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료학과 고고학의 결합 4

왜 《사고전서》라고 부르는가? ‘사고’는 당 현종(玄宗) 때 당시의 경․사․자․집, 네 부분의 모든 고서를 4개의 큰 서고에 나누어 보관했는데, 후인들이 그 방법과 명칭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사고전서》는 중국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모든 도서 전적을 수집하고 이미 간행된 것과 간행되지 않은 것들을 광범하게 수집한 것으로 아래의 몇 가지 종류를 포괄하고 있다.

첫째는 칙찬본(勅撰本)이고, 둘째는 내부본(内府本)으로, 모두 궁중의 장서다. 셋째는 《영락대전》 잔존본, 넷째는 각 성에서 수집한 책, 다섯째는 개인의 진헌본(进献本)으로 각 성의 장서가들이 증정한 양서이며, 여섯째로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책들이다.

그것은 비록 전국에 있는 고금의 도서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수집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황제․궁정․관가에서 큰 힘을 들여 수집한 것으로, 그 가운데에는 적지 않은 진본(珍本)과 비적(祕籍)이 있다. 이것은 중국 고전의 보전과 문화 및 학술 발전에 매우 큰 가치가 있다.

《전서》에는 모두 3,470 종의 책이 수집되었고, 각 종은 평균 10권으로 약 3만~4만 권이 된다. 이 책의 편찬은 앞에서 설명한 대작, 즉 명(明)의 《영락대전》과 청대 강희 제․옹정 제 때의 《고금도서집성》과는 매우 다르다. 앞의 두 책은 모두 원본을 자른 뒤 그 종류나 운에 따라 편을 나누었기 때문에 원본의 면모를 볼 수 없었다. 《사고전서》는 원본에 의거하여 분류하고 전체를 편집했으므로 원본 본래의 형태에는 변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진귀한 것인데, 이렇게 편찬한 책을 ‘총서(总书)’라고 한다. 이 책은 경․사․자․집 등, 4개의 ‘고(库)’로 나누었다.

《사고전서》는 전서가 정연하고 아름다운 외관을 갖고 있는데, 모두가 필사한 것으로서 단지 일곱 벌의 사본을 만들었을 뿐이다. 제1부(部)는 베이징 황궁 안의 ‘문연각(文渊阁)’에 소장되어 있고, 제2부는 베이징 원명원(圆明园)의 ‘문원각(文源阁)’에 보관되어 있다. 제3부는 러허 행궁(热河行宫)의 ‘문진각(文津阁)’에, 제4부는 선양(沈阳)에 있는 청 고궁의 ‘문소각(文溯阁)’에 소장되어 있다. 이상의 네 벌은 북방 지역에 있는 것이다.

그밖에도 중국 남부에 세 벌이 있다. 첫째는 양저우 행궁(扬州行宫)의 ‘문회각(文匯阁’에, 둘째는 전쟝 행궁(镇江行宫)의 ‘문종각(文宗阁)’에, 셋째는 항저우(杭州) 시후(西湖) 호반의 ‘문란각(文澜阁)’에 보관되어 있다. 그때 남방에 보존되어 있던 세 벌은 빌려 읽을 수 있었으나, 태평천국(太平天国)과 청 통치자와의 전쟁 중에 모두 훼멸되었고, 항저우의 ‘문란각’에 소장되어 있던 한 부 중 반만 남아 있을 뿐이다. 북방의 4부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을 공격하여 원명원을 불태울 때 ‘문원각’ 한 벌이 불에 탔다. 오늘날에는 그래도 세 벌이 완전히 보존되어 있다.

즉 하나는 청궁(淸宫) ‘문연각’에 보존되어 있던 것이고, 둘째는 러허 행궁의 ‘문진각’에 보존되어 있던 한 벌로서, 현재 베이징 도서관에 있다. 그리고 세 번째, 동부 선양 고궁의 ‘문소각’의 한 벌이다. 현재 항저우에 있던 반쪽은 보충을 통해 완전해졌으므로 중국 대륙에는 세 벌이 있는 셈이다.

