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출발

2013년 봄, 박사학위를 받자마자 나는 노트북과 몇 권의 중국어 원서를 싸 들고 집 근처 도서관에 다니기 시작했다. 다시 번역 일을 시작해야 했으므로 뭔가 기획을 해서 출판사에 제안할 심산이었다. 하지만 꼬박 2년여를 쉬어서인지 영 마땅한 기획거리가 찾아지지 않았다. 특히 전문 분야인 중국 소설 기획을 포기한 데다 쉬는 사이 아는 편집자들이 출판사를 옮겨 네트워크가 끊어지는 바람에 더 그랬다.

솔직히 막막했다. 막막하니 딴생각만 들었고 그럴 때마다 한창 재미 들린 페이스북을 들락거렸다. 그리고 그 와중에 글항아리 강성민 대표와 친구로 연결되었다. 혜성 같이 나타난 인문학 출판의 강자, 글항아리에 대해서는 그전에 이름을 들은 바 있었다. 불가능한 속도로 벽돌 두께의 인문서를 척척, 시장에 내놓는 불가사의한 출판사라고들 했다. 그래서 내심 궁금해하고는 있었는데 막상 온라인 친구가 되고 나니 그렇게 유쾌한 사람이 없었다. 순박하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의외로 다혈질인데 어떤 면에서 나와 코드가 잘 맞았다. 아마 국문학도이면서 시를 쓰던 사람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중문학도이면서 역시 시를 썼던 나와는 이상하게 소통이 잘 됐다. 그래서 한 번 보지도 못한 사이인데도 서로 댓글 놀이를 하며 잘 놀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난데없는 질문을 받았다.

“혹시 이중톈의 중국사 시리즈에 대해 잘 아세요?”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왜 모르겠는가. 나는 2013년 5월 중국에서 첫권이 나온 《이중톈 중국사》 시리즈를 2012년 후반에 저작권 에이전시로부터 PDF 샘플을 받아 검토한 사람이었다. 당시 검토를 지시한 사람은 김영사 박은주 사장이었다. 이메일로 그 샘플을 보내며 김영사에서 《이중톈 중국사》를 내보는 것이 어떨지 물어왔다. 김영사는 여러 해 전 이중톈의 《삼국지 강의》를 출간해 톡톡히 수익을 거둔 적이 있었으므로 관심이 클 만도 했다.

당시 나는 바로 인터넷을 뒤져 《이중톈 중국사》 시리즈의 출간 계획에 관한 정보를 섭렵한 뒤, 짧게 결론을 정리해 답장을 보냈다.

“이중톈의 매체 인터뷰를 보면 《이중톈 중국사》 시리즈는 6부로 나뉘며 각 부당 6권, 즉 전체 36권으로 출간된다고 합니다. 제1부 ‘중화의 뿌리’는 진나라 이전 시대를, 마지막인 제6부 ‘대변혁’은 근현대를 다룹니다. 다시 말해 여와의 신화, 전설 시대부터 덩샤오핑 시대까지 중국사 전체를 망라하는 대작 중의 대작입니다.

그런데 샘플 원고를 보니 《이중톈 중국사》는 각 권의 분량이 상당히 적습니다. 한국어로 번역을 하면 원고지 600~800매에 불과합니다. 일반적인 중국 학술서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대중성을 고려한 이중톈의 새로운 글쓰기 전략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이 시리즈의 출판 담당자이자 중국 출판계 최고의 기획자로 꼽히는 루진보(路金波)의 꼼수일 겁니다. 이중톈의 명성에 편승해 일부러 최대한 많은 권수로 나눠 시리즈를 냄으로써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것이죠.

하지만 아무리 권당 분량이 적더라도 이중톈은 분기별 2권, 매년 8권의 속도로 5년간 혼자 힘으로 36권을 완간하겠다고 하는데 이것은 제가 보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계획입니다. 더구나 이중톈의 전공 분야는 위진(魏晋) 시대 이전의 역사입니다. 위진 시대까지는 어떻게든 자신의 과거 학술 연구를 참고하고 고쳐 쓰면서 속도를 낼 수 있겠지만 그 뒤의 역사를 기술하려면 원전부터 연구 논문까지 새로 읽고 연구해야 할 자료가 산더미 같을 겁니다. 당연히 속도가 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제6부는 덩샤오핑 시대인데 최근 역사 기술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엄격한 태도를 감안할 때 원활한 집필이 가능할지 의문입니다.”

요컨대 《이중톈 중국사》의 출판을 포기하라는 소리였다. 중국의 ‘국민 학자’ 이중톈의 작품이니만큼 내용의 재미와 충실성은 보장될 것이라고 보았지만 중국출판사의 지나친 상업주의적 행태가 마음에 안 들었고 무엇보다도 시리즈가 순탄하게 완간될 수 있을지 불안했다. 게다가 이중톈은 당시에 벌써 67세의 고령이었다. 그 나이에 36권짜리 거작을 쓰기 시작해 과연 다 마칠 수 있을까?

