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루몽》과 해석 방법론-《홍루몽》작자의 신분 및 그 강력한 해석 기능 4

제2장 《홍루몽》 작자의 신분 및 그 강력한 해석 기능 4

4.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의 작자 세계관에 대한 초월

이상의 논술을 통해서 우리는 반만설을 주장하는 색은파와 기인 출신 작자의 자서전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당연하게 모두 작품에 대한 작자의 영향을 강조했으며, 위잉스의 조화론도 작자의 의도라는 틀을 넘어서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작자의 의도 혹은 작자의 본의를 찾아 내는 것이 뿌리 깊은 해석의 전통이 되었기 때문에, 작자의 의도가 해서의 최종 목적이 되어야 하는지 여부를 고려한 학자는 아주 드물었다.

서양의 문학이론가 윔새트(William K. Wimsatt: 1907~1975)와 비어즐리(Monroe C. Beardsley: 1915~1985)는 일찍이 ‘의도적 오류(intentional fallacy)’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 작자의 구상 또는 의도로 어떤 문학 작품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려 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주장했다. 이런 개념들이 전통적인 《홍루몽》 연구 논저에 나타난 것은 비교적 드문 듯하다.

그러나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된 후 중국 대륙의 학자들이 마르크스주의 비평이론을 채용함으로써 은연중에 의도론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런 경향은 1954년의 ‘《홍루몽》 사건’ 또는 ‘위핑보 비판 운동[批兪運動]’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 비판 운동은 《홍루몽》 연구가 시작된 이래 가장 대규모의 비판 운동으로서, 이후 중국의 문학비평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 비판 운동의 과정과 내막에 관해서는 쑨위밍(孫玉明)의 《홍학: 1954》를 참조하기 바란다. 본서에서는 이 운동 과정에서 나타난 몇 가지 해석 방법과 개념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위핑보 비판 운동’에 관한 중요 문장들은 《홍루몽문제토론집》(이하 《토론집》으로 약칭함) 제1집부터 제4집에 수록되어 있다. 이 《토론집》 제3집과 제4집의 “출판 설명”에 따르면 제1집과 제2집은 주로 위핑보와 후스의 글을 비판한 것이고, 제3집과 제4집은 “자산계급 유심론의 잘못된 관점과 방법에 대한 비판을 토대로 정확한 관점과 방법으로 《홍루몽》 연구를 시도한 글들”이라고 했다. 이른바 정확한 관점이란 마르크스주의이며, 그 가운데는 레닌 등의 관점도 포함되어 있다. 이 때문에 《토론집》에 수록된 글들은 1949년 이후 대륙의 학자들이 마르크스 문학비평이론을 인용하여 《홍루몽》을 연구한 구체적인 성과들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위잉스는 이 유파의 연구를 ‘투쟁론’ 또는 ‘혁명의 홍학’이라고 불렀다. 사실상 “마르크스 레린 홍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할 텐데, 왜냐하면 ‘마르크스 레닌’이 목표일뿐만 아니라 방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평론가들은 아마도 마르크스 레닌의 저작을 섭렵하지 못했을 테지만, 거시적인 측면에서 보면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위아래를 막론하고 모두 마르크스 레닌의 사상(엥겔스 등의 사상을 포함해서)을 찬양했고, 평론가들은 다투어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마오쩌둥에게 다가가려 했다. 이 때문에 이 해석 집단(interpretive community)을 ‘마르크스 레닌 홍학’이라 칭해도 큰 잘못이 없을 것이다.

이 운동 과정에서 후스 계열의 위핑보와 저우루창 모두 자아비평의 글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마르크스 레닌 사상에 입각한 《홍루몽》 연구자들은 순식간에 해석권, 혹은 더욱 강력한 해석권을 탈취했다.