구 선생은 《전서》가 매우 가치 있는 서적이라고 말했다. 여기에는 실전된 많은 책들이 남아 있다. 《영락대전》에서 수집된 책 가운데 일부는 《사고전서》에 그대로 보존된 것도 있다. 그러나 이 책에도 역시 결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개서(改书)를 했다는 점이다. 즉 이 책에서는 소수 민족을 비난한 말뿐만 아니라 봉건 도덕에 위배된 말도 바꾸었다. 예를 들면 송대의 여인들은 개가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기록을 《사고전서》에서 모두 바꾸어 놓았다. 개가는 명대에 이르러서야 여인들이 이부종사(二夫从事) 할 수 없었고, 수절한 여인에게 ‘정절방(贞节坊)’을 세워 주었다.

그밖에도 《전서》에는 구미에 맞지 않는 책들은 수록되지 않고 목록만 남아 있을 따름이며, 그 ‘목록’에서조차 좋지 않은 평을 했다.

또 청조는 책을 펴내면서 어떤 책은 수록을 금지했고 또 일부는 불태워 버리기도 했다. 금서에 수록된 목록만도 천여 종이나 된다. 청대에는 명대의 많은 책을 금했다. 그러므로 《사고전서》에는 장단점이 모두 있다.

지윈(纪昀, 纪晓岚)은 《전서(全书)》의 총 편찬관으로서, 모든 책에 제요(提要)를 지어, 해당 책의 저작자에 대해 설명하고 평가했다. 그는 평생 이 책만을 펴냈는데, 이것으로 말미암아 학술적 지위를 갖게 되었다.

지샤오란이 《사고전서》의 제요를 짓는 데만도 10여 년이 걸렸다. 이들 제요는 그 한 사람이 쓴 것은 아니다. 그는 또 《사고전서간명목록(四库全书简明目录)》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목록이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지만, 서평도 약간 포함되어 있다. 지샤오란의 이런 작업은 한(汉)의 류샹(劉向)이 편찬한 《칠략별록(七略别录)》을 본받은 것이다.

건륭 제는 또 《사고전서》 가운데 일부 서적을 《우잉뎬취진판총서(武英殿聚珍版丛书)》로 편찬하여 목판으로 인쇄했는데, 이 책은 일반 사람들이 사볼 수 있었다.

그 뒤 몇몇 사람이 남방에 소장되어 있던 《전서》 세 벌을 빌려 베낀 뒤, 거기에 다른 책을 덧붙여 많은 총서를 편찬했다. 또 지샤오란을 모방하여 자신이 편찬한 책마다 발(跋)을 쓰기도 했다. 건륭 제 이후에는 이전에 비하여 총서가 많아졌고 질 또한 좋아졌다.

민국 시기에는 《사고진본총서갑편(四库珍本丛书甲编)》이 편찬되었는데, 이것은 《사고전서》에만 보이고 다른 곳에는 없는 책을 수집하여 편찬한 것이다. 또 상무인서관(商务印书馆)에서 만든 《을편(乙编)》이 있었으나 항일 전쟁이 일어나면서 없어졌다.

군벌통치(军阀统治) 시기에 쉬스창(徐世昌)도 본래 《사고전서》를 인쇄하려 했으나, 당시 상무인서관에서는 전국에 이 책을 찍을 만큼 많은 종이가 없음을 알고 《진본(珍本)》만을 인쇄했던 것이다. 쉬스창 때에는 《석장(释藏)》 《도장(道藏)》을 인쇄했다. ‘장’이란 곧 경(经)이다. 이 2부의 경은 명대의 각본(刻本)이다.

우리가 고고학이나 고대사를 연구할 때는 반드시 중요한 고서를 고찰해 보아야 한다. 옛 황제들이 수집하고 편찬한 대량의 고대 전적을 연구하고 정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5) 고서 가운데의 지방지(地方志)

우리는 책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고서의 고찰은 고고학의 중요한 측면이다. 이 가운데 역대로 편찬된 지방지를 절대로 경시해서는 안 된다. 고서 가운데에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지방지가 많다. 지방지는‘지지(地志)’ 또는 ‘방지(方志)’라고도 하며 각 현에는 현지가, 각 성에는 성지가 있었다.

