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주로, 해외여행의 시작

독립문공원(왼쪽)과 의주대로(오른쪽) : 영은문 주초석과 독립문, 서대문역사공원이 있으며 사신들은 무악재를 넘어 홍제원에서 전별연을 마치고 고양으로 향했다.

의주로(義州路)는 오늘날 서울역에서 무악재를 넘어가는 대로입니다. 의주로는 조선 후기 한양에서 의주까지 이어지는 조선 제1대로였고, 관서로 혹은 서북로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압록강을 건너면 중국 요동으로 이어진다는 점, 중국과의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점 때문에 조선에서는 의주로를 사행로, 연행로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의주로는 연행노정의 시작과 끝인 셈입니다. 이번에는 한양에서 사행단이 선발되어 출발하는 과정과 서울에서 판문점까지의 의주대로를 소개합니다.

비공식 수행원으로 중국 여행 가는 박지원

사행(使行)은 정사, 부사, 서장관을 삼사(三使)의 책임으로 통역관, 압물관, 화원, 의원 등의 공식수행원이 있었습 니다. 아울러 말몰이꾼, 상인 등 수백여 명이 참여하게 되는데요, 연암의 연행길에는 약 270여 명이 동행했습니다. 사행단 구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들이 바로 자제군관(子弟軍官)인데요, 주로 삼사의 자제들이나 친인척, 문객 중에서 선발하여 외국 견문의 기회를 갖게 하려는 목적으로 동행시켰습니다. 삼사의 비공식 수행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김정희 등도 모두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중국을 다녀왔습니다.

연암은 1780년 건륭황제 70세 생일 축하사절의 정사인 박명원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참여하여 종횡무진 견문을 넓혔는데요, 연암이 연행하던 시기는 연암으로서도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던 시절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조정 권력을 피해 연암골에 은거하였다가 홍국영의 실각으로 다시 세상에 나온 상황이었고, 이 무렵 동료 지식인들은 이미 중국 연행을 통해 북학과 실학적 경세관을 경험하던 터였습니다. 백탑파 지식인들은 선의의 경쟁이 활발했을 것입니다. 박제가의 『북학의』 서문을 썼던 연암 역시 연행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자 하는 열망을 키우지 않았을까요? 연암골을 나와 방황하던 연암에게 연행은 그에게 매우 특별한 기회였을 것입니다.

의주대로(한중연행노정답사연구회)

연암은 정식관원이 아니었기에 비교적 자유롭게 유람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연암은 북경으로 향하는 동안 연행 노정에서 경험했던 중국의 제도와 문화, 삶의 이모저모를 꼼꼼하게 기록하였고, 해학과 풍자로 조선 사회의 병폐를 바로 잡을 방도를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열하일기』를 통해 연암의 연행 경험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지만, 그의 독특한 글쓰기는 문체반정(文體反正)의 빌미가 되어 금서(禁書)의 멍에를 갖기도 했습니다.

창덕궁 인정전과 희정당(오른쪽) : 사신들은 임금께 출발 전 숙배하고 귀국후 복명하였다.

임금에게 하직하고 가족친지와 헤어지다

사행 출발하는 날, 사신은 아침 일찍 궁궐에 나아가 임금에게 하직하는 숙배(肅拜)를 했습니다. 대개는 사행의 정사와 부사가 궁궐에서 임금께 하직을 고하면, 임금은 비상약인 청심환, 부채, 겨울 추위 대비용 귀마개 등을 선물로 내려주었습니다. 아울러 ‘사행의 임무를 잘 수행해 달라’고 특별히 당부하며 격려했습니다.