당시의 평론가들은 신홍학 연구자들(주로 후스와 위핑보 등의 연구를 가리키는데, 주변으로는 저우루창 등에게까지 영향이 미쳤음)을 함부로 공격했는데, 그 목적은 학술계에서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관점과 방법을 확립하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은 후스 계열의 신홍학을 공격하는 와중에 그들의 연구 성과를 이어받아 조설근이 작자이고 고악이 이어서 썼다는 것을 확인했다. 《홍루몽》 작자론의 발전 방향은 반만설을 주장하던 이들의 ‘종족’ 범주에서 자서전설을 주장하던 이들의 ‘가계’ 범주(즉 조씨 가문)으로 옮겨갔는데,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은 마르크스주의 문학비평이론을 채용했기 때문에 《홍루몽》의 작자에 대한 이해에서도 ‘작자 종족에 대한 논쟁’에서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에는 ‘작자의 가계’가 미치는 영향(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은 이것을 ‘작자 세계관’의 영향이라고 칭했음)에서도 거의 벗어났다.

1) 조설근의 세계관에 대한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의 논의

사실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은 조설근의 세계관에 대해서도 독특한 관점을 갖고 있었다. 대부분의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은 조설근의 세계관에 어떤 낙후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을 귀납하자면 최소한 다음과 같은 항목이 포함된다.

1. 숙명주의 사상
2. 색공(色空), 몽환(夢幻), 허무주의 사상
3. 봉건 계급에 대한 미련과 귀족 생활에 대한 그리움

조설근이 이런 ‘낙후’되고 ‘소극적’인 사상을 갖게 된 이유에 대해서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은 두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첫째는 ‘역사적 한계’로서, ‘역사 조건의 한계’라고도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조설근이 살았던 시대에는 아직 새로운 출로를 보지 못하고 봉건제도를 대체할 만한 어떤 새로운 제도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마지막에 가보옥이 불교로 도피하도록 안배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계급의 낙인”으로서, 조설근이 ‘봉건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계급적 요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서 과거의 부귀영화에 미련을 갖고 자신이 속한 계급을 철저히 배반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반만설과 자서전설은 작자의 신분에서 출발하여 작자가 작품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작가 결정론’의 추리 방식에 따르면,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이 보기에 조설근은 낙후되고 소극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홍루몽》도 필연적으로 낙후되고 소극적인 작품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은 《홍루몽》이 이런 한계를 넘어섰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창작론과 작품론, 비평론이라는 세 가지 경로를 통해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1. 창작론: 창작 방법이 낙후된 세계관을 이겼다.
2. 작품론: 작품에 담긴 객관적인 의미가 작자의 의도를 넘어섰다.
3. 비평론: 비평가는 작가가 가진 세계관의 소극적인 성분을 버리고 적극적인 부분을 중시해야 한다.

2) 창작론: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이 보는 조설근의 ‘현실주의적 창작 방법’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조설근이 자신의 ‘낙후된 세계관’을 깨뜨렸던 것은 주로 이른바 ‘현실주의적 창작 방법’에 힘입은 것이었다. 예를 들어서 양인안(楊蔭安)은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는 전혀 의심할 여지없이 이런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현실주의적 창작 방법은 조설근의 낙후된 반동 부분을 물리쳤으니, 이는 ‘현실주의의 가장 위대한 승리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이런 논점은 《홍루몽문제토론집》에 자주 보인다. 그러나 ‘현실주의적 창작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논자들은 대단히 막연하게 설명했다. 그들의 설명을 귀납하면 대개 다음 사항을 포함한다.

