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한시-위응물韋應物 전초의 산중에 있는 도사에게寄全椒山中道士

전초의 산중에 있는 도사에게 寄全椒山中道士/ 당唐 위응물韋應物

今朝郡齋冷 오늘 아침 고을 관사 썰렁하여
忽念山中客 산 속에 사는 그대가 생각났네
澗底束荊薪 골짜기 가에서 땔나무를 하고
歸來煮白石 돌아와선 흰 돌을 삶고 있겠지
欲持一瓢酒 멀리 술 한 호리병 들고 가서
遠慰風雨夕 비바람 치는 저녁 위로하고 싶네
落葉滿空山 낙엽만 빈산에 가득히 날릴 뿐
何處尋行跡 어디서 그대 자취를 찾겠는가

이 시는 위응물(韋應物, 737~792)이 784년 저주 자사(滁州刺史)를 할 때 지은 시로 추정된다. 전초(全椒)는 당시 저주에 속해 있던 현의 이름이다. 위응물이 쌀쌀한 가을 자신의 관내에 있는 도사 친구를 생각하며 지은 시이다.

간저(澗底)라는 말은 ‘계곡 밑’이라는 말이다. 이 말을 잘못 이해하면 계곡의 하류나 계곡 물 안쪽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우리말로는 ‘계곡 언저리’에 가까운 말이다. 덕이 높은 사람이 낮은 관직에 있는 것을 비유하여 ‘간저송(澗底松)’이라 하는데, 이 말은 덕도 없는 사람이 높은 지위에 있는 것을 비유한 ‘산상묘(山上苗)’, 즉 산위의 작은 풀싹과 대응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간저’가 계곡 저 아래쪽임을 알 수 있다. 보통 땔감을 구하기 위해 산에 깊이 안 들어가면 대개 계곡 주변에서 하는 것이다.

흰 돌을 삶는다는 말은 《신선전(神仙傳)》에 백석 선생(白石先生)이라는 사람이 흰 돌을 토란처럼 삶아먹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우리나라도 예전에 배고플 때 산에서 흰 찰흙을 파다가 떡을 해 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여기서는 아마도 도인이 최소한의 생명 유지를 위한 조악한 식사를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위응물은 도연명의 시풍을 계승하는데, 왕유, 맹호연, 유종원과 함께 일군의 자연주의 시맥을 형성하여 이백이나 두보와는 다른 경지를 열었다. 이백의 시가 호탕하고 표일하다면, 두보의 시는 침울하고 사색적인데 비해 왕유의 시를 계승한 맹호연이나 위응물 등의 시는 아취와 회화성이 매우 뛰어나 심미적인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런 심미적인 작품은 두보의 우국이나 이백의 방달(放達)처럼 분명하게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어서 대중성은 떨어진다. 이는 마치 좋은 차나 산수화, 또 좋은 글씨와 같아서 아는 사람만 알고 모르는 사람을 붙잡고 어떻게 말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청산에 걸린 백운과 같아서 내 스스로 그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을 뿐 누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시도 각 구절을 하나씩 보면, 사람을 놀라게 할 만한 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남을 압도하는 기상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평범하고 조용하게 자신의 심경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시 속에 담긴 내용은 사람을 묘하게 끌고 아련하게 만든다. 이는 이 시의 뛰어난 점이 그 드러난 구절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 부분은 산에 낙엽이 쌓여 길을 못 찾는다는 말이 아니다. 산에 가도 낙엽이 날리는 가을산만 잔뜩 볼 뿐 도인을 찾을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두 구를 바꾸어 읽어보면 시상을 자연 알 수 있다. 이 이 시를 전초의 도인에게 보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평담한 가운데 진한 정의를 담고 있어 사람을 깊이 울린다.

이 시는 역대 평자들이 매우 극찬하였다. 원굉도(袁宏道)는 ‘묘인의 묘어는 사람들이 상상해서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고, 주경(周敬)은 ‘결말이 천연스러워 하늘이 와서 도운 듯하다.[神助]’라고 하였다. 또 심덕잠(沈德簪)은 사람이 쓴 것이 아니고 조화옹이 썼다는 의미에서 ‘화공필(化工筆)’이라고도 했다. 소동파는 이 시가 마음에 들어 흉내를 내 보려 했으나 끝내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고 실토하기도 했다. 외어보면 확실히 시상의 전개가 자연스러우면서도 정감이 깊고 마지막 2구는 참으로 좋다.

宋 范寬 <華岳晴崗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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