중국에서는 전국 시대부터 지방지의 편찬을 중시했고, 진한 시대에는 지방지 편찬이 성행했다. 풍속전(风俗传)․이물지(异物志)․풍토기(风土记)․산수기(山水记)․주군지지(州郡地志)․외역전기(外域传记), 그리고 그림과 글자로 가득 찬 도경(图经)이 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진대(晋代)에는 창쥐(常璩)가 편찬한 《화양국지(华阳国志)》가 있었는데, 이것은 오늘날 쓰촨성(四川省)의 고지(古志)다. 앞에서 《월절서(越絶书)》를 이야기했는데, 그것은 동한(东汉) 초에 위안캉(袁康)이 쓴 것으로 오늘날 저쟝성(浙江省)의 고지다.

수대(隋代)에는 황제가 각지마다 풍속․물산(物産)․지도를 편찬하도록 명령하여 《제군물산토속기(诸郡物産土俗记)》 같은 방대한 책이 나왔고, 《구우도지(区宇图志)》 《방물지(方物志)》 같은 책들이 편찬되었다.

당대에는 지방지의 편찬이 더욱 활발해져, 지방의 정부기관․천상(天象)․하류․제언(堤堰)․호택(湖泽)․역도(驿道)․고성(古城)․고묘(古墓)․사묘(寺庙)․학교(学校)․가요(歌谣)를 기록한 책들이 나왔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던 판춰(樊绰)가 편찬한 《만서(蛮书)》는 오늘날 윈난성(云南省)의 고지다.

송대에는 전국에서 보편적으로 지방지를 편수했고, 현재까지 보존된 것만도 30여부나 된다.

원․명․청대에는 지방지 편찬을 더욱 중시했다. 이러한 경향이 절정에 달하여 성에는 성지, 부(府)에는 부지, 주에는 주지, 현에는 현지가 있었다. 이밖에도 각 지역에서는 관지(关志)․위지(卫志)․둔지(屯志)를 편수했고, 누(樓)․정(亭)․사(寺)․묘(庙)․암(庵)․탑․사(祠)․교(桥)․서원 등의 지서(志书)도 편찬했다. 청조 일대는 실로 지방지 편찬의 전성시대였다.

청조의 대학자 구옌우(顾炎武)는 《천하군국리병서(天下郡国利病书)》를 저술했다. 이것은 바로 명대의 각 지방지에서 뽑아낸 것으로 주요 내용은 경제 사료(经济史料)였다. 또 구쭈위(顾祖禹)는 《독사방여기요(读史方舆纪要)》를 저작했는데, 이 책은 군사지리(军事地理)를 서술한 것으로, 어느 곳을 공격할 수 있고, 어느 곳을 방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지적해 놓았다. 이 두 명의 구 선생은 모두 청 왕조에 대해 혁명을 일으키려 했다.

마오쩌둥(毛泽东)은 고대 사서 가운데 두 권의 책을 숙독했다고 하는데, 그 하나는 《자치통감(资治痛鑑)》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위에서 말한 《독사방여기요》다. 이것은 마오쩌둥의 사촌형인 왕지판(王纪凡)이 나에게 말해 준 것이다.

명대 이전의 지방지는 대부분 실전되었고 오늘날까지 전해 오는 것은 대부분 청대의 것으로 8000여 종이 있다. 명 이전의 방지(方志)는 대부분 송대에 편찬된 《태평어람(太平御览)》, 명대에 편찬된 《영락대전》, 청대에 편찬된 《고금도서집성》 때문에 어느 정도나마 보존될 수 있었다.

지방지(地方志)를 토대로 하여 정치사․군사사․경제사․문화사․사회 발전사 등을 연구할 수 있기 때문에 지방지의 연구는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지방지에는 기후․천상․지형․토양․수문(水文)․물산 등에 관한 것이 대량으로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청대에는 방지의 연구에만 종사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 뒤에 점차적으로 전문적인 방지학(方志学)이 형성되었다.

