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한시-시윤장施潤章 눈 속에 대악을 바라보며雪中望岱岳

눈 속에 대악을 바라보며雪中望岱岳/청淸 시윤장施潤章

碧海煙歸盡 푸른 하늘은 구름이 모두 걷혔고
晴峰雪半殘 맑은 봉우리엔 눈이 반쯤 남았네
冰泉懸衆壑 언 냇물은 수많은 골짝에 걸렸고
雲路鬱千盤 운무 낀 산길 천 굽이 굽이도네
影落齊燕白 흰 그림자 제나라 연나라 비추고
光連天地寒 차가운 기운 하늘과 땅 이어졌네
秦碑淩絕壁 진시황 비석이 절벽에 서 있거니
杖策好誰看 지팡이 짚고 가 누가 잘 살펴볼까

이 연재에서 세 번째로 소개하는 시윤장(施潤章, 1618~1683)의 시이다. 시윤장은 안휘성 선성(宣城) 출신으로 조부와 부친이 모두 성리학자인 집안에서 태어나 1646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원 시강까지 지낸 학자이다. 청나라 초기에 남방을 대표하는 시인이었다.

이 시는 1676년에 59세로 산동 지역의 학문을 장려하기 위해 태산을 지나가다가 지은 시이다. 제목의 ‘설중(雪中)’은 눈이 오는 상황일 수도 있고 오던 눈이 그친 상황일 수도 있는데 이 시에서 묘사한 내용을 볼 때 큰 눈이 막 개었을 때 지은 시로 보인다. 시풍이 호기롭고 웅장하여 이 연재 52회에 소개한 두보의 <망악(望嶽)>을 계승하고 있는 시라 평할 수 있다.

벽해(碧海), 푸른 바다라고 한 것은 태산 주변의 하늘이 바다처럼 푸르게 개었음을 비유한 말이고, 맑은 봉우리는 태산의 정상 옥황봉(玉皇峰)을 말한 것이다. 어떤 이는 벽해를 태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동해의 모습이라고 하는데 이는 제목의 ‘망대악(望岱岳)’ 과 맞지 않고 마지막 구의 ‘지팡이 짚고 누가 바라볼까?’ 하는 내용과도 어긋난다. 그리고 눈이 쌓인 산 정상에 60을 바라보는 노인이 어떻게 올라가겠는가?

후반 4구는 특히 두보의 <망악>을 떠올리게 한다. 두보는 태산이 ‘제나라 노나라에 걸쳐 푸른 산색 끝이 없네.[齊魯青未了]’라고 하고, 또 ‘산의 앞뒤에 따라 어둠과 밝음이 나뉘네[陰陽割昏曉]’라고 하였는데, 이 시에서는 ‘눈 덮인 산의 모습이 제나라, 연나라를 비추어 희다.[影落齊燕白]’라고 하고, 또 ‘해에 비친 산 빛은 하늘과 땅에 차가운 기운을 발산한다.[光連天地寒]라고 하였다. 계절은 여름과 겨울로 다르고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제나라, 노나라와 제나라, 연나라로 다르지만 큰 기상과 웅장의 규모는 매우 닮아 있어 두보시를 계승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또 <망악>과 구성 면에서도 동일하다. 두 시 모두 앞 6구는 대구를 써서 서경 묘사를 하고 마지막 구는 산구(散句)를 써서 자신의 포부를 드러내고 있다. 두보가 마지막에 ‘언젠가는 기필코 저 산 정상에 올라, 다른 산들이 작은 것을 보고 말리라.[會當淩絕頂, 一覽衆山小]라고 하여 기필코 대시인이 되고 말겠다는 웅대한 포효를 하였다면, 시윤장은 이 산 정상에 있는 진시황의 비석을 한 번 가서 살펴보고 싶다는 학자로서의 소망을 드러내고 있다.

지금 이 시인이 말하는 진비(秦碑)는 이 시에서 ‘능절벽(淩絕壁)’, 즉 ‘절벽 위’라고 지목한 것처럼 태산 정상, 즉 이 시에서 말한 잔설이 반쯤 남은 청봉(晴峯), 즉 옥황봉 정상에 청 건륭 5년(1740)까지 서 있다가 화재로 부서져 소실되었다. 이 비를 <진태산각석(秦泰山刻石)> 혹은 <봉태산비(封泰山碑)>라고 한다. 기원전 219년, 진시황 28년에 동순(東巡)하여 산동의 위해(威海)에 있는 천진두(天盡頭)까지 갔을 때 세운 것으로, 높이 4.5척, 넓이 1.4척 규모이며 당시 재상인 이사(李斯)가 소전(小篆)으로 쓴 비석이다. 이사는 당시 봉건 제도를 군현제도로 바꾸고 수레바퀴의 폭이나 도량형을 통일한 사람이다. 이 사람이 한 가장 뚜렷한 일이 바로 문자를 통일한 것인데 이를 수레 통일과 아울러 ‘서동문(書同文), 거동궤(車同軌)’라고 흔히 부른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자신의 강산을 돌아다니며 살펴보고 중요한 지점에 비석을 세웠는데 이 비석의 글씨를 다 이사가 썼다.

그런데 이 비석이 1740년에 사당의 화재로 부서져 소실되었다. 그 잔편을 1815년에 산정의 옥녀지(玉女池)에서 발견하여 지금 태산대묘(泰山岱廟) 안에 보관하고 있는데 10여 자 중에 8자가 완전하다. 본래의 비석에는 전면과 양 측면에 도합 144 자를 새겼는데, 기원전 209년에 진 이세(二世) 호해(胡亥)의 조칙 78자가 더 있어 모두 222자이다. 《사기(史記)》 <진시황본기>에서도 이 비석을 세울 당시의 정황과 비문에 적은 내용을 기록해 놓아 일찍부터 그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현재 원비 외에 몇 종의 탁본이 있다. 가장 이른 시기의 탁본은 송대 탁본으로 165자 정도이다. 이 탁본은 명나라의 수장가 안국(安國, 1481~1534)이 소장하고 있다가, 1940년에 일본인이 구매하여 지금 일본 동경의 대동구립서도박물관(台東區立書道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이 비석은 서예사에서 매우 오래되고 중요할 뿐만 아니라 글씨 자체도 극히 강건하고 수려하며 웅장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지금 시윤장이 태산을 노래하면서 하필 이 비석을 지목하여 산 정상에 가 보고 싶어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눈 때문에 시윤장이 실제 가서 보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는 아마도 이 비석이 나중에는 소실되어 더 이상 못 보리라는 것을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 구절을 진비(秦碑)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렇게 보면 시인이 ‘호(好)’ 자를 쓴 뜻과 어긋날 뿐 아니라 앞에서 묘사한 웅장한 태산의 면모가 우스꽝스럽게 된다. 글은 전체의 맥락 속에서 부분을 이해해야 한다.

겨울 태산을 멀리서 조망하면서 태산이 지닌 신성하고 웅위한 면모, 그리고 그 산에 깃든 역사적인 유서까지도 자신의 포부와 함께 아우르고 있는 훌륭한 작품이다.

秦泰山刻石

365일 한시 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