1. 작자는 현실 생활에 충실하게 묘사한다.
2. 사실의 진상에서 전형적인 현상을 개괄하고, 나아가 사회 발전의 진실을 묘사해 낸다.
3. 현실을 진실하게 반영한다.
4. 현실주의는 결코 이미 있었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정련과 개괄을 통해 삶을 법칙을 파악할 수 있는 사실을 묘사한다.
5. 현실주의 작자는 현실의 삶에 깊이 들어가 삶의 진실에 충실하면서 객관적 현실을 직면하면 그 안의 규율과 법칙을 장악하고 현실의 본질을 반영해 낸다.
6. 현실주의 방법은 무엇보다도 삶을 충실히 반영해야지 작자의 어떤 관념에만 의거하여 삶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대체로 ‘현실 내지 삶에 대한 충실히 반영’이라는 상당히 공허한 견해를 벗어나지 못한다. 사실 작가가 채용하는 창작 방법은 작자 자신이 설명하지 않으면 후세 사람들은 그저 추측할 수밖에 없다. 가령 청나라 때 인물에게 무슨 ‘현실주의적 창작 방법’이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이것은 청나라 때 사람이 원래 갖고 있던 관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 가운데 일부는 이 점을 고려한 듯, 조설근이 ‘현실주의 창작 방법’을 채용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를 들어 보려 시도했다. 《홍루몽》 제1회에서 돌이 공동도인(空空道人)에게 한 말은 종종 조설근이 확실히 그런 창작 방법을 갖고 있었음을 설명하는 증거로 인용되곤 한다. 리시판(李希凡)과 란링(藍翎)이 보기에 돌의 말은 “조설근의 정밀한 현실주의 견해를 가장 분명히 나타내는” 것이다. 린동핑(林冬平)은 “이것(돌의 말)은 조설근의 현실주의 창작의 강령이다. ……이 강령에서 우리는 조설근의 높은 현실주의 관점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또 다른 논자는 장다이(張戴)는 심지어 이렇게 주장했다. 즉 “조설근이 처한 시대는 현실주의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러나 《홍루몽》의 창작 방법은 현실주의적이었다. 작자는 일찍이 자신의 창작이 단지 ‘자기의 일과 정리(情理)에 의거하여……모두 과거의 흔적을 따라 썼을 뿐, 감히 조금이라도 견강부회하여 그 진실성을 잃지 않았다’고 했다.”는 것이다. 후스는 돌의 말을 자서전설의 증거로 인용했는데, 이제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은 돌의 말을 ‘현실주의’ 선언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로 보건대 《홍루몽》의 문장은 너무 신기하여 전유(專有, appropriation)에 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설 본문을 통해 보면 작자는 의식적으로 자신과 돌을 구분하고 있는데, 돌은 사실상 《석두기》 이야기의 서술자로 되어 있다. 자오이헝(趙毅衡)이 명쾌하게 지적한 것처럼, 소설의 서술자와 현실 세계의 작자를 동일시하는 것은 서사학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전혀 타당하지 않다.

이상에서 필자는 “현실주의 창작 방법이 낙후한 세계관을 물리친 것”(이하 ‘승리론’으로 약칭함)이 옛사람이 원래 가지고 있던 관념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다. 사실 이 이론은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와 레닌(Nikolai Lenin: 1870~1924)을 계승한 것이다.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은 ‘승리론’을 제시한 후 종종 “이것은 현실주의의 가장 위대한 승리 가운데 하나”라는 식의 말을 덧붙어 마무리 짓기를 좋아했다. ‘가장 위대한 승리’라는 개념은 엥겔스에게 나온 것이다. 엥겔스는 하크니스(Margaret Harkness: 1854~1923)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발자크(Honore de Balzac: 1799~1850)는 자기 계급에 대한 동정과 정치적 편견에 저항할 수밖에 없었소.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귀족 계급이 몰락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고 그들을 더 이상의 행운을 누릴 수 없는 사람들로 묘사했소. 그는 당분간 그들밖에 찾을 수 없는 미래의 진정한 인간들을 보았소. 나는 그것을 현실주의의 가장 위대한 승리 가운데 하나이자 노년의 발자크에게서 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오.

엥겔스의 이런 관점을 직접 그대로 가져다 쓴 논자로는 적어도 리시판(李希凡)과 란링(藍翎)을 비롯해서 7명이 포함된다. 엥겔스는 발자크의 작품이 상류사회의 필연적인 붕괴에 대한 만가(輓歌)이며, 발자크가 운명적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계급을 동정한 것은 낙후된 세계관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발자크는 자신이 사랑하는 귀족을 더 나은 운명은 누릴 수 없는 사람들로 묘사함으로써 귀족의 필연적인 몰락을 예언한 셈이니, 이는 현실주의의 승리라는 것이다.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은 평론의 개념부터 사용한 어휘에 이르기까지 모두 엥겔스의 이론을 기계적으로 답습했다.

조설근은 자기가 속한 계급의 쇠락에 대해 어느 정도 미련과 연민을 가졌기 때문에 자신이 증오하는 인물을 질책할 때 눈물을 머금기는 했다. 하지만 그의 현실주의적 창작 방법과 고도의 예술적 수완은 한 봉건 귀족 대가정의 붕괴와 사망의 필연성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면서 또한 봉건제도 전체의 붕괴와 사망을 예고했다.