현대에는 후베이(湖北) 사람인 장궈간(张国淦)이 2000부의 지방지를 수집하여 목록을 작성하고 《중국고방지고(中国古方志考)》를 저술했다. 그리고 주스쟈(朱士嘉)는 《중국지방지종록(中国地方志综录)》을 편찬하고 있다. 주스쟈는 현재 후베이에 있으며 장궈간이 수집했던 고지방지(古地方志)를 수집했다. 그 후 그는 직접 각 성의 여러 지역으로 그 지방의 지(志)를 보러 다녔다. 그는 그의 저작에서 강희․건륭 제 때의 방지가 현재 어느 곳에 보존되어 있는가 하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고찰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미국 도서관에서는 군사 지도를 그리기 위해 중국 지방지를 대량으로 사들인 일이 있다. 결국 지방지를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나라는 미국이다.

(6) 가보(家谱)

지방지를 고증할 때에는 가보를 고증해야 한다. 중국의 가보에는 봉건 사회에 관한 많은 자료가 있다. 고 가보(古家谱)를 연구하면 선조의 부권(父权)․족권(族权)․가법(家法)․가규(家规) 등의 자료를 모두 찾아낼 수 있다.

朱氏家譜

이른바 ‘의장(义庄)’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족전(族田)이다. 일가에 먹을 것이 없을 때에 의장에 가면 먹을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의장은 빈민에게 먹을 것을 주기도 했다.

가보에서 우리는 족장의 지위가 높았고, 경제적으로 큰 권력을 쥐고 있었다는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봉건 사회를 연구하려면 예부터 전해오는 가보를 보아야 한다. 원래는 판광단(潘光旦)이 가보를 연구했으나 그 후로는 연구되지 않았다.

고대 신화가 그려져 있는 한묘漢墓의 비단 그림

기타 고대의 전설, 신화 및 고사(古事)에 대해 과거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으나, 현재는 옛 전설이나 신화가 모두 고대 사회의 발전과 관계가 있다고 여기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 학자들은 이쪽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예를 들면 소수 민족을 연구하려 할 때 소수 민족의 사서(史书)는 찾기가 어렵기 때문에, 단지 신화․전설 그리고 가요에만 의존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들을 주의해서 보아야하고 모두 수집하여 연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역사학 연구에 관하여 이야기하자면 그 범위가 갈수록 넓어진다. 이것은 단지 24사만 연구했던 이전의 연구 동향과는 다른 것이다.

14) 고고(考古), 고대 기물의 복원(復塬)에 대해 : 앞에서 고증을 이야기할 때 전례․서적 고증에 관해서는 이야기했다. 이제 고대 기물의 복원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고물 복원은 매우 의의 있는 일이다. 예를 들어 한대의 장헝(张衡)이 제작한 지동의(地动仪)․천문의(天文仪)는 이미 실전되었다. 이제 고서의 기록에 의거하여 그것을 다시 만들어 낸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가!

장헝은 동한 시대의 과학자이며 세계 최초의 천문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천문 역법 그리고 지진에 관해 매우 중요한 연구 성과를 이뤄놓았다. 그 중에서도 그의 걸출한 성과는 천문학에 있다. 그의 천문학 저작인 《영헌(灵宪)》은 매우 유명하고 가치 있는 것이다.

장헝은 천상을 관측하기 위해 이전에 있었던 ‘혼천의(浑天仪)’보다 더욱 정밀하고 전체를 볼 수 있는 새로운 혼천의를 만들었다. 이것은 자유자재로 회전하는 동구(铜球)로 28수(宿)와 기타 항성의 위치가 새겨져 있다. 동구에는 축(轴)이 있는데, 양쪽 끝은 북극과 남극을 상징하고 있다. 구의 외면에는 동권(铜卷) 몇 개가 있는데, 이것은 지평권(地平卷), 자오권(子午卷), 황도권(黄道卷), 적도권(赤道卷)을 나타내며, 적도와 황도 위에는 24절기(节气)가 새겨져 있다. 혼천의가 돌아갈 때에는 위에 새겨 넣은 천상이 하나하나 나타나는데, 이것은 천체 성구(星球)의 운동과 매우 비슷하다.

지동의地動儀 복원 모형

장헝은 또 풍향을 측정하는 ‘후풍의(喉风仪)’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지질을 연구해 ‘지동의(地动仪)’라는 지진 예측기를 만들었다. 이 지동의는 당시 뤄양에서 천리나 떨어진 곳의 지진도 정확하게 예측한 적이 있다.

