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의 소리 – 평범함을 거부해온 수정레코드水晶唱片

런지앙다任將達(타이완 수정레코드 대표)
김택규 역

1 수정레코드 설립 당시의 시대 및 음반산업의 배경

이차세계대전이 끝나고 타이완은 식민통치에서 해방되어 국민당 정부의 권위주의 통치와 군사계엄의 시대(1949~1987)로 들어갔습니다.

이 기간에 타이완 국민은 집회, 결사, 언론, 출판, 여행 등의 기본적인 인권을 제한당했고 대중음악에 대한 통제는 더욱 엄격했습니다. 정부는 출판법을 수정해 언론과 사상을 통제했지요(1952년).

1978년 타이완과 미국의 수교 단절은 타이완 청년들의 문화적 각성을 촉발하여 “우리의 말로 우리의 노래를 창작하자”는 운동이 일어나게 했습니다. 그 운동의 이름은 ‘캠퍼스 포크 송 운동’이었습니다.

이런 자유로운 창작의 기운이 보수적인 당국을 불안하게 하여 1979년부터(1987년까지) 가요심사제도가 실시되면서 TV와 라디오의 가요 방송(공개방송)과 음반 출시 모두 사전 심사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계엄이 해제되고 나서 2년이 지난 1989년, 블랙리스트(黑名單) 프로덕션(수정레코드[水晶唱片])은 앨범 《히스테리송》(捉狂歌)을 출시했습니다. 이 앨범은 계엄 후 최초로 만들어진 ‘신(新)타이완가요’의 대표작입니다. 그런데 마침 선거 기간이어서 국민당이 장악하고 있던 매체에 의해 방송 금지를 당했죠.

任將達 사진 출처 mirrormedia

하지만 그 ‘신타이완어운동’의 인도 아래 타이완의 대중음악은 본격적으로 새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2 수정레코드 설립의 연원과 과정

1986년 저는 음반회사의 두 친구와 신문사에 다니는 한 친구와 함께 서양의 인디음악을 알리기 위해 왁스클럽(Wax Club)이라는 모임을 조직하고 주말마다 음반감상회와 음악강좌를 통해 새로운 음악과 관련 정보를 나눴습니다. 그 기간에 우리는 늘 캠퍼스와 펍, 음반가게에서 강좌를 열어 ‘포스트 펑크 록’을 소개했습니다. 예를 들면 조이 디비전, 뉴 오더, 더 스미스 같은 맨체스터의 밴드와, 막 유행하기 시작한 영미권의 새로운 음악 사조였지요. 그리고 음악잡지 《더 록커》를 발간해 그런 인디밴드들에 관한 정보를 나누는 한편, 실제 음악 작품을 통해 종족 차별, 동성애 그리고 신자유주의 정치, 경제 제도로 인해 나날이 악화되던 노동, 환경 등의 문제를 제시했습니다.

본래는 음악 정보의 공유에 머물렀지만 관심 있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었고 단지 음악 감상만으로는 동호인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음반 수입 사업을 시작하는 동시에, 막 영국의 인디음악 레이블을 대리하려던 수정레코드를 사들여 정식으로 음반사업에 뛰어들었죠.

1987년, 타이완은 장장 38년간의 계엄 시대를 마치고 자유민주주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아마도 새 시대의 부름 때문이었는지 우리는 더 이상 외국 음악 소개에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타이완 음악의 길을 열기 위해 4차례에 걸쳐 ‘타이베이 뉴 뮤직 페스티벌’(1987~1990)을 열었습니다.

당시 그 뮤직 페스티벌에는 쉐웨(薛岳), 자오촨(趙傳), 블랙리스트 프로덕션, 천밍장(陳明章), 자오이하오(趙一豪), 우보(伍佰) 같은 타이완 뮤지션뿐만 아니라, 당시 홍콩의 언더그라운드 밴드였던 ‘달명일파’(達明一派)와 블랙 버드 밴드도 초청을 받아 참가하여 크게 성황을 이뤘습니다.

또 그들의 작품도 연이어 출시했죠. 일부는 수정레코드가 제작, 유통했고 일부는 메이저 유통사에 위탁해 유통시켰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은 주류 상업체제와는 완전히 다른, 독립적인 소규모 유통 비즈니스 모델을 택했고 “오리지널리티의 존중, 저예산 제작, 소량 유통, 엄격한 재고 관리’를 원칙으로 정해 지켰습니다.