엥겔스 외에 레닌도 톨스토이(Lev Rolstoy: 1828~1910)의 학설이 가장 적절하고 심각한 의미의 반동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톨스토이의 작품이 ‘러시아 혁명의 거울’이라고 칭송했다. 서양의 문학이론가 포케마(D. W. Fokkema)와 입쉬(Elrud Kunne-Ibcsh)는 《20세기문학이론》에서 레닌의 관점과 엥겔스의 견해(세계관과 작품 사이의 차이)가 일치한다고 했다. 사어우(沙鷗)와 허치팡(何其芳), 양인안(楊蔭安)도 모두 톨스토이에 대한 레닌의 견해를 인용한 바 있다. 허치방은 엥겔스와 레닌을 ‘마르크스주의의 권위 있는 작가[經典作家]’라고 했고, 양인안은 레닌의 평론을 ‘전범(典範)이 되는 논문’이라고 여겼다. 이로 보건대 마르크스주의 문학비평이론이 이 연구 유파의 마음에 지극히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레닌의 견해를 《홍루몽》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도 충분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3) 작품론: 작품 자체의 객관적 효과론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이 위핑보를 공격한 명분 가운데 하나는 그가 작자의 창작 의도를 지나치게 중시하고, 《홍루몽》이 창조해 낸 전형과 반영된 현실이 이미 조설근의 주관적 사상이 가지는 한계를 무너뜨렸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했으며, 작자의 세계관에서 소극적인 성분들만 지나치게 과장했다는 것이었다. ‘작품의 객관적 효과’를 중시하는 논자들은 일반적으로 모두 ‘현실주의 창작 방법의 승리론’에 찬성하면서, 작자의 세계관이 그의 창작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작품’을 가장 윗자리에 두었다.

그러면 ‘작품의 객관적 효과론’에서 인식하는 ‘객관적 효과’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들의 논의를 귀납해 보면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의 ‘객관적 효과’는 대부분 ‘반봉건’의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여기에는 독자가 《홍루몽》에 묘사된 봉건 대가정을 통해 봉건제도의 죄악을 느끼게 되고, 봉건 통치계급에 대해 강렬한 증오심을 갖고 멸시하게 된다는 점까지 포함된다.

이런 ‘반봉건’의 ‘객관적 효과’는 사실 특정 독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의의일 뿐이다. 청나라 때에 《홍루몽》을 좋아했던 독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개중에는 ‘봉건계층’의 독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一粟 編, 《古典文學硏究資料彙編‧紅樓夢卷》 참조). ‘반봉건’이 《홍루몽》의 객관적 의미라면, 봉건계층이 즐겨 읽었던 《홍루몽》에 들어 있다는 그 ‘반봉건’에 대체 무슨 효과가 얼마나 있었다는 말인가? 이 때문에 《홍루몽》의 사회적 효과를 확정하려면 최소한 ‘반봉건’이 특정 시대의 특정 독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객관적 효과’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2006년의 보충]: 21세기에 이르러서는 이미 《홍루몽》의 ‘반봉건’을 이야기하는 대륙 학자가 상당히 줄어들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이 이렇게 주관적 바람이나 동기 개념보다 효과를 중시한 것은 마오쩌둥(毛澤東: 1893~1942)이 이미 1942년에 이런 견해를 제시했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마오쩌둥은 〈연안 문예좌담회에서의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 작가의 주관적 바람을 검토하여 그 동기가 정확한지, 그리고 선량한지를 따질 때에는 그의 선언이 아니라 행위(주로 작품)가 사회의 대중에게 일으키는 효과를 살펴야 한다. 사회적 실천과 그 효과는 주관적 바람 또는 동기를 검토하는 기준이다.