모화관(慕華館)과 홍제원(弘濟院)에서는 사신을 전송하는 전별연(餞別宴) 모임이 열렸습니다. 모화관에서는 삼사신과 조정의 고위 관료들이, 무악재 너머 홍제원에서는 해당 관아의 하급관리나 가족, 친지들의 전송이 이어졌습니다. 지금의 홍제동과 모래내 일대는 홍제원이 있던 자리로, 떠나는 이들과 가족들이 몰려들어 자연스레 시장이 형성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아침 일찍부터 동료, 친지들과 인사를 했음에도 사신들은 석양 무렵이 되어서야 한양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임진나루 건너자 멈춰 선 의주로

무악재, 녹번현, 박석고개, 구파발, 창릉천, 숯돌고개 등 여러 고개와 하천을 지나서 어둔 녘에야 고양 관아의 별관인 벽제관(碧蹄館)에 들었습니다. 고양은 고을 형편이 어려워 접대도 시원찮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인지 저녁상을 물린 후 다시 길을 나서 파주목 관아에서 숙박하는 사신들도 많았습니다.

용미리 쌍석불 입상

파주 혜음령을 지나면 용미리 쌍석불 입상(雙石佛立像)이 있습니다. 석불은 자연석에 새긴 마애불로 조형미가 뛰어나고 고려시대 불교예술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미술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갖는 불상입니다. 장지산 중턱에 서있어 사행길의 이정표 역할을 해서인지 사신 들의 시문(詩文)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적입니다.

파주목 관아 문루 초석 (파주초등학교 내)

윤관 장군 묘역을 지나 파주목에 도착 하면 주로 관아 안의 봉서당(鳳棲堂)에서 묵었습니다. 파주목 관아 터는 현재 파주초등학교와 인근의 군부대에 걸쳐 있는데요, 학교에는 파주목 관아 문루 주초석과 파주 목사들의 선정불망비가 여러 개 있어 이곳이 관아 터였음을 가늠케 해줍니다. 관아에서 하룻밤을 머문 사행은 아침 일찍 임진나루로 향합니다. 개성까지 가려면 하루는 족히 걸리는 거리이니, 서둘러야 했습니다.

JSA경비대대 앞 판문점 가는 길

임진나루는 한양과 개성을 잇고, 남쪽과 북쪽의 물산이 한강을 통해 이동 했던 해상교통의 거점입니다. 교통의 중심지는 바로 군사요충지이기도 하는데요, 이곳이 바로 진서문(鎭西門)이 있었던 장소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임진나루를 통해 평양으로 피난을 갔고, 한국전쟁 시에는 남북의 군대가 이곳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곳입니다. 현재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군부대가 상주하고 있으며, 사전허가를 받아야 견학할 수 있습니다. 남한지역 의주로는 판문점 입구의 JSA경비대대 삼거리에 다다르면 멈춰야 합니다. 더는 답사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개성이 지척

임진강의 전경을 보려면 화석정(花石亭)에 올라야 합니다. 화석정은 율곡 이이 선생이 독서하며 머물렀던 정자로 임진강 적벽 위에 서있습니다. 화석정 아래로는 임진강이 횡(橫)으로 휘돌아 흐르고, 서북 방향으로 멀리 개성 송악산 연봉들이 들쭉날쭉 드러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모습을 가까이 보고자, 한걸음에 개성으로 내달리고픈 충동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조속히 남북관계가 개선되어서 개성을 찾는 발걸음들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사신들은 아침 일찍 임진나루와 동파나루를 건너 장단에서 점심을 먹고 개성으로 향했습니다.

백탑파(白塔派)
현재 서울 탑골공원 자리의 백탑(원각사지 십층석탑) 부근에 사는 지식인 그룹. 박제가, 이덕무, 박지원 등을 일컫는다.

문체반정
‘반정(反正)’은 ‘바른 곳으로 되돌린다’는 뜻으로, 정조는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 나오는 문장을 금지하고 정통 고문(古文)의 문체를 모범으로 삼게 했다.

진서문(鎭西門)
영조는 군사요충지인 임진나루에 도성 방어용 성문을 쌓고 제액을 ‘임벽루 진서문’으로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