이런 비즈니스 모델은 작품의 자율성이 시장과 상업 메커니즘의 간섭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더 중요하게는 수정레코드의 음악을 사랑하는 지지자들이 수정 브랜드의 목록에 지나치게 상품화된 작품의 이름이 올라가는 것을 못마땅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그런 커뮤니티 문화로 인해 수정레코드는 다수의 다원적이면서도 탁월한 작품들을 낼 기회를 얻었습니다. 주류 음악을 전복시키는 인디록부터 타이완 하층계급의 목소리와 전통 가극의 음악, 민속 음악, 원주민 음악 등을 채집한 필드 레코딩까지 수정레코드만의 독특한 필모그래피를 남길 수 있었죠.

타이베이 뉴 뮤직 페스티벌은 4회에 그쳤지만 뒤이어 대학 캠퍼스의 인디음악 이벤트와 정기간행물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습니다. 여기에 좌파 문예지 《파보》(破報, Pots Weekly), 인디음악제 ‘봄의 외침’, ‘인더스트리얼 노이즈’를 주창한 ‘타이베이 브로큰 라이프 페스티벌’, 인디록 공연장 ‘언더월드 라이브 하우스’ 등이 출현해 90년대 타이완의 고유하고 색다른 문화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3 결론: 수정레코드가 대표하는 타이완 대중음악문화와 그 시대적 의미

신자유주의의 세계화 과정에서 5대 다국적 음반회사가 90년대 초, 속속 타이완 시장에 들어와, ‘레코딩 저작권의 사유화’ 과정을 통하여 본래 대중에게 속했던 음악문화를 빠르게 상품화했습니다. 또한 시장이 ‘데이터’와 ‘화폐’로 음악의 가치를 가늠함에 따라 음악은 물신숭배 속에 방향을 잃고 본질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상품화된 대중음악이 ‘도시화’ 과정에 따른 타이완 도시 청년들의 소외감을 적시에 메웠습니다. 90년대 타이완 청년들은 근면한 부모가 제공하는 풍요로운 경제 조건 덕분에 생활을 염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고독과 화려함이 그 세대의 전형적인 문화적 성격이었지요. 그들은 한편으로 물질적 향수를 추구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공허한 정신적 삶을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런 기묘한 ‘안전지대’에서 생활하던 젊은이들은 문화적으로 두 갈래로 나뉘었습니다. 바로 “내가 좋아하는 것이면 뭐든 괜찮다”는 즉흥적 향락파와, 냉소주의 경향의 사회 비판적인 진보 청년들이었습니다. 이 양자는 함께 90년대 도시 청년들의 문화적 토템을 키워냈는데 이들을 ‘문청(文靑) 세대’라고 부릅니다.

전자는 록레코드와 유에프오레코드라는 양대 메이저 회사의 추종자가 되었으며 후자는 “평범함을 거부하는” 우리 수정레코드를 택했습니다. 이러한 산업 환경에서 우리는 상업적 루트와 주류 매체에서의 배제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독립적인 루트와 마케팅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이밖에도 우리는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작품을 통해 정치, 환경, 핵발전소, 노동, 교육, 문화 등의 의제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가 되었습니다. 이런 태도와 문화가 똑같이 이런 의제들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였고 그들은 우리의 장기적인 소비자 겸 커뮤니티 문화의 지지자가 되었습니다.

문화적으로 우리는 음악인의 시장, 커뮤니티, 자아, 삶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하고자 시도하고 있습니다. “음악은 상품이 아니며 자신의 감동에 충실하여 삶으로 되돌아가 커뮤니티의 핵심 가치가 돼야만 합니다.” 비즈니스적으로 우리는 ‘선택과 집중’의 상업 모델을 버리고 ‘다원적 공생’의 전혀 다른 모델로 제작 예산을 합리적으로 배분하고, 유통 시스템을 소규모화하고, 재고를 줄이면서 롱테일 이론에 따라 판매 주기를 연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중음악이 아래에서 위로의 ‘자치 문화’로 돌아가 삶을 위한 문화의 중요한 초석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