위핑보 비판 운동에서 마오쩌둥의 ‘효과론’은 논자들에게 자주 인용되었다. 위핑보를 비판한 학자들의 글에서 보건대 마오쩌둥의 관점은 ‘격파[破]’와 ‘설립[立]’이라는 두 가지 작용을 했다. 첫째, 격파의 측면에서 마오쩌둥의 관점은 위핑보의 ‘의도론’을 공격하는 데에 이용되었다. 여기에는 류롱(劉溶)과 수푸(舒撫)가 포함되며, 심지어 위핑보 자신도 이 말을 인용해 자아비평을 했다. 둘째, 설립의 측면에서 논자들은 “마오(毛) 주석이 지시한 원칙을 근거로 《홍루몽》을 연구”하면서 그 작품의 ‘사회적 실천 효과’를 제시했다. 여기에는 뤼이(呂一)와 리딩쿤(李定坤)이 포함되는데, 이 가운데 뤼이는 이렇게 주장했다.

200년 동안 《홍루몽》이 일으킨 사회적 실천 효과는 그 작품이 인민에게 중시되고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는 것이고, 백성을 탄압하는 봉건 예교(禮敎) 제도와 봉건 지주의 허위적인 외모 및 잔혹한 본질을 폭로했다는 것ㅇ며, 청년시대의 아픈 비극을 묘사하여 봉건제도와 봉건 통치계급에 대한 사람들의 증오를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결국 마오쩌둥의 〈연안 문예좌담회에서의 강연〉은 의심할 바 없이 ‘효과론’에 지극히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4) 비평론: 작자의 의도를 중시하지 않는 비평 방법

‘승리론’과 ‘효과론’은 모두 작자의 세계관을 초월하려고 시도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작자의 세계관에 ‘낙후’되고 ‘소극적’인 성분이 있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작자의 세계관을 인식하게 되었을까? 작자의 신세를 억지로 추측하는 것 외에도, 사실은 주로 작품으로부터 갖가지 ‘낙후된 성분’을 파악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승리론’의 범주에서 말하자면 창작 방법은 결코 세계관이 스며드는 것을 완전히 넘어설 수 없으며, 반대로 세계관이 창작 방법을 초월하여 ‘낙후’된 것들을 작품 안에 남겨 두게 된다. 또한 작품의 객관적 효과를 중시하는 것도 ‘소극적’ 요소를 완전히 배제하기가 매우 어렵다. 예를 들어서 쑨창시(孫昌熙)는 조설근의 창작 방법이 현실주의라고 여겼지만, 그도 역시 《홍루몽》에 색공(色空) 사상과 같은 ‘독소’가 들어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또 다른 일군의 논자들은 비평가 자신의 전략을 통해서 세계관 또는 의도론을 초월하려고 시도했다. 이들은 우선 작자의 세계관이 작품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렇게 하면 이 ‘고전 현실주의 작품’에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이들은 《홍루몽》에 들어 있는 ‘낙후한 성분’의 지위를 억누르거나 약화시키려고 많은 힘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마오싱(毛星)은 《홍루몽》에 색공(色空)의 관념이 들어 있지만 “작품 전체에서 차지하는 지위는 아주 사소”하다고 주장했다. 스링(石靈)도 마찬가지로 “이렇게 잡다하게 섞여 있는 것들은 이미 아주 사소한 지위로 물러나 있어서, 기껏해야 유기체에서 한 조각 피부나 몇 가닥 머리카락”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자오이런(趙宜人)의 주장은 더욱 억지스럽다. 그는 “작품 전체에서 현실의 인생을 묘사하는 부분이 90%를 차지하며, ‘색공’과 ‘숙명론’ 사상은 아주 사소한 위치에 흩어져 있을 뿐”이라고 했다. ‘아주 사소하다[極不重要]’는 표현과 유사한 것으로는 ‘비본질적인’, ‘극히 부차적인’, ‘전혀 중하지 않은’,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지 않는’, ‘실제 지위는 아주 미약한’ 등등이 있다. 결국 이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이것(만가[輓歌]의 정조와 색공 관념)은 작품의 찌꺼기이니 마땅히 인식해야 하지만, 작품에서는 대단히 부차적이고 부수적인 부분으로서 기본적으로 그 인물 형상의 완정함에 해를 끼치지 않고, 그 기본적이고 주요하며 적극적인 면을 전혀 가릴 수 없으며, 작품의 전투적 색채를 덮어 가릴 수 없다.

그들이 강화하거나 전경화(前景化, foregrounding)한 성분은 무엇인가? 훠송린(霍松林)은 이렇게 말했다.