이러한 고대의 과학 기물을 복원하여 제작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또 선조들이 제작한 ‘지남차(指南车)’와 거리를 기록하는 고차(鼓车)가 모두 다시 만들어져 현재 베이징의 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후대에 사용하던 지남침은 자석(磁石)을 사용한 것으로 고대의 지남차와는 전혀 다르다.

거리를 기록하는 고차는 톱니바퀴의 회전 운동을 이용하여 북을 치며 거리를 기록하는 것이다.

15) 고생물학: 고생물학과 역사학의 관계는 갈수록 밀접해진다. ‘베이징인(北京人)’ 화석의 발견을 통하여 중국 북방인이 50만 년 이전에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베이징인의 화석은 베이징 서남쪽에 있는 저우커우뎬(周口店) 룽구산(龍骨山)의 동굴에서 발견된 것으로, 과학자들은 수십 구(具)의 남․녀 골격을 연구했다. 예를 들면 두개골의 형상에 의거하여 베이징인의 두부(头部)를 복원했고, 그것으로 베이징인의 뇌를 연구한 결과 현대인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냈다. 또 손뿐만 아니라 신체 전체의 구조도 현대인과 다르므로 원숭이와 사람의 중간 시기 때의 인간은 어떠했는가에 관한 여러 가지 사항을 알아낼 수 있었다. 베이징인의 발견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중국 윈난성에서는 또 일찍이 ‘위안머우인(元谋人)’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구석기 시대의 인류 화석이다. 그것에 대한 연구로 우리는 170만년 이전에 중국에 인류가 존재했다는 것과 그것이 아시아 최초의 인류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산시(陕西)에서는 50~60만 년 이전의 인간인 ‘란톈인(藍田人)’이 발견되었다. 베이징인․위안머우인․란톈인의 생활 유적지에는 사람의 골격화석이 있어 고고학자가 더 연구를 해야 한다.

베이징 원인猿人 복원상

동시에 돌로 만든 공구와 생활용구도 약간 있다. 예를 들면 절단하는 데 사용한 석기, 가는 데 쓴 석기, 그밖에 불에 타고 남은 재 등 몇 가지가 있다. 석기를 근거로 하여 고대 원인(猿人)의 생활과 노동 방식을 연구할 수 있다. 또한 재를 연구함으로써 당시에 인류가 불을 사용하여 음식을 익혀 먹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고대 인류사상의 대 변화이며 진보인 것이다. 상술한 베이징인․위안머우인․란톈인의 발견과 연구는 모두 중국 구석기 시대의 발견과 연구에 속한다. 신석기 시대의 문화 유적은 허난성 몐츠(渑池)에서 많이 발견되었는데, 양사오촌(仰韶村)에서 발견되었기에, ‘양사오 문화’라고 명명되었다. 이 시대의 문화 유적은 연구를 통해 대부분이 신석기 시대의 것임을 알아냈다.

황허 양안에서는 적지 않은 석기 시대 유적지가 발견되었다. 산시(陕西)․산시(山西)․허난(河南)․베이징(北京)․허베이(河北)․간쑤(甘肃)․칭하이(靑海)에서는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 인류의 화석과 문화 유적지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 적지 않은 것이 5000~7000년 전에 모계 씨족 사회인들이 남긴 것이다.

또 신석기시대 후기의 유적인 산둥(山东)의 ‘다원커우 문화(大汶口文化)’ 유적과 ‘룽산 문화(龙山文化)’의 많은 화석․석기․골기가 있다. 연구 결과 신․구석기시대에는 황허 유역이 중국 민족의 요람이었음을 알아냈고, 그로써 황허는 ‘중화(中华)’의 상징으로 여겨지게 됐다.

신․구석기 시대의 석기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구석기시대의 석기는 돌로 돌을 치고 때려서 만든 것이므로 석기와 돌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신석기 시대의 석기는 갈아서 만든 것이므로 매끈하다. 만일 이런 학문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신․구석기를 구분하지 못할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고 화석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고고학자․고생물학자․고인류학자들은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사람의 화석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노인인지 어린아이인지도 분별해 낼 수 있다. 고고학자․고생물학자의 연구성과는 매우 진귀한 역사 자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