송나라 진사도(陳師道)의 눈[雪]이라는 시에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다.

寒巷聞驚犬 차가운 골목에 개 짓는 소리 들리니
鄰家有夜歸 이웃집에 밤에 귀가하는 사람 있네

시인이 개 짓는 소리를 듣고 이웃집 사람이 이제 귀가한 줄 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함경도에서 의병 운동을 한 정문부(鄭文孚)의 시를 보면 더욱 분명하다. 시의 제목이 아예 <풍설야귀인>이다.

雪滿荒村過者稀 눈 쌓인 황촌이라 지나가는 이 드문데
如何一犬吠雲扉 무슨 일로 개는 구름 낀 사립에서 짖나
定知山後梅花發 알겠구나 산 뒤에 매화나무 꽃이 피어
溪友尋香冒夜歸 은자 벗이 매향 찾다 밤에 돌아가는 줄

계곡에 은거하며 산수를 즐기는 벗이 산 뒤의 매화를 감상하려고 찾아 왔다 돌아가는 것을 개 짓는 소리로 안다는 것이다. 이 두 시에서 문(聞)의 주체는 시인이고 야귀인(夜歸人)은 이웃집 사람이나 계곡에 은거하는 벗이다. 이렇게 후대인이 유장경의 이 시를 이해한 방식은 모두 시인이 밤에 자다가 귀가하는 주인 집 사람의 인기척을 들었다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부용산 기슭 어느 민가에 투숙한 시인이 밤의 정적을 깨고 들려오는 개짓는 소리와 눈보라 몰아치는 소리 등, 이 황량한 풍경을 특별히 시의 소재로 채택하여 지은 시임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겨울의 황량하고 쓸쓸한 풍경도 하나의 미학적 소재로 이미 감상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시이기도 하다.

明 沈周 <風雪夜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