박은주 사장은 직원의 말을 참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본인의 감이 최우선인 사람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내 말을 들었다. 즉, 내 말도 참고할 만했고 본인의 감도 영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강성민 대표는 박은주 사장만큼이나 자기 감을 믿는 사람인데도 완전히 다른 선택을 했다. 내가 솔직하게 우려를 전달했건만 《이중톈 중국사》 1권의 내 샘플 번역만 보고 출간을 결정한 것이다.

“역시 이중톈이에요. 역사에 대한 대가의 통찰이 돋보여요!”

2019년 말 현재, 《이중톈 중국사》 시리즈는 중국에서 21권째인 《주씨의 명 왕조朱明王朝》가 막 출간된 상태다. 이중톈이 처음 공언한 계획대로라면 2018년에 완간됐어야 하지만 역시 내 우려가 옳았다. 한편 《이중톈 중국사》 시리즈의 한국어판은 현재 제 11권 《위진풍도》까지 출간되어 중국보다 무려 10권이 뒤졌다. 이는 예기치 못한 판매 부진 때문이다. 하지만 《이중톈 중국사》 시리즈의 내용 자체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깊이와 가독성을 겸비한 대중 중국사로 그만한 저술은 전무후무하기 때문이다. 그 가치를 알기에 소수 열광적인 마니아층이 생겨났고 강 대표도 다소 느리기는 해도 뚝심 있게 출간을 밀어붙이고 있다. 그는 그런 사람이다. 판매 성적이 뒷받침해줄 것 같지 않아도 내용만 충실하면 어떻게든 책을 내려 한다.

나의 대학 같은 과 후배이기도 한 유유출판사의 조성웅 대표도 비슷한 점이 있다. 지금은 한국 일인 출판사의 대명사로 떠오른 유유출판사를 그가 얼마나 알뜰살뜰 꾸려왔는지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공부, 책, 중국, 이 3가지 키워드를 출판 방향으로 삼고 주로 국내 기획물 중심으로 착실히 책을 내오면서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불필요한 지출을 최소화했다. 그런데 무슨 귀신이라도 씌었는지 2013년부터 타이완 저자 양자오의 동, 서양 고전 시리즈를 무려 17권이나 냈다! 내가 알기로는 그중 초판이 다 팔려 손익분기점을 넘긴 책이 겨우 3권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나는 양자오 선생이 언젠가 한국에서 꼭 인정받았으면 좋겠어.”

조성웅 대표가 이렇게 말할 때 나는 옆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기가 막히기도 하고 계면쩍기도 했다. 기가 막혔던 것은 그가 작은 규모의 출판사를 운영하면서도 손해를 무릅쓰고 자기가 ‘최애’하는 외국 저자의 책을 계속 내려 했기 때문이고, 계면쩍었던 것은 그를 손해 입힌 14권의 책 중 고전 시리즈 6권을 내가 번역했기 때문이다. 본래는 1권만 번역하고 손을 떼려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고전문학 전공도 아니고 중국 고전도 안 좋아해. 제발 더는 내게 양자오 책 번역을 맡기지 말아줘.”라고 내가 호소했을 때, 조 대표는 단 한 마디로 내 입을 막았다.

“형, 번역 끝내고 원고 보내면 그날 당장 번역료 입금할게.”

나는 넋을 잃고 말았다. 모든 출판번역가의 꿈, 그것은 바로 탈고일에 돈이 들어오는 것이니까.

나의 번역계 복귀와 재출발은 이로써 순풍을 탔다. 출판번역가에게 고정 거래처가, 자기를 믿고 계속 일을 맡겨주는 출판사가 있다는 것은 엄청난 힘이다. 무엇보다도 집안 살림과 업무 스케줄이 예측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단점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지난 5년간 글항아리와 유유출판사 외에 내게 번역을 부탁해온 출판사는 기껏해야 서너 군데밖에 안 된다. 왜 그런지 궁금해서 다른 출판사 편집자를 붙잡고 물어보면 대답은 늘 한결같다.

“선생님은 글항아리 전속 번역가 아니셨어요?”

이런 말을 들으면 드는 생각은 하나뿐이다. 글항아리에, 유유출판사에 잘 해야 한다. 잘 못해서 사이가 나빠지면 나는 굶어 죽는다!

2013년 이후, 글항아리와 유유출판사가 아니었으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아마 채택률 5%의 외서 출간기획서를 이 출판사, 저 출판사에 돌리면서 생계는 거의 전적으로 대학 강의에 의존했을 것이다. 어쩌면 겨우 따낸 박사학위를 밑천 삼아 연구재단 프로젝트 선정이나 대학교수 임용 신청에 목을 맸을 수도 있다. 하지만 두 출판사와의 신뢰 관계 덕분에 이제는 대학 강의를 1개로 줄이고(시간강사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막막하기 그지없다) 기획과 번역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출판번역가의 후원자는 오직 하나, 믿을 만한 출판사뿐이다. 그러면 어떻게 출판사의 믿음을 얻을 수 있을까? 그 방법도 역시 하나뿐이다. 혈연, 학연, 친분, 다 소용없다. 오로지 편집자가 크게 손댈 필요 없이 말끔히 번역된 원고를 약속한 기일 안에 출판사에 넘기는 것뿐이다. 이 얼마나 간단하면서도 부담이 천근 같은 요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