인민성의 한 측면은 주요하고 주도적인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조설근: 인용자)가 《홍루몽》에서 나타낸 백성을 동정하는 사상적 경향은 대단히 뚜렷하다. 우리가 강조하고 흡수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측면이지 반대의 측면이 아니다.

이런 비평 전략을 제시한 이들 가운데는 최소한 허쯔(禾子)와 궈공자오(郭功照)가 포함된다. 이렇게 약간 편중된 비평 수법은 사실상 각기 필요한 바를 취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또한 ‘전유[appropriation]’이기도 하다.) 이것은 또한 위핑보 비판 운동이 일어난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신홍학 고증파도 고전문학 연구에 종사하지만 신홍학이 긁어 제거한 것 원소는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에게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져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은 연구 성과가 “어느 계급에게 유리한가? 우리 무산계급에 대해 말하자면 우리는 그래도 이처럼 조금 공리주의적인 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은 신홍학을 대신하고자 했던 것이다.

앞서 인용한 양인안의 말은 작자가 드러내는 ‘만가의 정서’와 색공 관념을 작품의 찌꺼기로 간주했다. 이렇게 “찌꺼기를 제거하고 정화를 취하는” 비평 전략은 마오쩌둥의 사상과 비슷한 데가 없지 않다. 마오쩌둥은 〈신민주주의의 문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대문화의 발전 과정을 깨끗이 정리하여 그 봉건적인 찌꺼기를 제거하고, 그 민주적인 정화를 흡수하는 것이 민족의 신문화를 발전시키고 민족의 자신감을 끌어올리는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절대 무비판적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는 〈연안 문예좌담회에서의 강연〉에서 또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일체의 우수한 문학예술 유산을 계승하되 그 가운데 일체의 유익한 것들을 비판적으로 흡수하여, 지금 여기 인민들의 삶 속에서 문학예술의 재료를 찾아 작품을 창작할 때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

“그 찌꺼기를 제거하고 정화를 흡수한다.”는 마오쩌둥의 주장은 종뤄(鍾洛)를 비롯해서 우핑보를 비판하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 여러 차례 인용되었다. 우주샹(吳組緗)은 마오쩌둥의 주장을 실제 비평에 응용하여 “작자의 세계관은 아주 많은 부분이 ‘봉건적 찌꺼기’이지만, 현실주의에 속하는 부분은 바로 ‘민주적 정화’”라는 결론을 얻었다. 류서우송(劉綬松)은 “그 가운데 일체의 유익한 것들을 비판적으로 흡수”하라는 지시를 받들어 “문학 유산을 받아들이고 고대문학 작품의 목적과 임무를 정리하고 연구”했다. 이로 보건대 위에 서술한 바와 같은 버리고 취하는 비평 이론은 마오쩌둥의 주장에 기원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비평 방법에 따르면 독자는 지극히 큰 해석의 자유를 가지며, 자자의 권위는 사실상 사라져 버린다. 이런 상황은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가 ‘저자의 죽음(The Death of the Author)’을 선포한 것과 비슷한 바가 없지 않다. 바르트는 “텍스트에 작자를 찾아 주는 것은 그 텍스트에 제한을 두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그가 ‘저자의 죽음’을 선포한 것은 해석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 주기 위한 것이었으니, 마르크스 레닌주의 연구자들이 ‘작자의 낙후된 세계관’을 포기한 것도 《홍루몽》에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의의’를 취하는 데에 편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리쾨르(Paul Ricoeur: 1913~ )가 《해석이론》에서 ‘의미에 의한 의도의 초월(surpassing of the intention by meaning)’을 말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독자가 의식적으로 각자에게 필요한 것(가령 ‘민주적 정화’ 같은)을 취하는 것 외에도, 그가 얻은 의미 역시 작자의 예상보다 훨씬 많은 가능성이 있다. (리쾨르의 얘기처럼, “텍스트의 이력은 작자가 설정한 유한한 영역을 벗어난다. 텍스트가 의미하는 것은 이제 작자가 그것을 쓸 때 의미했던 것보다 더 중요해진다.”) ‘작자 (의도) 결정론’은 실제로 ‘독자 (의도) 결정론’으로 대체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설근’은 이미 해석 활동에 아무런 구속력도 갖지 못하게 된다. 그런 맥락에서 이후의 논설들도 모두 ‘조설근’이라는 이름을 다투어 가져다 썼다(본서의 마지막 장을 참조할 것.)

