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문장력 단련법

출판번역가 지망생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어떻게 한국어 문장력을 키울 수 있을까요?”이다. 무책임하게 “많이 읽고 많이 쓰는 수밖에요.”라고 답해도 되겠지만 그것이 확실한 방법이 아님을 알기에 늘 답답했다. 출판번역가는 뛰어난 글쟁이이고 그런 글쟁이가 되는 데는 왕도라는 게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더구나 출판번역가들은 대부분 번역을 시작하는 시점에 이미 뛰어난 글쟁이인 경우가 많기에 “지금부터 노력해도 훌륭한 문장력을 갖출 수 있습니다.”라고 선뜻 이야기해주기도 힘들다.

따라서 나는 이 꼭지에서 번역을 시작하기 전, 내가 어떤 방법으로 문장력을 단련했는지 대단히 사적인 방법을 밝히는 데 그칠 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의 효과는 확실히 보장할 수 있다. 단지 문장력을 키우는 데 그치지 않고 출판번역가가 의뢰받는 각종 도서의 다양한 장르 문법까지 체화할 수 있다. 다만 이 방법으로 얼마나 오래, 또 어느 정도의 강도로 노력해야 목표 수준에 이를 수 있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아무래도 개개인의 능력과 집중력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래는 월터 J 옹,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문예출판사, 2018)에 대한 내 ‘발제문’의 일부다.

서문
전자 시대는 ‘2차적인 구술성’, 즉 전화, 라디오, 텔레비전에 의해 형성되었으면서도 그 존립을 쓰기와 인쇄에 힘입고 있는 구술성의 시대이기도 하다.
1. 언어의 구술성
16쪽: 언어는 기본적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말하고 듣는 언어이며 음의 세계에 속해 있다. (…) 인간의 역사상 모든 언어 중에서 문학을 낳을 정도로 충분히 기술하는 일을 위탁받은 언어는 불과 106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 오늘날 실제로 말해지는 약 3천 가지의 언어 가운데 문학을 가지고 있는 언어는 단지 78가지이다.
17쪽: 컴퓨터 언어는 무의식적으로 생기지 않고 직접 의식으로부터 생긴다는 점에서 사람의 언어와는 전혀 이질적이다. 컴퓨터 언어는 미리 의식적으로 규칙(문법)을 정하고 나서 그것을 사용한다. 사람의 자연 언어의 경우, 문법 ‘규칙’은 우선 무의식중에 사용되고 그런 뒤에 실제로 사용하는 방식에서 추상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추상된 규칙은 명시적으로는 말할 수 있을지라도 결코 완벽하게 말할 수는 없는 난점을 포함한다.

나는 이 책을 266쪽까지 이런 식으로 발제했다. 주요 내용에 밑줄을 그으며 그대로 옮겨 적기도 하고 또 여러 문장을 한데 모아 재구성하기도 했다. 나는 모든 장르의 책을 이런 식으로 읽는다. 소설이든, 철학서든, 사회과학서든 독서와 발제를 병행하고 독서를 마치고 나면 매번 A4 5~10페이지 분량의 발제문이 생긴다.

나는 이런 ‘발제식 독서’를 학부 1학년 때부터 박사 수료 때까지 10여 년간 집중적으로 실천했다. 그 후로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때만큼 철저히 하지는 못한다. 당시에는 여러 독서 동아리에 가입해 일주일에 3~4회 이상 토론모임을 가졌으므로 발제가 의무였다. 매번 발제문을 작성해 사람 수대로 복사해가서 공개 발표를 해야 했다. 따라서 창피당하는 일이 없도록 더 자세하고 꼼꼼히 발제를 했다. 지금은 그런 의무감이 없으므로 책을 읽을 때 발제를 안 해도 되고, 하더라도 간단한 메모만 해도 상관없지만 한 번 생긴 습관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각 잡고 앉아 끙끙대며 책에 줄을 치고 옮겨 적지 않으면 당최 독서하는 기분이 안 든다.

발제식 독서를 생활화하면 문장력이 안 좋아질 리가 없다. 생각해보라. 책에는 보통 고도로 정제된 글이 담겨 있다. 그것은 전문 저, 역자가 써낸 원고를 훈련된 편집자가 서너 차례에 걸쳐 교열, 교정을 본 결과물이다. 그런 정확하고 군더더기 없는 글을 오랫동안 베껴 쓰고 재구성하다 보면 나중에는 거꾸로 책 안의 오류를 잡아내고 교정하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동시에 어떤 장르, 어떤 스타일의 글도 그럴듯하게 흉내 낼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출판번역가의 기본이 은연중에 확립되는 것이다.

하지만 발제식 독서는 쉽지 않다. 번거롭고 고단해서 독서 자체를 멀리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래서 발제식 독서를 하려면 꼭 독서 모임이 필요하다. 가능한 한 장르별 독서 모임 몇 군데에 등록해 발제와 토론에 활발히 참여하기를 권한다. 발제문 작성은 정밀하고 깊이 있는 토론을 가능하게 하기도 한다. 사실 출판번역가가 되기 위해, 출판번역에 필요한 문장력을 갖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이지만 나중에는 주객이 전도되는 순간을 경험하기도 할 것이다. 발제와 독서와 토론이 잘 어우러진 친구들과의 모임 만큼 행복하고 매력적인 만남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번역도 근본적으로는 인류의 그런 지적 만남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