학술 연구는 기본적으로 끊임없이 진보한다. 요즘의 시각에서 보면 위핑보 비판 운동은 당연히 많은 결함과 조잡한 부분이 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대륙의 학자들이 회고하고 반성했다. 우리는 위핑보 비판 운동이 어느 정도까지 학술 비평이고 어느 정도까지 정치 비판인지 분명히 구분할 수 없으므로, 기껏 해석 방법과 해석 효과를 통해 학술계의 이 큰 사건을 회고하는 정도에 그쳤다. 가다머(Hans-Georg Gadamer: 1900~2002)는 《진리와 방법》에서 이해의 역사성(historicity of understanding)이라는 견해를 제시했는데, 이 점은 이미 학계에서 자주 얘기되는 것이라 그다지 새로운 의미는 없지만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초기의 대륙의 《홍루몽》 연구를 검토하면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우핑보 비판 운동이 일종의 역사성을 구현했다고 얘기할 수밖에 없다. 당시의 해석 관행(interpretive convention)은 마르크스주의 문학비평이어서 해석자들은 대부분 이 길을 따랐으니, 그것은 이념이 비슷한 어떤 ‘해석 집단(interpretive community)’을 형성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통찰(insight)과 맹목(blindness)은 사실 이 연구 방법의 잘잘못에 의해 결정되었던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 중국 대륙의 최신 《홍루몽》 연구 저작들을 들춰 보면 마르크스 문학비평의 흔적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데, 이것은 그런 비평이 더 이상 지고무상의 지위를 누리지 못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새로운 해석 관행과 연구 방법은 결코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초기처럼 단일하지 않다(이 또한 일종의 새로운 역사성이다.) 이 때문에 50년 뒤에 ‘신시기’ 《홍루몽》 연구의 메타 비평을 하려면 지금 우리가 위핑보 비판 운동을 회고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곤란하리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러려면 몇 편, 심지어 십여 편의 회고록을 써야 논제를 깨끗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위핑보 비판 운동 이후에 중국 대륙의 《홍루몽》 연구계에는 ‘시민설’이 유행했다. 그 내용은 《홍루몽》과 ‘자본주의 맹아’ 사이의 관계를 연구하는 것으로, 조설근의 사상이 ‘신흥 시민의 사상’을 대표한다는 것이었다. 그 외에 ‘농민설’도 있었지만 기세는 미약했다. 다른 한편, 1950년대의 ‘세계관’이라는 화제는 197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중국 대륙의 연구자들이 《홍루몽》의 주제를 논의할 때에는 종종 ‘조설근 세계관의 한계’라는 식의 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예로는 리시판의 《조설근과 그의 홍루몽》 제5장과 홍광쓰(洪廣思)의 《계급투쟁의 형상 역사》 제8장을 들 수 있다.

1970년대 초에 마오쩌둥이 《홍루몽》을 정치역사소설이라고 말한 결과, 위에서 좋아하면 아래에서는 필연적으로 더 심하게 빠지는 사람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1973년부터 중국 대륙에는 ‘《홍루몽》 비평 열기’가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그 주요 논점은 ‘격파’와 ‘설립’이었다. 격파라는 것은 “《홍루몽》은 애정소설이 아니”라는 것이었고, 설립이라는 것은 “《홍루몽》이 묘사하는 것은 계급투쟁”이라는 것이었다. 이후에 《홍루몽》 비평 열기는 다시 중국 대륙의 ‘린퍄오(林彪)와 유가에 대한 비판 운동[批林批孔]’이나 ‘유가와 법가의 투쟁[儒法鬪爭]’의 논리와 결합되기 시작했다. 이에 《홍루몽》을 논하는 글 가운데도 즉시 이런 관점이 나타났다. “조설근의 세계관에는 강렬한 반(反) 유가적 경향이 있다”는 것이었다. 1975년에 출판된 《계급투쟁의 형상 역사》는 제5장의 제목이 “반동적 유가 사상에 대한 첨예한 비판”이었다.

이로 보건대 ‘조설근 사상’은 하나의 ‘논술 공간’이 되었으며, 이 공간에는 ‘신흥 시민 사상’이 들어갈 수도 있고 ‘강렬한 반 유가적 경향’이 들어갈 수도 있었다.

‘시민설’이나 ‘농민설’의 해석 전략에 관해서는 본서의 결론 부분에서 다시 논의하겠다. 이 시기의 《홍루몽》 관련 논술들을 검토해 보면 우리는 서양 문학이론가 그라프(Gerald Graff)가 얘기한 ‘영입(co-optation)’의 개념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20세기 말엽에서 21세기 초까지 ‘자서전설’은 비판 받는 운명에서 벗어나 조설근에 대한 연구가 계속 성행했고, 색은 경향의 《홍루몽》 연구 논저들은 조씨 가문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학설을 펼치는 데에 더욱 요령이 생겼다. 그들은 대부분 조설근의 ‘효과’ 아래에서 색은 작업을 전개했다. 비록 그들이 ‘색출’한 ‘숨겨진 사정’은 각기 달랐지만 많든 적든 간에 조씨 가문이나 강희제, 옹정제와 관계를 끌어다 붙였다. 자오통(趙同)의 《홍루시몽(紅樓猜夢)》에서는 조설근이 강희제의 여러 아들들이 황제 자리를 놓고 다툰 일을 은밀히 묘사했다고 했고, 츄스량(邱世亮)은 《홍루몽은 옹정제의 찬탈론을 은유한 것》이라는 저서에서 옹정제의 제위 찬탈을 은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훠궈링(霍國玲) 등의 《홍루해몽(紅樓解夢》에서는 조설근이 옹정제가 자신의 연인을 빼앗은 이야기를 숨겨서 서술했다고 주장했다. 펑징즈(馮精志)는 《홍루몽》이 옹정제와 건륭제를 은밀히 풍자한 작품이라고 주장했고, 류수어(劉鑠)는 조설근이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와중에 만주족에 반대하는 생각을 숨겨 놓았다고 주장했다. 류신우(劉心武)는 조설근이 “진가경(秦可卿)이 황족 혈통”이라는 사실을 숨겨 서술하면서 조씨 가문이 강희제 때에 폐위된 태자의 후예를 거둬들인 일을 숨겨 놓았다고 주장했다.

이상 여러 논자들의 주장에는 상당히 구체적인 차이가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도 발견된다. 즉 ‘조설근’의 ‘영향력’이 이미 후스 계열 연구자들에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새로운 색은 작업은 일반적으로 ‘조씨 가문’과 ‘조설근’의 그늘 아래에서 진행되고 있다. 색은파 연구자들은 조씨 가문 또는 조설근의 ‘숨겨진’ 사정을 ‘찾아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들이 찾아낸 것이 조씨 가문의 역사가 아니라 《조설근이 드러낸 궁중의 비밀스러운 소문》(1995)처럼 ‘조설근’이 드러낸 비밀 역사라면, 우리는 책의 제목에서도 ‘조설근의 힘을 빌리는’ 논자의 해석 전략을 간파할 수 있다.

새로운 색은에서는 대부분 조씨 가문의 재산 몰수와 이른바 ‘가문의 한’을 중추로 삼는데, 이것은 그들이 작품을 해석하면서 조정의 정쟁과 연관시키는 데에 편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자면 조설근의 역사성(historicity)이 신흥 색은파의 ‘씨앗’(해석의 기본 인자)이 되었다는 것이다.

종합하자면, 후스 계열 연구자들과 반만설(혹은 반청)을 주장하는 연구자들의 입장은 처음에는 적대적인 태도를 드러냈지만, 그들의 해석 방식을 놓고 보면 그들 모두 ‘작자 결정론’의 지지자들이었다. 새로운 색은파의 ‘작자론’은 아마 논술상의 임시방편일 뿐, 그 역시 일종의 담론 전략(discourse strategy)이었다. 사실상 이 또한 ‘자신의 목적에 맞게 쓰는’ 전략이었으니, 즉 “조설근을 색은에 활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조씨 가문과 청 조정’으로 자기주장의 설득력을 강화하려 했는데, 개관적으로 보면 바로 ‘작자 결정론’의 힘을 빌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작자 결정론’이 널리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